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4세 양식

루이 14세 양식

다른 표기 언어 Louis XIV style

요약 루이 14세 재위기간(1643~1715)에 프랑스에서 생겨난 시각예술.

이 시대에 프랑스 회화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은 니콜라 푸생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성년시절을 이탈리아에서 보냈으나 파리 친구들이 위탁한 작품을 제작하면서 그의 고전주의가 프랑스 화가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648년 화가 샤를 르 브룅은 국왕의 도움을 받아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를 설립했는데, 국왕의 나머지 통치기간 동안 사실상 프랑스의 모든 화가들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미술양식을 지배했다.

17세기 전반까지 평범하였던 조각계가 이때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왕이 가장 총애했던 프랑수아 지라르동은 왕의 초상과 추기경 리슐리외의 묘비를 조각하였다. 앙투안 쿠아즈보 역시 왕의 의뢰를 받아 마자랭 추기경의 무덤을 포함하여 여러 작품을 조각하였다. 반면 피에르 퓌제는 그의 작품에서 이탈리아풍의 바로크 양식을 강하게 나타내어 왕실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하였다.

루이 14세가 세운 고블랭 공장이 고급 가구 및 왕궁과 공공 건물을 위한 비품생산을 하게 되면서 국가주도의 장식 예술 양식이 발전되고 곧 이웃 국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가구에 대모갑(玳瑁甲)이나 수입목재를 덧붙이고 청동·백랍·상아로 상감세공하여 자체에 두꺼운 박(泊)을 입히기도 했다. 또 두껍게 금박을 입힌 청동을 박아 모서리나 기타 부분이 마모되지 않고 거칠게 다루어도 상하지 않으면서도 장식효과도 나게 만들었다.

앙드레 샤를 은 특히 이 가구 양식의 설계와 연관이 깊다. 일반적으로 쓰였던 장식무늬는 조개, 사티로스(반인반수의 숲의 신), 예쁘고 순진한 어린이들, 꽃줄 장식, 신화적 주제, 장식적 테두리, 잎무늬 장식을 이용한 소용돌이 장식, 돌고래 등이 있다. 국가 특유의 양식을 만들려는 루이 14세의 관심은 특히 건축 분야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1665년은 프랑스 예술사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해로 바로 그해에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루브르 궁의 새로운 정면을 설계하기 위해 파리에 왔으나 이탈리아의 바로크 양식은 프랑스 기질에 맞지 않는다는 결정이 나서 루브르 궁은 프랑스 고전주의의 새로운 방식에 따라 완성되었다.

루브르 궁은 루이의 대신(大臣) 콜베르에게 맡겨졌고 왕은 베르사유에 관심을 가져, 1660년대 오래된 사냥 별장을 완전히 뒤바꾸기 시작하였으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궁전을 만들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규모의 건축설계였고, 그 결과는 전통적이며 장엄함이 극치를 이루는 걸작품을 만들어냈다.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술이 국가의 엄격한 관리하에 있기 때문에 베르사유 궁의 각 요소들을 전체에 맞춰 조정하고 설계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보통 프랑스인들은 베르사유 궁을 고전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움직임은 항상 있으되 언제나 절제된 형태를 띠는 바로크 구조물로 간주될 수 있다.

베르사유 궁의 또다른 중요한 요소는 조경(造景)이다. 유럽 조경건축 역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예술가인 앙드레 르 노트르는 왕과 함께 작업을 했는데 길주변의 전망, 분수대 및 많은 옥외장식을 설계했다.

베르사유 궁은 예술적 면에서뿐 아니라 심리적인 면에서도 전 유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전체 구조물이 너무 방대하여 루이 14세가 아주 오래 장수했지만 끝내 그것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