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기

칠기

다른 표기 언어 lacquerwork , 漆器

요약 옻나무에서 채취한 을 목공예품의 표면에 칠하는 기술 및 칠한 공예품의 총칭.

목차

접기
  1. 제작과정과 기법
  2. 중국의 칠기
  3. 일본의 칠기
  4. 유럽의 칠기
  5. 한국의 칠기

''에 해당되는 영어 단어 '래커'(lacquer)는 칠의 일부 원료가 되는 락(lac:동인도산의 와니스)에서 유래된 것이다. 동아시아·중국·한국·일본의 옻칠은 코커스 라카(coccus lacca)라는 벌레의 점력 있는 산란알에서 채취한 미얀마산 칠원료이나 유럽인들이 동양의 옻칠을 모방하여 테레빈유에 고무와 송진을 혼합해서 만든 물질과는 구별된다.

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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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기는 동양 특유의 공예로서 방수성·방부성·내구성이 뛰어나 일찍이 귀한 물건의 표면에 옻칠을 해왔으며, 특유한 광택의 아름다움이 있어 미적·실용적인 가치를 겸하고 있다.

제작과정과 기법

중국·한국·일본에서 사용하는 옻칠은 보통 옻나무로 알려진 루스 베르니키플루아(Rhus verniciflua)의 수액(樹液)을 채취하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침전시킨 것이다.

옻 진
옻 진

이 수액은 종종 혼합되지만 자연상태에서 얻은 것으로서 옻나무가 재배되어 수액을 채취하기까지는 약 10년이 걸린다. 보통 6~9월에 옻나무의 몸집에 흠을 내어 수액을 받게 되며, 작은 가지는 잘라내어 10일 정도 물 속에 담가둔 다음 가지칠을 얻게 된다. 수액은 유백색으로 당밀(糖蜜)을 함유하고 있으므로 공기 중에 노출되면 황갈색에서 흑색으로 변한다.

채취된 수액을 나무칠 통에 넣고 잘 저은 다음 삼베로 불순물을 걸러낸 것을 생옻이라 한다. 이 생옻을 다시 칠통에 넣고 주걱으로 저어가며 약한 불이나 햇볕에 수분을 증발시킨다. 이와 같이 정제된 용액은 투명옻칠이라 하며 밀폐된 용기에 보관한다. 옻칠은 주로 나무에 하며 자기·금속·종이 등에 칠하기도 한다. 옻칠은 공기 중에 노출되면 최대의 인장강도(引長强度)를 갖게 되고, 윤기 있는 자기표면과 견줄 만큼 자연스러운 광택을 지닌다. 더욱이 습기 중에서 건조시켜야 최대의 강도를 유지하는 특성이 있어 일본인들은 옻칠한 물건을 습기 있는 상자나 방에 놓아두었고, 중국인들은 서늘한 밤에 땅굴을 파고 옻칠한 물건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칠기는 바탕재료의 종류에 따라 목심칠기(木心漆器)·죽심칠기(竹心漆器)·칠피칠기(漆皮漆器)·금태칠기(金胎漆器)·도태칠기(陶胎漆器)·지승칠기(紙繩漆器)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목심칠기는 백골로 나무를, 죽심칠기는 대나무를, 칠피칠기는 가죽을 사용한 것이다. 금태칠기는 금속의 산화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옻칠을 한 것이며 도태칠기는 도자기류의 표면에 옻칠을 한 것이고, 지승칠기는 종이를 꼬아 만든 기물 위에 옻칠을 한 것이다.

그밖에 대모칠기는 표면을 장식하는 재료로 거북껍질을 사용한 것이며, 금박칠기는 금박을 옻칠로 부착시킨 것이다.

칠기
칠기

칠기의 제작과정은 밑일·장식일·옻칠일의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바탕작업인 밑일은 완벽한 칠작업을 위한 필수과정으로 바탕나무(白骨)의 표면을 다듬고 고른 다음 금이 간 곳이나 접합 부위에 옻칠풀과 목분(木粉)을 혼합하여 떼우고 나서 고르게 손질하는 것으로 이것을 바탕고르기라고 한다.

그뒤 2번 정도 묽은 생칠로 바탕을 고루 칠하는데 이것을 바탕옻칠이라고 한다. 바탕옻칠이 굳어지면 숫돌로 곱게 갈아 평면을 잡는데 이것을 바탕바로잡기라고 한다. 이 위에 모시·베 등의 천(중국에서는 가끔 종이가 쓰임)을 붙이고 쌀가루나 밀가루에 옻을 혼합하여 붙이는데 이를 천바르기라고 하며 건조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한국에서는 천 위에 약간 묽게 옻칠을 한다.

천옻칠이 끝나면 천의 눈을 메우기 위해 옻과 태운 흙가루·뼛가루·숯가루 등을 혼합해 칠하여 건조시킨 다음 숫돌이나 사포로 거친 면을 곱게 고른다. 천눈메우기가 끝나면 천의 접착력을 높이기 위해 묽은 옻칠을 하는데 이것을 고래옻칠이라고 한다. 다시 갈아내고 곱고 단단한 칠면을 만들기 위해 옻칠을 여러 번 계속하는데 한 번 칠한 후에는 충분히 건조시킨 다음 반드시 고른 평면이 되도록 갈고 광을 낸다. 칠공예가가 예술적인 옻칠작업을 위하여 장식일을 시작하는 겉면을 만들기까지는 이와 같이 철저한 밑일이 요구된다.

칠기의 도안은 종이 위에 옻칠하여 전사하거나 옻칠과 색을 혼합하여 만든 색풀로 직접 그림을 그린다. 일본에서는 도안이 그려지면 그 위에 금분·은분을 뿌리기 위해 깃대·죽통(竹筒)·고운체 등을 사용한다.

중국의 조칠(彫漆)도 위에서 언급한 방법으로 만들어졌으나 일반 옻칠과는 두께에서 차이가 있다. 즉 전체적으로 옻칠의 두께가 두꺼우며 옻칠이 차고 단단해졌을 때 도안에 따라 겉면에서 매우 날카로운 V형의 조각칼로 파들어간다(목각). 조각술은 정확성이 요구되며 각 층을 정교하고 정확하게 파기 위해서는 한치의 실수도 없어야 한다.

중국의 조칠 가운데 척홍(剔紅)은 진사(辰砂)로 채색되었으며, 이밖에 담록색·담황색·갈색·흑색·가지색 등도 사용되었다. 조개껍질은 중국·한국·일본에서 칠의 장식재료로 사용되었는데, 주로 작은 조각과 분말 같은 형태로 칠 겉면에 상감되었다. 진주조개·앵무조개·전복·소라 등이 사용되었고 중국에서는 옥·공작석·산호·활석·상아·자기 등을 사용해 상감하기도 했다.

중국의 칠기

중국의 칠기는 명대(明代)의 〈휴식록 飾錄〉에 의하면 초기에는 죽간(竹簡)에 글씨를 쓰는 데 사용했으며 나중에는 흑칠(黑漆)을 한 것은 식기로, 내부에 주칠(朱漆)을 한 흑칠반(黑漆盤)은 의식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대(周代)에는 마차·갑옷·활·화살 등을 금칠과 채색칠로 장식했으며, 신분계급에 따라 사용이 법으로 규제되었다. BC 2세기경에는 악기를 장식하는 데 칠기를 사용한 것처럼 건축물의 장식에도 옻칠을 사용했다. 대(漢代)에는 옻칠의 사용이 더욱 많아졌으며 뤼순 항[旅順港] 부근에서는 옻칠된 종이 단지들이 발견되었다. 대(唐代)의 칠기유물은 더 많이 남아 있는데, 607년에 발견되어 일본 호류 사[法隆寺]에 소장되었던 쇼무 왕[聖武:724~749 재위]의 수집품들은 그의 사후에 쇼소인[正倉院]에 많은 중국 유물들과 함께 소장되어 있다.

이 가운데 금은상감 악기는 옻칠을 한 후 금속장식이 보일 때까지 연마한 것이다. 대(宋代) 칠기제조의 중심지는 자싱[嘉興]과 쑤저우[蘇州]였다. 송대 초기의 것으로 무소뿔색·흑색·주색으로 채색되고, 금분과 은선으로 꾸며진 칠상자는 매우 귀한 자료이다. 송대 말기에는 푸젠[福建]에서 자바·인도·페르시아·일본·메카 및 그외 지역으로 중국의 칠기를 수출했다.

대(元代)에 중국의 대표적인 조칠(彫漆)인 척홍이 이미 존재했음은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대에도 조소(曹이미지)의 〈격고요론 格古要論〉(1388)과 장응문(張應文)의 〈청비장 淸秘藏〉(1595), 당시 이름 높은 칠공인 조명(曹明)과 양명(楊明)이 쓴 〈휴식록〉 등에 의해 영락(永樂:1402~24 재위)과 선덕(宣德:1425~35 재위) 연간에 만들어진 척홍의 탁월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척홍 디자인은 대담하고 자유로우며, 색채도 18세기의 작품보다 더 중후하고 풍부하다. 16세기에 윈난[雲南]·다리[大理]에 척홍 제조를 위한 특별공장이 세워졌으며 모사품도 만들어졌다. 윤곽이 금칠된 칠기는 명대 초기에는 난징[南京]에서, 나중에는 베이징[北京]에서 만들어졌으며 나전상감한 칠기는 장시[江西]에서 만들어졌다. 선덕연간에 반짝이는 금장식칠이 일본에서 도입되었으며 훌륭한 복사품이 중국 칠공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명 말기에는 명 황제의 몰락과 함께 칠제조가 쇠퇴했다. 그후 나라 강희제(康熙帝:1662~1722 재위)는 베이징의 왕궁 부근에 예술적 수공예를 위한 27개의 공방을 세워 칠산업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척홍은 광둥·쑤저우·푸젠에서 만들어졌다. 1687년 중국에 입국한 루아르콤트는 당시 번성하던 산업정세를 높이 칭찬했으며, 강희연간에 중국의 다른 공예품과 함께 최초로 칠기제품이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이는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 유럽을 풍미했던 중국 골동품의 선풍적인 모습으로서 가구 및 다른 제품에 응용한 모조칠의 발전을 가져왔다.

예를 들면 1700년경 얼 스펜서와 후레머 스미스가 수집한 칠기제품은 신성 로마 제국 레오폴트 1세에게 기증하기 위해 강희제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쌍독수리의 표장이 그려져 있다. 강희연간의 칠기술은 진보된 것으로 명 칠기에서 자주 발견되는 작은 균열은 거의 없어졌지만, 척홍은 명대의 풍부한 색감과 단순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건륭제(乾隆帝:1735~96 재위)는 칠기의 찬미자로서 궁전가구와 장식품 및 기념품 제작을 위해 많은 칠공을 고용했다. 그의 후원 아래 제작된 물건은 매우 현란한 것들이었으나 색채는 경직되고 디자인은 진부한 형식주의적인 면을 보여준다. 19세기에 칠기는 원형을 상실한 채 재질이 저하되면서 하강기에 접어든다. 왕실공장에 남아 있던 칠기는 1869년에 불타버렸고, 그후에도 척홍이 제조되었으나 예술성은 상실되었다.

일본의 칠기

701년 옻칠의 제조가 일본 왕실에 의해 허용되었다는 최초의 언급이 다이호 율령에 있지만, 옻칠제품은 불교의 전래시기인 6세기 중엽에 중국으로부터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같은 시기에 중국산 옻나무가 소개되었으며 오늘날 현존하는 초기의 칠작품은 호류 사에 있는 옥충주자(玉蟲廚子)이다. 이것은 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한국의 영향이 강하게 보인다. 또한 쇼소인에는 7, 8세기에 중국산 금·은·나전으로 상감된 많은 칠기들이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쇼무 왕이 소유했던 흑칠금장식 칼손잡이는 756년 목록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확실하게 일본인이 제작한 것이며, 도쿄[東京] 국립박물관에 있는 동시대의 화살도 일본식 칠의 시작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후 간무 왕[桓武王:781~806 재위]이 수도를 나라에서 헤이안[平安]으로 옮긴 다음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예술의 발전을 가져왔는데, 특히 불교의 파급은 금칠의 사용을 확대시켰고, 옻칠이 주요건물의 장식에 사용되었으며 나전상감이 유행했다(헤이안 시대). 905년의 사치단속령은 가정용품의 한계와 질을 규제했다.

이 시기에 괄목할 만한 발전은 우수한 조칠의 생산인데, 이 기법은 중국으로부터 도입되어 목칠로 교체될 즈음에는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예는 닌나 사[仁和寺]에 소장되어 있는 보상화시회책자상(寶相華蒔繪冊子箱)으로 919년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는 후지와라 가[藤原家]의 보호 아래 칠기가 육성되었으며 이 시기의 특징은 귀금속과 나전의 상감으로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가마쿠라보리[鎌倉彫]란 조각한 나무에 두껍게 흑칠과 주칠을 한 것인데 그후 2세기 동안 번성했다. 이 시기에 꽃을 주제로 한 풍경화의 특징있는 일본식 처리가 시작되었으며 일반적으로 나시지 기법으로 표면을 장식하고 주석으로 상감했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는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1443~73] 장군의 후원 아래 기술과 예술면에서 큰 발전을 했다. 그는 다도와 제향의식에 큰 자극을 주었는데 이 예식에 사용된 우수한 무쇠용기들은 예술의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다. 선종신도들은 장식이 없는 단순한 형태의 흑칠기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나전상감 역시 이 시대 칠기의 특징이다.

무로마치 장인의 금칠기는 중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으며 이 기법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중국 장인들이 왔지만 일본의 칠기법을 자기 나라에 소개하는 데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 시대의 주도적인 칠공으로는 고아미 미치나가[幸阿弥道長], 다이아미[大阿弥], 제아미[世阿弥], 이가라시 신사이[五十嵐信齊] 등이 있다.

그뒤 일본을 휩쓴 내전은 한동안 산업발전을 저해했지만 모모야마 시대[桃山時代:1574~1600]에는 혼아미 고에쓰[本阿弥光悅]라는 일본 칠계의 거장 중 1명으로 현란하면서도 창조적인 칠기작품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 탄생하기도 했다. 그의 디자인은 세부의 단순한 기법이 모여 대담한 면을 보여주며 일반적으로 나전 덩어리로 고부조하거나 금속으로 상감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예술의 열렬한 후원자였는데 그의 후원 아래 칠기의 제작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가 죽자 부인은 교토[京都]에 고다이 사[高臺寺]를 세우고 다카마키에[高蒔繪]라고 불리는 독특한 칠양식으로 장식했는데 그녀에 의해 기증된 칠기류가 아직까지 이 절에 소장되어 있다. 1603년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통치가 시작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에도[江戶]에 대규모 칠예학교(漆藝學校)를 세웠는데, 현재 국외에 알려진 칠기들은 모두 이곳에서 제작된 것이다(도쿠가와 시대). 그후 칠기의 제작기술은 계속 발전되었으며 흑칠나전상감과 칠기에 조각하여 금박을 삽입하는 진킨보리 등이 등장했다.

이 시기에 현재까지 잘 알려진 인롱(印籠), 허리띠에 차는 휴대용 약곽, 민족의상에 불가결한 띠가 출현했다. 인롱은 가끔 칠이 된 것도 있지만 대개 나무·상아·뼈 등의 재료를 교묘히 조각한 것이다. 도쿠가와 초기의 인롱 옻칠도안은 중국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 그러나 오가타 고린[尾形光琳]의 작품은 그의 스승인 고에쓰에 의해 창안된 양식으로 제작되었으며 17세기 후반에 널리 확대되었고, 〈위대한 장인의 디자인〉이라는 회고집이 발간된 19세기초에 다시 부활되었다.

또한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의 팔교시회연상(八喬蒔繪硯箱)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고아미 가[幸阿弥家] 가운데 한 사람인 고아미 나가시게[幸阿弥長重]는 1639년에 필갑·지상(紙箱)·화장갑·경대 및 그외의 장식물이 포함된 3단 캐비닛을 완성했다. 일본의 다른 공예가들처럼 칠공예도 그들의 기술을 아들이나 제자에게 전수했는데, 1682년 63세로 죽은 야마모토 가[山本正家]의 전통은 10대까지 이어졌다.

또한 가지카와 가[梶川家]는 19세기까지 설립자의 전통이 지속되었다. 겐로쿠 시대[元祿時代:1688~1703]에는 칠기의 형태와 기술이 완벽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19세기초에 절묘한 작품들이 많이 제작되었으며, 후에는 더욱 정교해졌지만 금 대신 황동이나 다른 금속분을 쓰는 것이 성행했다. 산업사회의 마지막 위대한 장인인 시바타 제신[紫田是眞]이 있으며, 근대 산업사회로 이행되면서 고전과 아름다운 예술의 맥은 끊어졌다.

유럽의 칠기

16세기에 동아시아의 예술품 중 상당량이 유럽으로 들어갔지만 17세기에 이르러서야 네덜란드·영국·프랑스의 동인도회사에 의해 촉진된 중국과의 무역이 활발해졌다(중국미술). 그리하여 18세기 이후에는 유럽의 곳곳에서 동양의 옻칠을 모방하기 시작했으며, 그중 예수회교도들은 과학자·장인들과 함께 칠기제조법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최초로 발간된 칠공정에 관한 정보는 이탈리아의 예수회교도인 마르틴 마르티누스가 쓴 〈Novus Atlas Sinensis〉(1655)이다. 존 스톨커와 조지 파커에 의해 발간된 〈Treatise of Japannig and Varnishing〉(1688)은 문양그림의 첫 책자로 일본 칠기의 우월성을 보여주었다. 마르탱 형제들(기욤·시몽·에티엔·쥘리앵·로베르)은 볼테르가 칭송했던 광택 나는 마르탱 칠기를 개발했다(마르탱 가, 베르니스 마르탱). 그들은 베르사유 궁전의 방을 치장하고, 로베르의 아들 장 알렉상드르는 포츠담에 있는 프리드리히 2세를 위해 일했다.

프랑스의 칠 제조법은 1760년 프랑스 선교사 피에르 댕카르빌의 〈중국 칠기산업에 관한 논문 Mémoire sur le vernis de la Chine〉과 1772년 장 펠릭스 와탱의 〈화공·도금공·칠기공의 예술〉 부록의 새로운 정보를 통해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 와탱은 동양의 수지(樹指)와 견줄 만큼 우수하지는 못하지만 서양의 노간주나무로부터 얻은 수지가 가장 좋은 옻칠의 대용품이라고 했다(산다락 수지). 이것은 여러 가지 고무를 알코올과 테레핀유에 녹이고 역청을 혼합해서 그가 생각한 대로 만든 칠이다.

와탱의 책은 나무의 준비, 천바르기, 바탕칠하기, 표면광내기, 디자인대로 그리고 칠하기, 입체장식만들기 등에 대한 지침을 자세히 알려준다. 이러한 공정에 의해 만들어진 칠기용품은 동양 칠기와 같은 견고함과 광택은 없지만 동양칠기를 대신했다. 18세기에 유럽 칠기는 모방의 단계를 넘어서게 되었으며, 1720년대에 유럽의 공예가들은 인형, 건축모형, 수입칠기의 양식화된 식물형태 등을 똑같이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뒤 서양의 원숭이 같은 이국적인 동물, 직물주름, 당초무늬, 카르투슈(17세기 장식디자인에서 보이는 타원형의 윤곽), 리본 구성 등과 같은 유럽의 문양이 역으로 동양에 전해지면서 동양의 디자인에 일부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형과 함께 동양 칠기의 전통적인 흑칠과 금칠 대신에 진홍색·노랑색·흰색·청색·초록색 때로는 금색의 반점 등을 칠함으로써 배경색의 폭이 넓어졌다.

17, 18세기에 유럽에서 칠기의 쓰임새가 변하기 시작하여 17세기 후반에는 바로크풍으로 조각된 받침 위에 얹혀지는 캐비닛 상자를 장식하거나 가죽으로 덮은 실내벽을 장식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18세기에 칠가구인 책꽂이가 달린 책상, 벽시계, 티 테이블 등은 영국독일에서 최첨단의 제품이었으며, 프랑스이탈리아에서는 옷 서랍장과 코너 캐비닛을 더 선호했다.

동양의 칠장식이 가해진 가구 세트는 영국에서 질스 그렌디와 치펀데일 시대(1754~68) 캐비닛 제작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많은 걸작품들이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님펜베르크·뮌헨·밤베르크등 독일 도시들의 궁전에는 옻칠한 방의 벽들이 남아 있다. '스파의 상자'라고 불리는 작은 칠상자는 벨기에 도시와 리에주의 중심지, 그리고 다글리가의 일원이 활동했던 아헨의 특산품이 되었다.

19세기초에 나무와 금칠된 표면을 강조한 국제적인 고전 스타일의 웅장한 가구가 등장해 가구에 칠을 하는 경향이 거의 없어졌다. 채색된 톨 웨어, 작은 테이블 장식과 자개로 상감된 파피에 마셰 의자 등이 빅토리아 시대에 다시 유행했다. 이러한 가구는 제네스벨트리지런던회사가 주로 제작했으며, 1851년 런던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고비로 급속히 쇠퇴했다. 1925~30년에 벨기에 출신의 조각가 마르셀 볼페르와 스위스 출신의 조각가 장 뒤낭은 도자·나무·청동으로 제작된 작품에 동양의 전통적인 옻칠 기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칠기는 화학산업의 일부분으로 과거 유럽 칠기의 대가들이 만들었던 것을 능가하는 깊이 있고 단단한 것이었다.

한국의 칠기

나전
나전

한국의 칠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확실히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상당수의 한대 칠기가 삼국의 칠기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낙랑 이전인 BC 3세기경의 유적인 충청남도 아산군 신창면 남성리와 황해도 서흥군 천곡리,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 경상남도 의창군 다호리 유적에서 발견된 다수의 칠기는 한국 칠기의 역사를 청동기시대로 앞당기고 있다. 발견된 칠기는 원형 또는 정방형의 칠두(漆豆), 칠필관(漆筆管), 칠기개(漆器蓋), 칠궁(漆弓), 청동검의 칼집과 칼자루, 쇠도끼자루와 낫자루 등 다양하며 한대의 칠기와는 조형상으로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또한 이때 사용한 옻칠은 중국과는 달리 흑칠·산화철·주사(朱砂)를 배합한 것임이 확인되어 독자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 가운데 고구려의 칠기 유물은 매우 드물지만 강서고분에서 건칠관(乾漆棺)의 파편과 강서 우현리 중묘에서 채화흑칠기(彩畵黑漆器)의 단편이 발견되어 칠기를 생산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것으로는 1971년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에서 칠관·채화두침(彩畵頭枕)·채화금장족좌(彩畵金裝足座)·채화족좌 등 채화칠기류가 발견되었다. 익산 미륵사지에서는 목심흑칠(木心黑漆) 접시가, 석촌동 토광묘에서는 거치문 칠반(漆盤)의 잔편이 칠잔·칠괘(漆櫃)와 함께 발견되었다. 신라의 것으로는 5세기 이후의 고분에서 상당량의 칠기가 발견되는데, 주로 칠반·조형칠배(鳥形漆杯)·고배칠편(高杯漆片)·칠화기편(漆畵器片) 등 용기로서 우수한 칠기들이 많이 제작되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또한 조양동 고분에서 옻칠된 금속유물이 발굴되었다. 당으로부터 새로운 문화를 적극 도입했던 통일신라시대에는 일상용기로서의 칠기가 다른 기물보다 훨씬 많이 사용되었음이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33점의 칠기와 100여 점의 칠기편을 통해 확인되었다.

명문칠기·목심칠현·화형칠장식·목심칠기·주칠빗 등이 주요유물이며, 칠기류의 대부분은 내주외흑(內朱外黑)으로 되어 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금은평탈보상화문경(金銀平脫寶相華紋鏡)과 백동금은평탈경(白銅金銀平脫鏡)이 주목된다. 평탈이란 〈삼국사기〉에 '평문'(平文)이라 기록되어 있는 칠기의 장식기법으로 옻칠한 위에 아주 얇은 금판이나 은판을 문양에 따라 오려붙인 후 다시 옻칠을 해서 갈아내는 방법이다.

또한 나전단화금수문경(螺鈿團花禽獸紋鏡:호암미술관)은 소라나전·호박·터키석 등으로 장식된 특이한 예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에는 칠전(漆典)이란 관서(경덕왕 때 飾器房으로 개칭)가 있었고, 관영의 공장에서 칠기가 조달되었다고 하므로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칠기제작을 위해 힘썼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나전상감칠기수법은 12세기 중엽의 청자상감기법이나 이보다 앞선 청동은입사기법 등과 함께 대표적인 고려 공예기술이다.

1123년 국사로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 高麗圖經〉에 "그릇에 옻칠하는 일은 그리 잘하지 못했지만 나전일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나전칠기가 고려의 독자적인 양식으로 그 의장과 기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려의 나전칠기는 고운 자개편을 사용한 꽃무늬나 동선(銅線)을 이용한 곡선의 표현과 대모복채 등이 특징이며, 국당초(菊唐草)를 주로 하는 자개무늬는 정연하고 조밀한 의장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장식이 없는 무문칠기도 많으며 목제나 협저(夾紵)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고려사〉 원종 13년(1272)에 의하면 나전기의 제작을 감독하는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이 설치되었다고 하며, 또한 궁정조도(宮庭調度)로서 나전기를 제작하던 곳으로는 중상서(中尙署)가 있어서 이곳에는 화장(畵匠)·소목장(小木匠)·나전장(螺鈿匠)·칠장(漆匠)을 두어 각각 여러 공정을 분업적으로 수행했다고 한다.

일본 나라[奈良] 당마사(當麻寺) 소장의 나전대모국당초문염주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나전구갑복채국당초문봉과 나전묘금포류수금분향갑,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의 나전국화문경함, 일본 교토 북촌(北村) 미술관 소장의 나전목단당초문경함 등은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밖에 칠항(漆缸)·주칠탁잔(朱漆托盞)·하회가면 등에 광범위하게 옻칠이 사용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불교적인 의장을 이어받았지만 18세기경에는 서서히 화조(花鳥)와 자연풍경 같은 회화적 문양이 나전칠기에 나타나게 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전국의 각 군·현마다 옻나무의 그루수를 헤아려 3년마다 대장에 기재해놓도록 명시되어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는 관(棺)에 옻칠하는 것은 왕의 직계에 한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정책적으로 옻칠의 수급을 제한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말과 19세기초에는 가구류에서부터 각종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옻칠이 보편화되었다.

이것은 왕권의 약화로 옻칠이 민간에까지 보급되면서 대중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부분의 칠기들은 흑칠·주칠 위에 문자·십장생·쌍룡·학·연화·사군자 등이 나전으로 시문된 목심칠기이다. 이들 칠기의 문양은 우리 민족의 기복관(祈福觀)을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 후기 칠기의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나무·종이·대나무·금동·가죽 등에 옻칠된 무문칠기도 상당수에 이른다. 창덕궁에 소장되어 있는 주칠나전이층장·주칠나전농·주칠나전문갑·화류화조자수병·쌍룡문주칠원반·용봉문지장합·인궤·교피인궤·어도·주칠용교의 등은 주칠로 화려하게 장식된 조선왕실의 훌륭한 유품이다.

이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목제화약통·목조도색도형표자(木彫塗色桃形瓢子)·지제건칠표자(紙製乾漆瓢子)·죽제칠합(竹製漆盒)·나전함지·나전빗접·나전침(螺鈿枕),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나전상(螺鈿箱)·관대함(冠帶函)·나전베갯모·나전반짇고리·나전반·찬합·나전전통(螺鈿箭筒), 온양 민속박물관 소장의 대모흑칠팔각함·어피흑칠퇴침, 한국자수박물관 소장의 지승석(紙繩席)·대자·나전빗접 등은 생활 속의 아름다운 옻칠기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