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랑드르

플랑드르

다른 표기 언어 Flandre
요약 테이블
위치 벨기에의 동플랑드르·서플랑드르 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
인구 6,623,505명 (2020년 추계)
면적 13,522㎢
언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
대륙 유럽
국가 벨기에

요약 오늘날 프랑스의 노르 주, 벨기에의 동플랑드르·서플랑드르 주, 네덜란드의 젤란트 주를 말한다.
플랑드르는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던 브뤼헤와 주변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세 초기 프랑크 왕국의 제도를 그대로 채택했으나 이후 봉건제도가 등장하여 강력한 군주들이 다스리게 되었다. 이들은 무력으로 영토를 넓히고 성을 지어 자신의 영토를 지켰다. 플랑드르 백작들은 이질적인 여러 민족을 하나의 나라로 통합했으며, 재정이 넉넉한 수많은 도시에는 독립성을 가진 자치정부가 수립되었다.
플랑드르 역사는 중앙권력과 지방권력 간의 패권 다툼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데, 결국 중앙권력이 승리를 거두었고 16세기에 왕권이 확립되었다.
초기 경제는 주로 농업이었으며, 12세기경 플랑드르의 교역과 산업은 국제적으로 중요해졌다.

플랑드르(Flandre), Flag of Flanders
플랑드르(Flandre), Flag of Flanders

이 지역은 오늘날 프랑스의 노르 주와 벨기에의 동플랑드르·서플랑드르 주, 네덜란드의 젤란트 주로 나뉘어 있다. 플랑드르라는 이름은 8세기에 처음 나타났는데, '저지대' 또는 '물이 범람하는 땅'이라는 뜻이다.

플랑드르의 기원은 플란드렌시스로서, 이곳은 당시 프랑크 제국의 지배를 받던 브뤼헤와 그 주변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중세 초기에 플랑드르는 프랑크 왕국의 제도를 그대로 채택했다. 후기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이 제도가 쇠퇴하자 플랑드르에는 봉건제도가 등장하여, 강력한 군주들(부유한 지주들)이 이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들은 무력으로 영토를 넓히고, 성을 지어 자신의 영토를 지키려고 애썼다.

주민들은 한 사람의 통치자 밑에 통합되어 있었지만, 대단히 이질적이었다. 남부지역 주민들은 주로 갈리아어 계통의 로마어나 로망스어를 사용한 반면에, 프랑크족이 밀집해서 살고 있던 북쪽에서는 주로 게르만어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해안지방에서는 작센족과 프리지아족이 미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플랑드르 백작들은 이 여러 민족을 하나의 나라로 통합했다. 12세기부터 플랑드르 백작들은 봉건 체제를 질서정연한 행정조직으로 바꾸고, 로마 법을 이용해 사법 체제를 중앙집권화했으며, 광범위한 법률 제정을 시작했다.

백작들의 공공질서 수호는 이러한 발전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는데, 이 분야에서 특히 이바지한 인물은 알자스의 필리프였다. 그는 수많은 도시마다 거의 똑같은 내용의 자치시로 인가해 주었고, 이 인가들은 모두 1157~63년에 이루어진 아라스의 자치시 인가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 시기에 그와는 별도로 자치체 운동도 발전하여, 재정이 넉넉한 수많은 도시에 상당한 독립성을 가진 자치정부가 수립되었다(코뮌). 도시를 다스리는 시의회 의원들은 행정관인 동시에 재판관이었다.

플랑드르 헌법의 역사는 중앙권력과 지방권력 사이에 벌어진 패권 다툼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에는 중앙 권력이 승리를 거두었고, 16세기에는 왕권이 확립되었다. 특히 14세기부터는 백작을 중심으로 한 대의제도가 발전했다. 이 대의기관은 주요도시인 헨트·브뤼헤·이페르가 장악하고 있었다.

플랑드르는 테루안 교구와 투르네 교구(랭스 대주교 관할), 그리고 위트레흐트 교구(쾰른 대주교 관할) 등 3개의 주교 관구로 나뉘어 있었지만, 어느 교구도 플랑드르의 주요도시에는 관구를 설정하지 못했다. 14세기에 교황권이 아비뇽과 로마로 분열하자, 플랑드르는 로마 편을 들어 아비뇽과 맞섰다.

이곳의 경제는 처음에는 농업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일찍부터 이곳에서 모직물이 생산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2세기경에 플랑드르의 교역과 산업은 국제적으로 매우 중요해졌다. 영주의 장원을 중심으로 한 농업이 위기를 맞고 화폐 경제가 팽창하는 동시에, 도시들이 교역과 산업의 중심지로 등장했다.

헨트와 이페르를 중심으로 한 직물 산업은 주로 영국산 양모를 원료로 하여 고급 옷감을 생산하게 되었다. 국제 교역도 매우 중요해, 13세기까지만 해도 플랑드르 상인들은 해외, 특히 샹파뉴의 박람회에서 무역을 했지만 그후에는 모든 나라의 상인들이 플랑드르로 모여들게 되었다. 항구도시인 브뤼헤는 세계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플랑드르는 지중해 국가와 스칸디나비아와 발트 해 연안 국가들, 잉글랜드와 라인란트(특히 쾰른)의 중간에 있다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많은 이익을 얻었다. 중세 말기에 플랑드르의 경제는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을 겪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플랑드르는 여전히 부르고뉴 공작들에게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플랑드르 건축 양식은 서민 주택, 종탑, 시청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지만, 아름다운 대성당도 많다. 문학에서는 특히 풍자와 교훈적인 장르가 발달했다. 반 에이크, 로히르 반 데르 웨이덴, 후고 반 데르 후스를 비롯한 플랑드르 화가들의 이름은 세계 예술사에 길이 남아 있다. 16세기에 플랑드르에서는 인문 과학과 법학 및 수학도 발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