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태평지무

보태평지무

[ 保太平之舞 ]

요약 향악정재(鄕樂呈才)의 한 종목. 일명 보태평·보태평정재(保太平呈才)·문무(文舞)·보태화지무(保太和之舞).

세종(1418~1450) 때 회례악무(會禮樂舞)로 창제된 보태평지무는 1464년(세조 10) 종묘제향(宗廟祭享) 때 문무초헌(初獻) 때 연행됐다. 이 문무는 아헌(亞獻)과 종헌(終獻) 때 연행된 정대업지무인 무무(武舞)와 한 짝을 이루었다.

성종(1469~1494) 당시 보태평지무는 36명으로 구성된 육일무(六佾舞)였다. 즉 무원 36명과 둑(纛)잡이 2명을 포함한 악공(樂工) 18명은 모두 진현관(進賢冠)을 쓰고 남주의(藍紬衣)에 적상조연(赤裳皂緣: 검은 선을 두른 적상(赤裳))을 입고, 적말대(赤抹帶: 붉은 허리띠)를 띠고, 백포말(白布襪)에 오피리(烏皮履)를 신는다. 무인의 왼손에는 약(籥)을 잡고 오른손에는 적(翟)을 잡는다. 보태평지무는 영신(迎神)·전폐(奠幣)·초헌(初獻) 때 춤을 춘다.

그러나 1897년(광무 원년) 대한제국 선포 후 팔일무(八佾舞)로 됐다가 일제강점기 동안 육일무로 복원됐다. 해방 후 다시 팔일무로 연행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용무보』 소재 보태평지무의 "희문"

『시용무보』 소재 보태평지무의 "희문"

보태평지무의 반주음악은 "희문인입"(熙文引入)·"기명"(基命)·"귀인"(歸仁)·"형가"(亨嘉)·"집녕"(輯寧)·"융화"(隆化)·"현미"(顯美)·"용광정명"(龍光貞明)·"중광"(重光)·"대유"(大猶)·"역성인출"(繹成引出)이다. 이 일무의 명칭이 일제강점기 보태화지무(保太和之舞)로 개칭됐다가 해방 후 보태평지무로 환원됐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3.993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557쪽
  • 『악학궤범용어총람』 송방송, 서울: 보고사, 2010년, 142쪽
  • 『國樂大事典』 張師勛, 서울: 세광음악출판사, 1984년, 337쪽

참조어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 , 보태평정재(保太平呈才), 보태화지무(保太和之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