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장 갈라고와 석우로의 인과

왜장 갈라고와 석우로의 인과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인과설화

• 주제 : 인과
• 국가 : 한국
• 시대 : 신라
• 지역 : 경상도

서뿔감(舒弗甘) 석우로는 신라 삼성(三姓)의 하나인 석씨(昔氏) 왕실의 지근한 친족으로 몸이 금지옥엽과 같으면서도 용맹이 뛰어난 맹장이었다.
여러 차례 왜놈들이 몰려와서 도둑질을 해가며 신라왕실을 괴롭힐 때마다 석우로는 자진해 나와서 왜놈들을 쥐잡듯이 색출하여 신라왕실을 지켜오곤 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왜놈들은 간간히 잊을 만하면 또 와서 성가시게 하고 어떤 때는 임금님의 친필을 가진 사신이 와서 왜왕의 빈첩(嬪妾)을 요구하든지 아니면 며느릿감을 구해달라고 신청하였고 때로는 기와공, 방직공 같은 기술자들을 구걸하러 와서 아주 귀찮게 하였다.
이번에도「갈라고」라고 하는 사신이 와서 신라의 객관(客館)에 머물면서 점해왕(占解王)에게 갖가지 요청을 하면서 온갖 투정을 다 부리고 있었다.
점해왕은 골치가 아파서 아예 정전(政殿)에 나시는 것까지도 잊고 머리를 싸매고 내전에 있었다.
심정을 눈치챈 석우로가 임금님께 나아가 말했다.
「상감님께서 몸소 왜사를 만나시지 않더라도 신이 객관에 나아가 요구사항을 알아보고 그것이 이치에 맞지 아니하면 혼짝을 내서 보내겠습니다.」
임금님은 오히려 다행한 일이라 생각하고
「그럼 경의 의사대로 선처해 보오.」
하고 허락하셨다.
석우로는 의기당당하게 집으로 가서 그의 부인의 품에서 놀고 있는 아들 글해(訖解)를 데리고 왜사로 갔다.
아들 글해를 데리고 간 것은 아버지의 위풍이 얼마나 당당하며, 까무잡잡하고 북슬 털이 나 있는 왜놈들이 얼마나 못났는가 하는 것을 직접 비교하여 보여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우로는 객관에 들어서자마자 의자에 앉아 있는 왜사(倭使)에게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물었다.
「어찌해서 나왔소?」
「임금님의 며느릿감을 구하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도대체 왜왕은 아들이 몇 명이나 되기에 그렇게 자주 며느릿감을 구합니까?」
「우리나라 왕자님은 한 20여명 됩니다.」
「한 배에 몇 명씩이나 낳기에 그렇게 많습니까?」
이렇게 말을 하고 보니 석우로의 말투는 왜국의 왕비를 완전히 짐승취급을 한 꼴이 되고 말았다.
갈라고의 마음에서 불길이 솟았다.
허나 만리타국이고 보면 화를 낸다고 해서 그러 쉽게 해결될 일도 아니다.
꿀꺽꿀꺽 침을 삼키며 억지로 참아가면서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오. 신라의 여자들은 부지런하고 일을 지성껏 잘하기 때문에 일을 시키려고 얻어가려 하는 것이오.」
「아-니, 그럼 종래 우리 여자들은 데려다가 왜국의 일꾼으로 부려먹고 있다는 말이요.
그런 배짱이라면 신라의 공주는 그만두고라도 암캐 한 마리도 왜국의 왕비로 줄 수가 없는걸―
진실로 일이 그렇다면 왜왕을 붙들어다가 신라의 소금 굽는 종으로 삼고 왕비는 데려다가 부엌데기로 만들어야겠는걸…」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어서 돌아가서 석우로가 그렇게 말하더라고 당신의 임금님께 고하시오.」
하고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와버렸다. 화가 난 왜사는 이를 악물고 길을 떠났다.
우로의 부인 맹원은 이 이야기를 듣고 통쾌해하기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인과는 자명한 것인데 그래도 내 집을 찾아온 손님이게 너무 대접을 소홀히 하였다고 생각하며 걱정했다.
그러나 석우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오히려 어린 글해를 어르면서
「검은 복슬털 강아지를 내 오늘 혼내 주었으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장담하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결과는 석우로의 생각과는 달랐다.
화가 난 왜사는 본국으로 돌아가자 마자 이 사실을 임금님께 알리고 우도주군(于道朱君)이라 하늘 장수와 만 여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서울을 쳐들어 왔다.
당황한 신라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상감께서도 걱정을 태산같이 하였다.
역시 석우로가 나아가서 말했다.
「상감, 이번 일은 신에게 책임이 있으니 조용히 유촌(柳村)으로 나가 계시면 신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어떻게 처리한단 말이오?」
「우도주군을 달래 보겠습니다.」
「큰일날 소리, 살기등등한 왜인에게 단신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석유지고 불에 들어가는 것과 같소이다.」
「그래도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하고, 그는 또 집으로 와서 전과 같이 하인들에게 글해를 업히고 길을 떠났다.

왜장의 막사에 다달아서 하인들과 글해에게 일렀다.
「내 곧 다녀올 터이니 게 있거라.」
「예, 빨리 다녀오십시오.」
이렇게 들어간 석우로는 저녁때가 되어도 돌아 나오지를 않았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못한 하인들은 그냥 그대로 돌아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왜막에 들어간 우로가 겸연쩍게 왜장에게 인사하고,
「농담으로 주고받은 이야기인데 뭘 그렇게 노하여 병사들까지 이끌고 오셨습니까.」
하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백명의 군사들이
「와」
하고 몰려와 그를 그물에 개잡듯이 묶어 넣고 불속에 집어넣어 생화장을 시켜 버렸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원수를 갚았으므로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이튿날 우로의 종들이 그곳에 갔을 때는 타다 남은 재 가운데 뼈대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깡그리 타서 없어졌다.
이 소리를 들은 명원부인은 예측한 대로라 생각하며 하늘을 보고 절치부심하였다.
「오, 당신 한 몸을 희생하신 값으로 적은 물러가고 수만 겨레를 잘 살리시긴 하였으나 독사 같은 왜인들의 손에 그렇게 참혹하게 돌아가시다니.
내 장차 신라 여성의 의분으로 당신의 원수를 갚아드리리다.」
하고 두 손을 불끈 쥐니 피 같은 눈물이 두 볼에 주르르 흘렀다.
이리하여 하루아침에 청상과부가 된 명원부인은 와신상담(臥薪嘗膽)으로 복수의 나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삼출 점해왕이 돌아가시고 미추왕(味鄒王)이 즉위하니 이 임금은 석우로 부인 명원부인의 여동생의 남편 되는 분이었다.
미추왕이 등극하면서부터 그동안 혐의가 풀렸다 하여 왜국에서는 또 다시 사신을 보내서 외교를 계속하자고 하였다.
이 소식을들은 명원부인은 임금님을 찾아가 청했다.
「왜국 사신을 우리 집에 데리고 가서 접대하고 싶습니다.」
「……」
「의아스럽게 여기실 것은 없습니다. 왜국 사신이 옛날 우리 영감님을 죽여 화장했는데 그 유골이나 어디다가 묻었는지 찾고 싶어 그럽니다.」
「좋소, 허나 젊은 과부가 왜국 사신을 단독으로 만난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소. 그러나 소원이 정 그렇다면 내 그렇게 하도록 일러 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임금님은 공사가 끝난 다음 사신에게 말하니 사신은 뜻밖이라는 듯 즐거움을 감추지 못한다. 「일반여인도 만나보기 어려운 처지에 왕자귀족의 부인이겠는가, 더구나 미망인이라니‥‥‥」
우도주군은 시간에 맞추어 달아오른 몸으로 그곳에 나아가니 명원부인은 꽃같이 단장하고 나타나 손수 주전자를 들고 술을 따라준다. 일찍이 이러한 예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저는 이 집의 주인이고 서뿔감 석우로의 아내요, 현 임금님의 처형입니다.
변변치 못한 주효이지만 많이 드십시오.」
「핫핫‥‥‥ 참으로 신라의 술맛은 꿀맛이오.」
이렇게 잔이 가고 또 가고 또 가서 혀가 꼬부라질 무렵이 되자, 부인은 더욱 애교를 떨면서 말했다.
「옛날 우리 죽은 이가 왜국 왕비를 데려다가 부엌데기를 삼겠다고 했다면서요?」
「어허, 허나 그것은 좋지 않소.」
「뭐 좋지 않습니까?」
「?」
「여보 왜사, 나는 왜사를 따라가서 왜왕의 부엌에서 부엌데기 노릇이라도 하고 싶은데.」
이렇게 농담을 걸면서 술을 권하니 필경 외로운 과부가 자기에게 정을 청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아주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눈이 가무스름해지자 부인이 말했다.
「왜사는 많이 취하셨습니다. 가시지 말고 저 방장 속에 들어가 쉬어 가십시오.」
왜사는 좋아서,
「어어, 좋소 좋아. 이 밤을 이곳에서 밝히도록 합시다.」
하고 음흉한 마음으로 방장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부인은 잠옷을 바꿔 입는 체하다가 초당에 숨겨 놓았던 하인들을 시켜 독안에 든 쥐를 잡듯 똘똘 말아 놓았다가 이튿날 아침 옛 장군의 순교지에 나아가 뼈를 찾고 그 뼈로 훌륭한 봉분을 모은 뒤에 왜사를 산채로 잿상에 올려 제사를 지냈다.
「네 듣거라, 네가 왜장 우도주군이렷다. 천지엔 순환의 법이 있고 보복이 있는 법, 애당초 내 가장 우로장군이 너희 왜왕을 욕한 것은 왜국이 너무나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그 무도에 대한 한마디 말의 보복이었거늘 너희는 그에 대한 보복이 너무나도 잔인하였다.
사람을 죽여도 역시 도를 벗어나서 생으로 불에 태워 백골을 던지고 갔으니, 너희 무리 그 오랑캐 성질에 또한 나는 오늘 하늘의 보복 법칙을 받들어서 너를 여기에 생매장하는 바이다.」
이렇게 큰 소리로 흰 소복을 한 명원부인이 제문을 외우니 옆에 섰던 노비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그를 땅속에 묻고 꼭꼭 밟아버렸다.
남편을 위하는 마음, 나라를 위하는 마음, 국왕을 위하는 마음도 좋지만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보복할 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싸움은 끝내 그치지 않는다.
칼은 칼, 총은 총, 오늘의 한일 상극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늦었으나마 우리는 저 간의 잘못을 각각 뉘우치고 선전으로서 우호할 수 있는 자비의 결사를 다시 한 번 다짐하는 외교를 맺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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