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브룅

르 브룅

다른 표기 언어 Charles Le Brun
요약 테이블
출생 1619. 2. 24, 프랑스 파리
사망 1690. 2. 12,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17세기 후반 프랑스의 미술품 제작을 중재한 화가 겸 디자이너.
Li Brun이라고도 씀.

많은 대규모 사업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과 뛰어난 기예를 두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루이 14세의 재위기간 중 30년 동안 프랑스 정부가 의뢰한 그림과 조각 및 장식물의 제작을 대부분 직접 맡거나 감독했으며, 전통적인 선전 미술의 전형으로서 유럽에 널리 퍼진 하나의 양식을 만들어냈다.

대법관인 피에르 세기에의 후원을 받아 처음에는 화가인 기욤 페리에게, 뒤에는 시몽 부에에게 미술을 배웠다. 1642년 로마에 가서 4년 동안 머물면서 니콜라 푸생과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등 당시의 바로크 양식 화가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파리에 돌아오자 중요한 종교 장식들을 의뢰받았으며, 1650년대 볼르비쿠앙트에서 랑베르 저택과 유력한 재정총감인 니콜라 푸케를 위해 만든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1661년 루이 14세에게 처음으로 작품을 의뢰받아 알렉산드로스의 역사를 주제로 한 일련의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제2의 알렉산드로스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루이 14세는 〈다리우스의 천막 The Tent of Darius〉을 보고 기뻐했다. 르 브룅은 루이 14세의 수석 화가가 되어 엄청난 봉급을 받았으며, 프랑스의 미술사에서 18세기말에 화가인 자크루이 다비드가 출현할 때까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푸케에 이어 재정총감이 된 장 바티스트 콜베르는 르 브룅의 조직력을 알아보고 그것을 가장 잘 활용하였다. 1663년 르 브룅은 소규모로 태피스트리를 제작하다가 그뒤 모든 왕가에 물건을 대주는 일종의 종합 공장으로 확장된 '고블랭'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660년대부터 왕궁들, 특히 베르사유를 장식하는 일들은 자동적으로 르 브룅과 그의 조수들에게 맡겨졌다.

그후 1663년에는 '회화·조각 아카데미'가 르 브룅을 회장으로 해서 재편성되었다. 1666년 그는 로마에 그것의 지부인 '프랑스 아카데미'를 만들었으며, 그 지부는 1세기가 넘도록 프랑스 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단체들에 힘입어 프랑스 미술은 독특한 고유성을 띠게 되었다.

르 브룅의 양식은 푸생의 정적이고 장엄한 양식을 좀더 극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 변형한 양식으로서 크게 그리면 단조롭고 평범해진다. 그러나 그는 〈은행가 자바흐와 그의 식구들 The Banker Jabach and His Family〉(1647, 베를린 프로이센 국립문화재관리재단 박물관)에서 볼 수 있듯이 초상화가로서는 매우 뛰어났다. 그는 계속 왕의 후원을 받았지만 1683년 콜베르가 죽은 뒤 지위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