태피스트리

태피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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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다채로운 색실로 무늬를 짜넣은 직물.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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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재료
  2. 기법
  3. 역사

넓게는 가구 덮개, 벽걸이, 양탄자 등에 쓰이거나 의복의 장식에 이용되는 손 또는 기계로 짠 무거운 직물을 지칭하나, 좁은 의미로는 벽걸이나 장식용 덮개로 사용되는 무겁고 양면 모두에 무늬가 짜여진 수직물을 뜻한다. 19세기 영국의 공예가였던 윌리엄 모리스는 태피스트리를 색실로 짠 모자이크에 비유했고, 20세기 프랑스의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는 태피스트리를 간편히 옮길 수 있으며 교체하기도 쉬운 벽장식물이라고 했다.

태피스트리
태피스트리

재료

태피스트리(tapestry)
태피스트리(tapestry)

태피스트리를 짜는 실에는 양모가 가장 널리 쓰인다. 사(毛絲)는 가공이 쉽고 내구력이 강하며, 염색이 잘 되어 다양한 색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모사에 아마사·견사·면사를 날실로 섞어 사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른 재질의 날실을 사용하면 더욱더 다양한 색상과 질감을 표현할 수 있으며 세부 묘사에서도 더 뛰어난 효과를 낼 수 있다.

한국에서는 면사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데, 날실용의 100% 순면은 꼬임이 강하고 신축성이 있어 실을 당길 때와 느슨하게 할 때의 길이가 다른 단점이 있다. 최근에는 면사에 폴리에스테르가 섞인 전용 날실이 나와 있어 면사의 강도와 신축성을 보완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날실과 씨실에 모두 사를 사용한 태피스트리가 발달했고, 중세의 비잔틴 제국과 중동 일부 지역에서도 간혹 견직물 태피스트리를 만들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날실·씨실 모두 아마사를 사용한 아마 태피스트리를 만들었는데, 콥트직이나 중세 유럽의 일부 태피스트리는 아마사를 날실로만 사용했다(→ 리넨).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의 고대 페루에서는 태피스트리에 사와 모사가 함께 쓰였으며, 중세의 일부 태피스트리에도 모사와 면사를 섞어 사용했다. 14세기부터 유럽의 직조공들은 화려한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금사와 은사를 섞어 짰다.

기법

태피스트리는 기본 요소가 되는 날실이 씨실에 의해 감추어진 평직을 의미한다(→ 직조). 즉 날실이 나타나지 않고 씨실만으로 여러 가지 무늬를 짜는 방법을 말한다. 일반적인 직물에서는 씨실이 직물의 밑단에서부터 1줄의 실에 의해 짜여지지만, 이 기법에서는 미리 패턴을 밑에다 놓고 몇 종류의 색실로 짜 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특정한 디자인을 표현하기 위해 실을 정확하게 짜 넣어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숙련과 치밀함이 요구되며, 오랜 기간에 걸친 아주 느리고 세심한 작업을 거친 뒤에야 최종적인 무늬가 완성된다.

태피스트리를 짤 때는 고블랭 타입의 업라이트 수직기가 적당하지만 보통 수평형 직조기나, 작은 것을 짤 때는 4각나무틀도 사용된다. 나무틀로 소품을 짤 경우에는 보빈을 사용하여 한줄한줄 짜 나간다. 또한 기하학적인 패턴의 카펫을 짤 경우에는 평행으로 작업을 하므로 보통 수평형의 직조기가 훨씬 빠르고 바디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능률적이다.

태피스트리에는 씨실이 부분적으로 오고가지만, 패턴에 세로 방향의 직선이 있으면 씨실이 왕복하는 데 따라 슬릿(slit)이 생긴다. 즉 패턴에 따라 씨실을 왕복하면 세로 방향으로 구멍 또는 물고기눈 같은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슬릿은 다 짠 다음에 필요한 경우 바늘로 기워 붙이면 되지만, 슬릿을 장식적인 효과로 사용할 때는 그럴 필요가 없다.

슬릿을 디자인상 일부러 넣는 경우는 드물지만, 현대 작가뿐만 아니라 페루의 옛 직물에서도 이 슬릿을 사용한 직물을 볼 수 있다.

슬릿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도브텔링·지그재그·인터록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접속법 이외에 2, 3단 쯤에서 가는 실로 평직을 넣어주거나, 서로 인접해 있는 날실에 1줄씩 걸어주는 간단한 방법도 이용된다. 도브텔링은 개미 모양으로 기운 것이라 불려지는 접속법으로 날실 1줄에 좌우의 씨실을 교차시키는 방법, 또는 날실 1줄에 3줄의 씨실을 교차시켜 좌우로부터 거는 방법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 기법의 특징은 태피스트리를 제작할 때만 사용되고 바닥깔개를 짤 때는 사용되지 않는다. 긴 직선을 짤 때는 짜놓은 곳이 울퉁불퉁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인터록은 특히 북유럽의 카펫에서 많이 사용되어온 방법으로 싱글 인터록과 더블 인터록이 있다. 싱글 인터록은 수평으로 짜나가는 디자인에 주로 사용된다. 세로 방향의 직선은 도브텔링보다 훨씬 깨끗하게 짤 수 있으며, 안팎의 외관이 같은 것이 특징이다. 더블 인터록은 직물의 안쪽에 혹 같은 것이 생기게 된다. 일반적으로 직물은 자주 안쪽을 봐가면서 짜야 되지만 더블 인터록을 사용할 경우에는 더욱 자주 안쪽을 거울에 비추어가며 짜도록 한다.

역사

태피스트리(tapestry)
태피스트리(tapestry)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견사만을 사용하여 질감이 뛰어나고 가벼운 태피스트리를 직조했다(중국미술). 중국의 태피스트리는 앞·뒷면이 똑같아 뒤집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며, 무늬를 강조하기 위해 금속사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15세기말과 16세기초에 중국의 태피스트리 기법이 일본으로 전해졌다. 다색채(多色彩) 태피스트리라고도 하는 일본의 태피스트리는 중국의 것과 달리 표면이 도드라지는데, 이는 면사로 된 굵은 씨실을 견사나 금·은사로 덮어서 낸 효과이다. 한국 태피스트리의 역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현재는 약간의 거친 양모 깔개 정도가 생산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이미 8세기말의 기록에 교회나 수도원을 장식하던 태피스트리에 대한 언급이 있으나 실물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며, 태피스트리에 대한 묘사도 모호한 부분이 있어 거기에 사용된 기법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노르만족의 잉글랜드 정복을 묘사한 이른바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사실은 태피스트리가 아니고 털실로 수를 놓은 벽걸이이다. 유럽에서 태피스트리는 14세기부터 확고히 자리를 잡고 크게 유행했다. 가장 유명한 중세의 태피스트리는 1377년 파리에서 니콜라 바타유가 앙주 공작을 위해 제작에 착수한 7장짜리 연작 〈앙제의 묵시록 Angers Apocalypse〉이다.

당시 태피스트리의 중심지는 플랑드르로, 특히 15세기초 아라스에서 가장 훌륭한 태피스트리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15세기 후반에는 투르네와 브뤼셀이 태피스트리의 중심지가 되었다. 플랑드르 지방의 직공들은 16세기부터 유럽 전역에 공장을 세우고 스페인·이탈리아·영국에까지 태피스트리 기술을 전했다.

태피스트리는 매우 사치스러운 공예로 15세기에 플랑드르 지방에서 귀족들의 후원 아래 최고 수준으로 발전했다.

종종 1세트로도 만들어졌는데, 주제·양식·기량면에서 유사한 여러 장의 태피스트리를 서로 연결해서 걸기도 했다. 최상의 태피스트리를 짜기 위해서는 직인(織人)과 도안가가 가까이에서 함께 일하는 것이 가장 좋다. 태피스트리가 전성기를 누리던 중세시대에 직인들은 대개 화가의 도안이나 밑그림을 가지고 일했으나 때로는 그 도안을 더욱 정교하고 세련되게 고쳐가면서 작업했다(카툰). 일반적으로 1개의 밑그림으로 여러 벌의 태피스트리가 만들어졌다.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태피스트리 밑그림으로는 16세기 라파엘로〈사도행전 Acts of the Apostles〉과 17세기 루벤스의 〈성찬식의 승리 Triumph of the Eucharist〉를 꼽는다. 이 그림들은 그뒤로도 여러 차례 그대로 베껴지거나 모방되어 태피스트리의 도안으로 사용되었다.

태피스트리 기법은 회화를 능가할 정도로 정밀했지만,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회화의 대용물이 되면서 자연적으로 직물의 독특한 매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17세기에 프랑스로 플랑드르 직공들이 이주해옴으로써 중요한 태피스트리 산업이 시작되었다. 이때 세워진 공장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파리에 있는 고블랭 공장과 보베 공장이었다. 고블랭에서 베르사유 궁전을 중심으로 한 왕실에서 사용되는 태피스트리를 생산했던 반면, 보베의 제품들은 귀족과 부유한 중류계급이 사용했다(보베태피스트리). 19세기에 직조된 태피스트리는 대부분 회화를 모방한 것이거나 이미 예전에 만들어진 태피스트리를 모방한 것들이었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기계를 이용해 짜게 되자 전통적인 태피스트리 공예는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처음으로 태피스트리 공예를 부활시킨 사람들은 영국의 미술공예운동가들이었다. 이들은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장식미술에서 개인적인 창의성이 훼손당하자 이에 맞서 중세 장인들의 기량을 되살리려고 했다. 이 운동의 지도자였던 윌리엄 모리스는 런던 부근의 서리에 공장을 세우고 다양한 태피스트리 공예품을 생산했다.

태피스트리는 20세기에 현대 미술운동을 이끌었던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조르주 브라크 등 많은 화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프랑스의 화가 장 뤼르사는 중세의 직공과 화가 사이에 존재했던 밀접한 관계를 재건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20세기 최대의 태피스트리 작품인 〈묵시록의 그리스도 Christ of the Apocalypse〉는 영국 워릭셔 주(지금의 웨스트미들랜드)의 코벤트리 대성당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크기는 가로 23.8m, 세로 11.6m이며 1962년 영국의 화가인 그레이엄 서덜런드가 디자인하여 프랑스의 오뷔송 공장에서 직조되었다.

태피스트리 전시회로는 1962년에 스위스 로잔에서 국제 태피스트리 전시회가 처음 개최된 이래 2년마다 1번씩 전시회가 열려 매우 다양한 디자인의 제품과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