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취악

고취악

[ 鼓吹樂 ]

요약 고취로 편성된 군악의 한 갈래. 일명 고취(鼓吹)·개악(凱樂)·고취군위(鼓吹軍衛)·고취악부(鼓吹樂部)·고취의위(鼓吹儀衛).

라는 말의 뜻처럼 고취악은 두드리는 와 부는 로 편성됐고, 행진(行進) 때 많이 연주됐다.

본래 한(漢)나라 때 고(鼓)·요(鐃)·가(笳)·소(簫)로 편성된 악대를 (短簫鐃歌)라고 불렀다. 단소요가는 전정(殿庭)에서 식거악(食擧樂)으로 연주된 횡문고취(橫門鼓吹)와 함께 고취로 알려졌다.

우리나라 안악(安岳) 제3호분(375년)의 벽화에 단소요가의 주악도(奏樂圖)와 대행렬도(大行列圖)에 고취악대(鼓吹樂隊)가 보인다. 수(隋)나라 때의 고취악대는 고·요·가·소 외에 각(角)·(節鼓)·적(笛)·(觱篥)·(桃皮篳篥) 등의 악기가 첨가됐다.

백제 고이왕 5년(238)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고취악이 연주됐다고 『삼국사기』 권24에 전한다.

고려시대 고취악은 국왕이 (圜丘)·(先農)·(太廟)의 제례의식에 참석하고 (還宮)할 때, 중국사신의 조서(詔書)를 받을 때, 원자(元子)의 탄생을 알리는 국왕의 조서를 내릴 때, 왕태자(王太子)의 비(妃)를 책봉하는 조서를 내릴 때, 그리고 공주를 시집보내는 조서를 내릴 때, 중국 천자(天子)에게 표전(表箋)을 올릴 때, 노인을 위한 (養老宴)을 베풀 때, 죄인들을 사면할 때, 그리고 출정했던 군대가 개선(凱旋)할 때 연주됐다.

삼국시대 연주된 고취악(鼓吹樂)의 전통은 고려시대 (法駕衛仗)·(八關衛仗)·(法駕鹵簿)의 (吹角軍士)와 (吹螺軍士)에 의해서 전승됐고, 고려의 고취악은 조선초기 (前部鼓吹)·(後部鼓吹)·(殿庭鼓吹) 등에 의해서 전승됐다.

당시 ""(與民樂)·""(啓宇)·""(篤敬)·""(笙歌寥亮) 같은 곡은 고취악 계통의 악곡들이다. 또한 "여민락만"(與民樂慢)·""(與民樂令)·""(維皇曲)·""(靖東方曲)·""(洛陽春)·""(步虛子) 등이 당악 계열의 고취악곡들로 임금의 거동 때 으로 쓰였다.

조선왕조에 전승된 고려의 고취악과 은 (1418~1450) 때 ""(定大業)·""(保太平)·"발상"(發祥)·"봉래의"(鳳來儀) 등의 (新樂) 창제 때 선율의 뼈대 구실을 담당했다. "발상"의 11곡 중 ""(昌符)·""(靈慶)·""(神啓)·""(顯休)·""(嘉瑞)·""(和成), 이상 여섯 곡은 당악계 고취악의 영향을 받아 6음음계 또는 7음음계로 구성됐다. 은 중국5조의 곧 우선법(羽旋法)이며, 각 곡의 조(調)는 를 중심음으로 삼은 (南呂宮)이다.

봉래의 중 "여민락"도 당악계 고취악의 음악적 특징을 보여준다. "여민락"의 는 『』(琴合字譜 1572)·『』(玄琴新證假令)·『』(俗樂源譜) 등에 전하고, 가사가 없는 "여민락"은 『』(韓琴新譜 1724)·『』(三竹琴譜)·『』(學圃琴譜)·『』(芳山韓氏琴譜) 등에 전한다.

현행 "만"(慢: 은 "景籙無疆之曲"), 그리고 ""(本令: "太平春之曲")이나 ""(解令: "瑞日和之曲")은 당악계 고취악의 음악적 특징을 보여주는 악곡들이다. 그리고 조선후기 (細樂手)와 (吹鼓手)의 전통을 전승한 (大吹打)는 현재까지 에서 연주되고 있는 고취악 계열의 대표적인 음악이다.

참고문헌

  • 『한국음악용어론』 송방송, 권1.203~205쪽
  • 『증보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민속원, 2007년, 189~90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방송, 49쪽

참조어

개악(凱樂), 고취군위(鼓吹軍衛), 고취악부(鼓吹樂部), 고취의위(鼓吹儀衛), 개선악(凱旋樂) , 위장악(衛仗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