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태평

보태평

[ 保太平 ]

세종(1418~1450) 때 창제된 악곡의 하나. 세종 때 조종(祖宗)의 공덕이 성대함과 건국의 간난(艱難)함을 형용하기 위해 고취악(鼓吹樂)과 향악(鄕樂)을 바탕으로 신악(新樂)을 창제하게 됐다고 『세종실록』 권138에 전한다.

조상의 문덕(文德)을 칭송하는 한문가사로 된 "보태평"은 "희문"(熙文)·"계우"(啓宇)·"의인"(依仁)·"형광"(亨光)·"보예"(保乂)·"융화"(隆化)·"승강"(承康)·"창휘"(昌徽)·"정명"(貞明)·"대동"(大同)·"역성"(繹成), 이상의 열한 곡으로 구성된 모음곡이다.

회례연(會禮宴)에서 문무(文舞)로 공연된 경우에 "보태평"은 보태평지무라고 기록됐다. 보태평지무의 악보는 보태평지무악보(保太平之舞樂譜)로 『세종실록』 권136과 권138에 전한다.

세종 때 회례연에서 연주되던 "보태평"은 "정대업"과 함께 세조(1455~1468) 때 종묘제례악곡(宗廟祭禮樂曲)으로 사용하기 위해 개작됐다. 개작된 "보태평"의 11곡은 "희문"·"기명"(基命)·"귀인"(歸仁)·"형가"(亨嘉)·"집녕"(輯寧)·"융화"(隆化)·"현미"(顯美)·"용광정명"(龍光貞明)·"중광"(重光)·"대유"(大猶)·"역성"이다. 1464년(세조 10)부터 종묘제례악으로 연주되기 시작한 "보태평"이 "정대업"은 오늘에 이르러 국립국악원에 전승되고 있다.

극장 무대에서 공연된 보태평 및 일무(문무)

극장 무대에서 공연된 보태평 및 일무(문무)

세조 때 연주된 악곡은 『대악후보』(大樂後譜) 권2에 전하고, 성종(1469~1494) 때 향악의 악공취재(樂工取才)를 위한 시험곡의 하나라고 『경국대전』(經國大典) 권3에 전한다. 16정간보(井間譜)와 율자보(律字譜)로 기보된 "보태평"은 『속악원보』(俗樂源譜) 권1에 전하고, 현금보(玄琴譜)·가야금보(伽倻琴譜)·비파보(琵琶譜)의 "보태평"은 『속악원보』 권6에 전한다.

② 조선초기 창제된 향악정재(鄕樂呈才)의 한 종목은 『악학궤범』(樂學軌範 1493) 권5의 시용향악정재에 전한다.

③ 현행 종묘제례악의 한 곡명. 일명 "보태평지악"(保太平之樂)·"보태화지곡"(保太和之曲).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선왕(先王)의 문덕을 칭송하는 내용의 "보태평"은 선왕의 무공(武功)을 찬양한 "정대업"(定大業)과 한 짝을 이룬다. 종묘제향(宗廟祭享) 때 "보태평"은 초헌(初獻) 절차에서 문무(文舞)와 함께 연주된다. "희문"·"기명"·"귀인"·"형가"·"집녕"·"융화"·"현미"·"용광정명"·"중광"·"대유"·"역성." 이상 11곡으로 구성됐다.

본래 1449년(세종 31) 10월 조회(朝會) 및 공연(公宴)에서 연주하기 위해 창제된 "보태평"은 『세종실록』 권138에 보태평지무악보(保太平之舞樂譜)라는 이름으로 전한다. 창제 당시 "보태평"은 제례악곡이 아니었고 보태평지무 곧 문무의 반주음악으로 제정됐기 때문에, 세종 때 그 음악은 "정대업"과 함께 회례악으로 연주됐다.

이 "보태평" 11곡과 "정대업"은 당시 중국계의 고취악과 고려 때 향악곡(鄕樂曲)을 바탕으로 창제됐다. 예컨대, "융화"는 "풍입송"의 곡조를, "혁정"(赫整)은 "만전춘"(滿殿春)의 곡조를, 그리고 "영관"(永觀)은 "서경별곡"(西京別曲)의 곡조를 차용하여 창제됐다.

보태평지악 11곡명 일람표

보태평지악 11곡명 일람표
순서 『세종실록』 『세조실록』 『대악후보』 및 『속악원보』 현행 연주시간

1

희문(熙文)

희문

희문

희문

2분 52초

2

계우(啓宇)

기명(基命)

기명

기명

1분 56초

3

의인(依仁)

귀인(歸仁)

귀인

귀인

2분 37초

4

형광(亨光)

형가(亨嘉)

형가

형가

1분 46초

5

보예(保乂)

집녕(輯寧)

집녕

집녕

2분 42초

6

융화(隆化)

융화

융화

융화

3분 7초

7

승강(承康)

현미(顯美)

현미

현미

2분 39초

8

창휘(昌徽)

용광(龍光)

용광정명(龍光貞明)

용광정명

3분 53초

9

정명(貞明)

정명

중광(重光)

대유(大猶)

2분 35초

10

대동(大同)

대유(大猶)

대유

역성(繹成)

2분 5초

11

역성(繹成)

역성

역성

진찬(進饌)

2분 59초

세종 당시 "보태평"은 임종궁(林鍾宮) 평조(平調)의 5음음계(황·태·고·임·남)로 구성됐으나, 세조 때 개작된 "보태평"은 청황종궁(淸黃鍾宮) 평조의 5음음계(황·태·중·임·남)로 구성됐다. 이러한 "보태평" 11곡이 조선 중기까지 종묘제례악으로 연주되다가, 1625년(인조 3) 인조가 선조대왕(宣祖大王)의 광국중흥(光國中興)을 칭송한 "중광"(重光)이라는 악장을 새로 "보태평" 11곡에 첨가시키도록 한 결과, 용광과 정명이 하나의 악장으로 통폐합됐다. 새 중광장이 포함된 "보태평" 11곡은 『대악후보』 권2에 전하고, 또한 1892년(고종 18)에 중수한 『속악원보』 신편(信篇)에 전한다.

현행 "보태평" 11곡은 『속악원보』 소재의 것과 같이 황종(黃鍾)·태주(太簇)·중려(仲呂)·임종(林鍾)·남려(南呂)의 5음음계로 됐다. 일제강점기 "보태평"은 "보태화지곡"으로 개칭됐다가 해방 후 "보태평"으로 환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3.987~92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247, 256~27, 270, 278, 291, 483, 484쪽
  • 『악학궤범용어총람』 송방송, 서울: 보고사, 2010년, 1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