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무용

다른 표기 언어 dance , 舞踊

요약 미국의 S. K. 랭거는 무용의 개념을 3가지 견해로 설명한다. 첫 번째, 무용의 본질은 음악적인 것이며, 무용가는 음악의 정서적 내용을 몸짓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두 번째, 무용은 형식예술의 일종이며 움직이는 회화, 움직이는 디자인, 움직이는 조각의 연출이라는 해석이다. 세 번째, 팬터마임이 무용의 기본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그러나 팬터마임은 무용의 소재는 될 수 있어도 무용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예술로서의 무용은 무용에 적합한 고유의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 무용의 고유한 이미지란 신체의 동작으로 형성되거나 암시되는 것이다. 신체동작 자체는 물리적 현상이며 무용의 소재에 불과하므로 신체동작은 무엇보다도 몸짓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무용의 움직임이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신체운동의 목적은 이미지이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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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성요소
  2. 종류
  3. 서양무용의 역사
    1. 개요
    2. 고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3. 17~19세기
    4. 20세기
  4. 동양무용의 역사
  5. 인도 무용
    1. 개요
    2. 카타칼리
    3. 바라타나티아
    4. 카타크
    5. 마니푸리
    6. 민족무용
  6. 동남 아시아의 무용

고대 독일어 'danson'(잡아늘리다, 잡아당기다)에서 나온 말이다.

무용
무용

무용은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고 이들 정의는 어느 것이나 부분적으로 진실을 담고 있긴 하지만 어떤 정의도 전체적으로 수긍할 만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무용이라는 말에 관해서는 누구나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고 그 내용을 모르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만약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지휘하는 동작과 개가 익살스럽게 춤추는 모양을 무용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답변이 궁색해진다. 만약 무용을 음악에 맞춘 동작이라고 정의한다면 지휘자의 동작은 음악에 맞춘 것이므로 그것도 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만약 무용을 재미있는 동작이라고 정의한다면 개의 동작도 무용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여기서는 무용의 진수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S. K. 랭거가 말하는 무용의 개념을 살펴보자.

랭거는 무용에 관해 가장 널리 인정된 3가지 견해를 검토하고 있다. 그 첫번째 생각은 무용의 본질이 음악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무용가는 음악의 정서적 내용을 몸짓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는데, 여기에는 음악이 무용의 동인(動因)이라는 사고가 내포되어 있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활기찬 몸짓이 무용이라고 생각되기 쉬우나 랭거는 이와 같은 생각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음악에 맞춘 동작이나 리듬이 있는 동작만을 무용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적 리듬이든 물리적 운동이든 그것만으로는 무용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개가 춤을 춘다"는 표현의 경우, 거기에 나타나는 동작의 패턴(원형)은 모두 무용의 모티프(동기)가 되기는 하지만 무용 자체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무용에 관한 2번째 생각은 무용이 형식예술의 일종이며 움직이는 회화, 움직이는 디자인, 움직이는 조각의 연출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고전 발레에 자극을 받아 제기된 과거의 해석일 뿐이고 영화나 모빌 같은 새로운 예술의 출현으로 그 한계가 명백해졌다. 3번째 생각은 팬터마임을 무용의 기본적인 요소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잘못이다. 팬터마임은 무용의 소재, 곧 요소는 될 수 있어도 무용 자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용의 정의'는 새롭게 고찰될 필요가 있다. 만약 무용이 하나의 독립된 예술이라면 무용에 적합한 고유의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 그 이미지란 리드미컬한 동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리드미컬한 동작은 단지 무용의 실제 과정일 뿐 무용의 이미지는 아니다. 무용의 고유한 이미지란 신체의 동작으로 형성되거나 암시되는 그 '무엇'이다. 신체동작 자체는 물리적 현상이며 무용의 소재에 불과하므로 신체동작은 무엇보다도 몸짓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무용의 동작은 모두 몸짓인데 그 몸짓은 무용의 이미지를 형상화해서 이루어지는 기본적인 추상작용이다.

실제행위의 일부인 몸짓을 예술이라고 볼 수는 없다.

몸짓은 단지 생명력있는 운동일 뿐이다. 몸짓은 몸을 움직이는 인간에게는 매우 정확한 운동체험으로 의식되는데 관객에게는 시각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단순히 회전하거나 도약하는 사물의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몸짓은 인간의 생명이 지닌 운동으로 나타나고 이해된다. 따라서 몸짓은 주관적인 동시에 객관적이고,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현실생활에서 몸짓은 인간의 욕망·의도·기대·요구·감정 따위의 신호 혹은 징조로 작용한다. 몸짓은 그것을 구사하는 당사자의 심리상태에 따라 신경질적이거나 유연하게 표현된다.

현실적인 행위의 일부인 신체운동은 단순한 물리적 운동이지 예술은 아니다. 신체운동은 단순히 생명력을 표현하는 운동이다. 생명운동을 상상하고 연출해야 비로소 그것은 예술적 요소, 곧 무용의 동작이 될 수 있다. 그때 신체운동은 자유로운 상징형식이 되고 감정이나 의식, 예감의 뜻을 전하는 수단이 된다. 혹은 그밖의 육체적·정신적 긴장을 표현하는 또다른 '가상의 몸짓'에 연결되거나 그것에 편입된다.

자연의 몸짓을 이루는 것은 생명력의 중심이며 그 표현운동은 의지의 신호로서 제3자가 보게 된다.

그러나 가상의 몸짓이 신호는 아니다. 그것은 의지의 상징이다. 무용의 움직임이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신체운동의 목적은 이미지이다. 무용을 지배하는 것은 상상에 따른 감정이지, 현실적인 감정의 상태는 아니다. 무용의 몸짓은 현실의 몸짓이 아니라 가상의 몸짓이다. 신체운동은 현실의 몸짓이기는 하지만, 신체운동을 무도자의 감정을 표현하는 몸짓으로 바꾸는 것은 이미지적인 작업이다.

구성요소

무용의 구성요소로는 우선 무용가의 신체를 들 수 있다.

일상생활인 노동·유희·스포츠 등의 행위에도 당연히 인간의 신체가 간여하나, 이 경우 신체는 현실적인 목적을 채우려 하고 신체운동도 그 자체로 끝나버린다. 이에 비해 무용에서 신체는 그 자체로는 소재에 지나지 않으나 그 신체운동이 지향하는 것은 이미지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몸짓으로 표시되는 것은 현실세계가 아닌 가상의 세계이다.

흔히 사람들은 무용에는 음악이 따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무용은 음악을 몸짓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음악에 맞춰 움직이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음악이 따르므로 무용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음악을 들 수 있을 뿐이다.

무용과 음악은 역사가 있기 전부터 같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되기 쉽지만 많은 연구에 따르면 그것은 옳지 않다. 원시무용이나 미개민족의 무용을 조사해보면 음악 이전의 박자나 리듬, 곧 손뼉이나 발장단 등에 맞춰 춤추는 수가 많았다. 독일 태생의 음악학자 쿠르트 작스에 의하면 박자를 맞추는 것은 본래 발장단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팔꿈치·무릎·팔·옆구리·배·엉덩이 등을 두드리면 새로운 악기가 되었다. 보다 진보한 사회에서는 이같은 신체적 악기를 쓰는 일은 드물었고 주로 천조각이나 막대기 등을 사용했다. 바야흐로 북이 발명되어, 그 결과 발장단과 손뼉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박자나 리듬에 더해 멜로디와 선율이 나타나자 무용수는 보다 정열적으로 도취되어 무용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본질적인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다음 단계로 악기에 맞춰 춤을 추게 되었으며 19세기말까지는 무용용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러나 20세기가 되자 미국의 여성 무용가 로이 풀러가 연주용으로 작곡한 음악, 예를 들면 드뷔시의 〈야상곡〉 등에 맞추어 처음으로 춤을 추었다. 이어 그녀의 영향을 받은 이사도라 덩컨이 쇼팽·슈만 등의 연주용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오늘날에는 흔한 일이지만 이런 일은 20세기초에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또 제1차 세계대전 뒤 독일에서 루돌프 폰 라반이나 메리 비그만이 음악없는 무용을 제창하여 박자만 맞추거나 타악기만을 사용해 춤을 추었지만 결국 일시적인 운동으로 끝났다.

의상은 무용의 또다른 주요구성요소이다. 그 무용이 극장에 적합하든 아니든 의상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무용이 연극적일 경우 무용수는 작품이 지정하는 무대를 꾸미기 위해서 무대장치를 필요로 한다.

또 최근에는 조명도 중요시된다. 특히 스위스의 연출가이자 무대미술가인 아돌프 아피아의 출현으로 무대조명은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종류

무용은 그 종류가 아주 많고 분류방법도 여러 가지이다.

예를 들면 개인무용과 집단무용처럼 구성요소에 따라 나눌 수도 있고, 스페인 무용이나 인도 무용 따위와 같이 민족별로 분류할 수도 있다. 작스가 분류했던 것처럼 상징적 무용과 비상징적 무용으로 나누는 예도 있다. 작스는 애니멀 댄스, 장례무용, 무기무용을 상징적 무용으로, 호신무용·결혼무용·장례무용·전투무용 등을 비상징적 무용으로 분류했다. 이 항목에서는 사회적 기능에 따라 무용을 나누고 관객을 염두에 두는 무용과 그렇지 않은 무용으로 나누어 생각해보기로 한다.

관객을 염두에 두지 않는 무용은 자기들만 즐기기 위해 춤추는 것(민족무용·민속무용 등)이다. 설사 관객을 예상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때의 관객이란 자기들과는 동류가 아닌, 초인 혹은 신으로서 현실의 인간과는 다르다. 원시무용이나 미개민족의 집단무용이 이런 무용에 해당한다. 이런 종류의 무용은 매우 다채롭다. 예를 들면 농경민족의 경우 농작물의 수확이 많기를 비는 농경무용이나 비를 비는 무용, 수렵민족의 경우 사냥감을 많이 얻게 해달라고 비는 무용이나 싸움에서의 승리를 비는 무용을 들 수 있다. 관객을 염두에 두지 않는 주된 무용으로는 민족무용(ethnological dance 또는 ethnic dance)과 민속무용(folk dance)이 있다.

민속무용은 향토무용이라고도 한다. 민족무용은 특정한 지역의 고유한 무용으로서 시민 가운데서 태동해 시민들의 생활감정을 표현한 무용을 가리킨다. 엄밀히 따지면 민족무용에는 민속무용이 포함되지 않는데 모든 민족무용은 민속무용에서 발생했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민속무용이란 각 부락마다 지닌 고유한 무용으로서 한 사람의 안무가가 아닌 많은 서민들이 만든 것이며 그것들 가운데 두드러진 것, 혹은 여러 개가 뒤섞여 집대성됨으로써 민족무용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민속무용의 보고라고 불린다. 탱고·알레그리아스·팔카 등의 플라멩코 무용과, 호타·세기디리아스·사르다나·세비야나스 등의 지방무용이 있다. 그밖에 유럽 각국의 잘 알려진 민족무용으로는 폴란드의 마주르카, 체코슬로바키아의 폴카, 이탈리아의 타란추라, 프랑스의 팔랑도르 등이 있다.

민족무용의 보고라고 불리는 소련에는 벨라루스의 유로치카, 카자흐스탄의 트레파크, 조지아 지방의 호르미아 등이 있다. 인도·타이·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각기 독특한 민족무용을 볼 수 있다.

한편 관객을 예상하는 무용에는 쇼나 레뷰 등과 같은 오락무용과 발레나 현대무용 같은 예술무용이 있다. 연극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관객의 출현을 전제로 해 무용의 목적이 변질된 것을 우선 생각할 수 있다.

곧 민족무용, 혹은 민속무용의 주요한 목적을 이루는 제식성(祭式性)이 약해짐에 따라 그것을 지탱하던 공동체 의식이 희박해져 주술무용이든 전투무용이든 그 본래의 목적의식이 희박해지고 형체만 남아 쇼로 되어가는 것이다. 무용의 기술은 차츰 전문화되어 직업적인 무용가가 등장했고 동시에 그들의 생활을 지탱해주는 후원자도 출현했으며 공동체는 분열되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우르 왕조 시대에 이미 그같은 분열의 징조가 보였고 고대 이집트 시대에는 파라오의 연회에 흥을 돋우기 위한 전문무용가가 있었다고 한다.

로마 시대에는 팬터마임 무용이 등장했다. 궁중 발레가 융성하면서 무용의 기교는 더욱 복잡해져 오늘날 볼 수 있는 발레 예술의 기초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연예업이 번창하면서 캉캉이나 탭 댄스가 유행했고, 원래는 민족무용인 하와이의 훌라 댄스 같은 것까지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무용에는 관객의 존재를 예상하는 무용과 예상하지 않는 무용 외에도 그 중간 형태인 사교 댄스가 있다.

이 댄스는 원래 유럽의 궁중 살롱에서 파티에 참석한 남녀가 함께 즐겁게 춤춘 데서 비롯되었다. 남녀가 나뉘어 마주선 상대의 손을 잡고 춤추며 돌곤 하는 동안에 서로 엇갈리도록 짜여 있다. 마치 이것은 오늘날에 볼 수 있는 스퀘어 댄스와 같은 것이다. 남녀 1쌍이 1곡의 음악에 맞춰 춤추게 된 것은 윈너 왈츠가 생기고 나서의 일이다. 그뒤 사교 댄스는 폭스 트롯이나 아르헨티나 탱고 1곡 전부를 남녀 1쌍이 춤추게 되었다.

사교 댄스의 종류는 20세기에 들어서도 지터버그·룸바·삼바·찰스턴·재즈·트위스트·고고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서양무용의 역사

개요

유럽 민족은 매우 다양하고 급속하게 변천해온 무용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가장 초기의 기록을 보더라도 서양무용에는 항상 공동체나 제전에 쓰이는 무용과 여러 사회계층에서 즐기는 사교무용, 그리고 세련된 공연무용 등 매우 다양한 종류의 춤이 망라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춤들은 각기 독립되면서도 종종 중복되기도 하는 발전경로를 거쳐왔다.

고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선사시대 무용의 흔적은 스페인과 프랑스 등지의 동굴 회화에 남아 있을 뿐이다.

이 그림들을 근거로 하여 사가들은 종교의식이 선사무용의 동기가 되었다고 추측해왔다. 20세기에 남아 있는 바이에른-오스트리아 지방의 '슈플라틀러'(Schuhplattler)라는 남녀 쌍쌍춤은 BC 3000년 이전의 신석기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사가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선사시대 이후 고대 세계의 무용에 관해서는 그림 유적보다 문서 기록이 훨씬 더 많다.

고대무용의 양식·유형·목적 등에 관해서는 아직도 추측에 그칠 뿐이지만 추측을 뒷받침해주는 구체적인 증거는 훨씬 더 많다.

이집트에서는 제사장과 왕을 겸한 인물이 신을 대표하거나 자기 백성의 종 및 재생자(再生者)로서 춤을 추는 형식화된 제의무용이 행해졌다. 또한 이집트에는 무용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서 기록이 발견된다. 이 기록에는 오늘날의 아다지오와 흡사한 중동지방의 배꼽무용과 아프리카 내륙 출신의 전문 무용수들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이집트의 다양하고 세련된 무용은 고대 그리스 무용에 영향을 미쳤다. 일부는 크레타를 거쳐, 또 일부는 이집트에 공부하러 간 그리스 철학자들을 통해서 그리스로 전해졌다.

크레타에서 생겨나 그리스에 널리 퍼진 무용 형식 가운데 하나로 '퓌리케'(pyrrhiche)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무기를 들고 추는 춤으로 군사훈련의 한 부분이었다. 무수한 화병 그림과 부조에는 그리스 신 디오니소스 숭배와 관련된 황홀경의 무용 장면들이 등장한다.

디오니소스 숭배의식은 가을철 포도 수확기에 광란적이고 생기발랄한 무용과 더불어 행해졌다. 이 숭배의식은 또한 그리스 연극을 낳았으며 이는 급속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의식을 행하는 중에 무용수는 제사장의 배경장면으로 등장하여 제사장의 말을 춤과 몸짓으로 표현했다.

고대 로마 사회의 초기에는 무용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BC 200년경 전까지도 무용은 단지 합창단의 행진 형태에 그쳤음이 분명하다. 그뒤 그리스와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받아 무용은 로마 제전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BC 150년경에 모든 무용학교에 폐쇄령을 내렸지만 점증하는 무용에 대한 열광을 멈출 수는 없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BC 63~AD 14) 치하에서 로마인들에게 크게 인기있었던 무용 형식은 말없이 양식화된 동작으로 극적인 줄거리를 표현하는 전시적 팬터마임이었다.

무용수들은 악사와 합창단과 함께 공연했다.

〈구약성서〉는 무용을 특별히 즐거운 행사로 언급하고 있다. 다른 고대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대 히브리 무용도 대부분 제례의식과 연관되어 있었다. 히브리 무용은 남녀가 모두 추었지만 보통 남녀를 따로 가르는 것이 관례였다.

결혼식은 의식무용이 행해지는 중요한 계기였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유대인 이산기(離散期)에 많은 의식무용이 사라졌지만 혼례무용은 전통으로 계속 남았다.

중세 초기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제례무용은 북유럽 부족들 사이에서도 전승되어왔다.

무용에 대한 그리스도 교회의 입장이 한결같지는 않았다. 한편에서는 모든 열정과 기쁨의 표현을 거부하는 금욕주의적인 태도가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몇몇 초대 교부들이 이교도들의 무용을 그리스도교 예배에 활용하려 하기도 했다. 고대의 절기(節期)와 일치하는 그리스도교 절기에는 비록 새 이름과 새 목적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유서깊은 제례무용들이 다시 행해졌다. 이렇게 하여 이전에 신성하게 여겨졌던 무용이 갈수록 세속화되었다.

서유럽 사회는 12세기에 이르러 성직자·귀족·농민의 3계급으로 분화되었다. 이렇게 분화됨에 따라서 사교무용이 발달했다. 기사들이 추었던 남녀 쌍쌍춤은 세련되고 귀족적인 연애관을 표현했다. 농민들의 원무는 사람들이 원이나 열을 지어 보통 서로 손을 잡고 노래하면서 추었다. 합창원무는 으레 참가자들의 노래를 반주로 했지만 기사들의 궁정무용에는 대개 악기 반주가 따랐다.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탈리아가 무용 발전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사회계급은 더욱 복잡하게 뒤섞였고 새로운 출세 기회와 개인적인 부가 중시되었으며 세속적인 즐거움과 인체의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경향도 더 커졌다. 기념식과 축제가 늘어났으며, 중세의 떠돌이 마술사들이 무용선생으로서 많은 존경과 추종을 받았다. 그들은 재빠르게 귀족계급을 상대로 무용의 스텝, 무용할 때의 자세·태도·예절까지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시기의 이름난 최초의 무용선생은 도메니코 다 피아첸차였다. 그는 1416년 유럽 최초의 무용교본인 〈무용과 합창단 지휘법에 관하여 De arte saltandi et choreas ducendi〉라는 책을 출판했다.

프랑스에서는 원래 농민들이 추는 원무였다가 궁정에서 유행하게 된 브랑르로부터 무수한 무용 형식이 생겨났다.

15세기 무용 중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것은 '모리스카' 또는 '모레스크'라는 무용인데, 이는 스페인의 무어족이 추던 춤을 낭만적으로 개작한 것으로 보통 2줄로 서서 추는 합창무용 형식을 취했다. 이와 같은 합창무용에서 발레가 생겨났다. 사보이와 북이탈리아 전역의 궁정 연회에서 신화적·상징적·우화적인 내용을 담은 화려한 구경거리가 갈수록 인기를 끌었다.

16세기초 튜더 왕조의 잉글랜드에서도 그와 비슷한 야외공연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발리'와 마찬가지로 잉글랜드의 가면무는 단순히 가면을 쓰고 추는 춤에서부터 노래와 연설, 팬터마임을 결합시킨 정교한 구경거리에 이르기까지 거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그러나 초기 단계에서는 팬터마임과 무용이 쉽게 구분되지 않고 있다.

16세기말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무용을 한층 더 장려했다.

그녀는 가야르와 볼타를 능숙하게 추었으며, 1쌍의 무용수가 높이 도약하여 강하게 포옹하는 동작도 잘해냈다. 고대에 기원을 둔 연환무(連環舞)와 윤무(輪舞), 원무들로 이루어진 잉글랜드의 컨트리 댄스은 궁정무용에 새로운 활력소를 끊임없이 공급했으며 무용학교가 런던의 도처에서 번창했다. 16세기말과 17세기초에 문예부흥을 맞은 스페인도 무용에 매우 중요한 공헌을 했다.

당시 스페인은 사라방드·샤콘·판당고·플라멩코 등이 인기가 있었다.

17~19세기

루이 14, 15세 치하에서 프랑스는 서유럽의 로코코 예술시대를 선도했다.

이 시대는 단순함과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예술운동에서 출발했으며 무용의 시대이자 무용을 위한 시대이기도 했다. 미뉴에트는 세련된 동작을 강조하는 이 시대 무용의 상징이었다. 1661년 루이 14세는 13명의 무용선생과 음악가, 작곡가들에게 칙허를 내렸고 이를 계기로 최초의 무용예술원이 창설되었다. 왕립 무용 아카데미는 무용예술의 완벽성을 위한 객관적인 기준을 세우고 무용 훈련의 규칙을 통일시켰으며 무용선생들에게 자격증을 발급했다.

이러한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무용은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들의 영역이 되었다. 무용에 관한 책들도 풍부하게 나왔는데, 논문과 교본, 분석서뿐만 아니라 기호로써 무용을 기록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1700년 이후로 발레는 사교무용과 분리되었다. 날이 갈수록 기술적 요구 수준이 높아지고 아마추어가 전문가로 바뀜에 따라 발레는 실내무용에서 공연무용으로 이행되었다. 공연무용으로 바뀌면서 점차 낭송과 노래가 없어지고 발레는 춤과 마임만으로 줄거리를 표현하는 데 주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순화과정에는 시간이 걸렸다. 수십 년 동안 '코미디 발레'와 '오페라 발레'를 비롯해 '발레 닥시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가 혼합된 여러 형식의 발레가 존재했다. 사교무용 분야에서 1650~1750년은 '미뉴에트의 시대'라 불린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리는 대규모 무도회에서 미뉴에트는 축제의 정점이었으며 브랑르와 쿠랑트, 가보트를 망라하는 일련의 춤 가운데서 으뜸을 차지했다.

사교무용의 왕이라 할 수 있는 미뉴에트는 무도장 위에서 자유롭게 짝을 지어 복잡한 스텝과 미끄럼, 회전을 반복하면서 추는 춤이었다.

이 춤은 푸아투의 민속무용에서 비롯되었다. 이 춤은 오늘날에는 틀에 박혀 다소 작위적인 느낌을 주지만 당대에는 가장 아름답고 조화로운 무용으로 꼽혔으며 완벽하게 추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세심한 연습이 필요했다.

잉글랜드에서는 사교무용이 완전히 대중화되었다. 17세기 청교도들은 무용을 인간의 사악한 행위로 낙인찍으려 했지만 서적상이자 출판업자인 존 플레이포드(1623~86경)는 〈잉글랜드 무용교본 The English Dancing Master〉(1650)을 출판했다.

이 책은 잉글랜드의 전통적인 춤과 춤곡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80년 동안 18판을 거듭했으며 최종판에는 농촌에서 유래한 900종의 합창무용을 수록했다. 이 책은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었으며 책에 나오는 춤을 따라 출 수 있었다. 사람들은 궁정예절 따위에 매이지 않고도 즐겁고 활동적인 유희로써 춤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1700년경 잉글랜드 컨트리 댄스은 다소 형식화되거나 때로는 상당히 변화된 형태로 유럽 대륙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그것들을 대무(對舞)라고 일컬었다. 코티용과 카드리유라고도 알려진 원무들은 스페인과 독일, 폴란드 등지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이것들은 신흥 중산계급의 춤으로 자리잡았다.

잉글랜드 출신의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자들은 무용에 관해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귀족계급 출신의 정착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남부가 종교적 열정으로 이주해온 이주민들이 많이 사는 북부보다 대체로 춤을 더 즐기는 경향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무용교본〉은 아메리카에도 알려졌다.

해안도시에서는 사교무도회가 열렸고, 내륙의 변방에서는 곳곳에 널리 흩어져 있는 농장의 정착민들이 종종 함께 모여 호사스런 잔치를 벌이고 사교춤을 추었다.

르네상스 예술이 낭만주의 운동에 자리를 내주면서 미뉴에트의 시대에 이어 왈츠의 시대가 도래했다. 낭만주의 사조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이 왈츠도 독일에서 유래했다. 이 춤은 남녀 1쌍이 추는 회전무에서 비롯되었으며 가볍고 쾌활하고 물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이루어진다.

왈츠(Waltz)
왈츠(Waltz)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유행했으며 특히 빈은 왈츠의 도시로 알려졌다. 왈츠에 대한 열광은 급속하게 국경을 넘어 전파되었고 유럽 도처에서 왈츠의 변형이 등장했다. 독일에서는 쇼티슈가 발전했으며 프랑스에서는 발랑스 발스가 개발되었고, 이후에 미국에서는 더 느리고 미끄러지는 동작을 많이 쓰는 보스턴 왈츠가 등장했다. 1840년경에는 보헤미아 무용인 폴카가 왈츠의 중요한 경쟁상대로 등장했다.

무도장에서 인기를 끈 또다른 보헤미아 민속무용은 레이도박 또는 레도바였으며, 한편 폴란드의 마주르카와 크라코비악도 큰 인기를 누렸다.

19세기 발레는 자연스러움과 열정, 표현성을 이상으로 삼았다. 프랑스의 무용수이며 안무가이자 교사였던 장 조르주 노베르(1727~1810)는 최초의 위대한 발레 개혁가였다. 그는 당대의 위대한 작곡가들과 함께 신화와 역사에서 빌려온 주제들을 고도로 극적이고 서술적인 형식으로 안무했다.

유럽과 러시아 각지의 다른 안무가들도 노베르와 보조를 맞추어 발레를 세련되게 만드는 작업을 했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는 낭만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발레 무대에 자연의 정령과 요정들이 숱하게 등장했다. 남자 무용수 대신에 여성 무용수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안무가들은 한층 더 풍부한 표현 수단을 추구했으며 무용수들의 개성적 특질을 부각시키기 위해 애썼다. 1845년 이후 적어도 파리와 런던에서는 낭만주의 발레가 급속히 쇠퇴했다.

그러나 1860년대초 코펜하겐에서는 낭만주의 발레가 계속 인기를 누렸다. 당시 러시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자적인 발레 문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처음에 파리에서 발레를 수입한 러시아는 점차 토착적인 요소와 외래적인 요소를 결합시켜 독자적인 표현 기법을 개발해냈다. 차르 시대 고전 발레의 절정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무용단이 공연한 〈잠자는 숲속의 미녀〉(1890)·〈호두까기 인형〉(1892)·〈백조의 호수〉(1895) 등이었다.

이 작품들은 모두 표트르 차이코프스키가 작곡을 맡았다.

19세기에는 좀더 가벼운 종류의 다른 무용연희에 커다란 관심이 쏠렸다. 파리에서는 여성 전용의 캉캉이 열화 같은 인기를 끌었다. 런던에서는 알함브라 발레와 제국 발레가 유행했는데 이는 대부분 눈요기를 위해 만든 고전 발레였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연희가 발달했다. 민스트럴 쇼, 엑스트래버갠저, 벌레스크, 보드빌 등이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것들은 각양각색의 춤과 연극적 표현을 결합시킨 것으로 특히 흑인 문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춤으로는 탭댄스·소프트슈·벅앤드윙 등 틀에 박힌 경쾌한 춤이 유행했다. 19세기에는 또한 미국 서부의 급성장하는 도시에서 대중적인 무도장과 무용시설이 크게 늘어났다.

이곳에서 반 댄스와 케이크워크처럼 상식 밖으로 심하게 몸을 비트는 미국식 춤이 최초로 등장했다. 이 시대에 처음으로 유럽 무용의 역사에 신세계의 혈통이 섞여 들어왔다(사교춤).

19세기에는 여행이 사상 유례없이 늘어나고 서로 다른 문화권 사이의 접촉이 잦았다. 이국적으로 보이는 많은 무용 양식들이 서양권에 전파되어 민속무용과 민족무용에 대한 관심을 활발하게 불러일으켰다. 낭만주의 발레를 연기하는 발레리나들은 안무가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순회했다.

무용언어는 지리나 언어의 차이를 뛰어넘어 국제적인 의사전달의 매체가 되었다.

20세기

20세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찬 무용의 시대였다.

새로운 형식을 그토록 열정적으로 모색하고 개성적인 표현과 더욱 역동적인 생활양식을 그처럼 열광적으로 추구한 적이 없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연구 성과가 급속히 축적되고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이 높아감에 따라 모든 예술은 그러한 변화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발레는 러시아의 무용감독 세르게이 디아길레프(1872~1929)의 지도 아래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발레 뤼스가 몰고온 예술적 결과는 엄청났다. 1909년 그가 파리로 이끌고 간 발레 뤼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왕립극장에서 뽑은 일류 무용수들을 망라하고 있었다. 당시에 살았던 그 어떤 사람도 그처럼 수준 높은 발레를 본 적이 없었다. 그뒤 20년간 발레 뤼스는 러시아에서는 전혀 공연을 가지지 않고 서양에서 제일가는 발레단으로 부상했다.

디아길레프가 직접 발레를 안무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는 발레계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었으며 무용, 음악, 시각 디자인, 가사를 통합하여 모든 요소가 균등하게 작용하는 '총체예술'을 이루고자 했다. 발레 뤼스는 당대의 으뜸가는 작곡가와 화가들을 고무시켰고 가장 현대적인 예술적 작업을 실험하는 무대가 되었다. 1909~29년 많은 최고 무용가(니진스키·파블로바), 안무가(포킨·발란신), 가장 전위적이고 독창적인 화가와 작곡가(피카소·드랭·스트라빈스키·사티) 덕택에 디아길레프 무용단은 창조적인 예술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이 무용단은 영구적으로 순회공연을 하는 최초의 대무용단으로서 사설기구로 운영되었고 국적을 넘어 모든 서양인에게 갈채를 받았다.

19세기말 일부 무용가들은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비교적 제한된 표현수단에 의해 불가피하게 전통에 얽매여 있는 발레라는 예술형식 자체의 타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표현적인 무대무용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다. 여성이 새로운 형식의 개척자로 전면에 나섰다.

그들은 무용수들의 내면적인 충동에 따라 동작 속에 자기를 표현하는 무용을 옹호했다. 이러한 새로운 무용, 즉 '현대무용'의 선구자는 미국의 이사도라 덩컨(1877~1927)과 루스 세인트 데니스(1877~1968), 독일의 루돌프 라반(1879~1958) 등이다.

이사도라 덩컨(Isadora Duncan)
이사도라 덩컨(Isadora Duncan)

새로운 세기의 발레와 현대무용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는 무도장 문화에 주목할 만한 영향을 미쳤다.

유럽의 젊은 세대는 신세계에서 들어온 더욱 활발하고 역동적이며 정열적인 사교무용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19세기의 회전무는 투스텝, 원스텝이나 터키 트롯, 폭스 트롯, 그리고 퀵스텝같이 들쭉날쭉한 새로운 리듬에 맞추어 추는, 걷는 무용에 밀려났다. 그 리듬들은 아프리카가 원산지로서 라틴아메리카탱고룸바 또는 미국 흑인들의 재즈를 통해 전해졌다.

이 영향은 1918년 이전에 유행했던 래그타임과 그뒤를 이은 절분(切分)된 리듬 및 달콤한 스윙, 곡예와도 같은 지터버그, 다음 세대의 로큰롤 등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아프리카 예술).

라디오와 전축이 등장하면서 사교무용이 보급되자 순수한 민속무용을 추는 지역은 점차 줄어들었다.

민속무용은 서구적인 도시화·산업화의 본류에서 벗어나 있던 나라에서 새로운 형식으로 최소한의 명맥을 유지했다. 스페인에서는 열정적인 플라멩코 춤의 전통이 존속되었으며 헝가리에서는 작곡가들이 풍부한 민요와 민속무용의 유적들을 모아서 보존했다. 스페인의 바스크족 같은 소수민족들도 이웃 민족의 영향력에 압도당하지 않고 자신들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 민속무용을 보존했다. 아시아의 여러 공화국에서는 민속무용이 여전히 생생한 현실성을 가지고 남아 있다.

이전보다 더욱 활기차고 더욱 개방적인 모든 종류의 무용은 제2차 세계대전의 산물이었다. 전후의 사교무용은 지속적인 활력과 열광을 특징으로 한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인기를 누린 지터버그 같은 춤들은 빠른 발걸음으로 경쾌한 회전과 들어올리기를 하면서 추었다. 영화와 텔레비전은 트위스트 같은 로큰롤 춤들을 보급하는 데 기여했다.

재즈에 바탕을 둔 이러한 새 세대 무용의 특색은 춤추는 사람들 사이의 신체적 접촉이 없다는 점이었다.

1970년대 중엽에 디스코가 등장하면서 허슬과 범프같이 파트너와 함께 정해진 스텝에 따라 추는 춤이 살아났다. 디스코는 현대 재즈 무용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으며 체육경기식의 춤동작도 끊임없이 발달했다. 특히 1980년대에는 브레이크 댄싱이라는 곡예적인 춤양식이 등장했는데 이는 몸을 복잡하게 비트는 것이라든가 마임과 같은 걷는 동작, 목과 어깨에 의지해 빠르게 회전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반면에 덜 복잡한 춤양식도 있었다. 이를테면 슬램 댄싱같이 몸을 상대방에게 밀착시키는 춤이라든가 포고(pogo)처럼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그 자리에서 뜀뛰기를 하는 춤이 그것이다. 그러나 짝지어 추는 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서부 컨트리 음악에 맞추어 추는 '서부 스윙' 춤에서는 특히 그런 방식이 우세했다.

전후의 발레 무대는 금세기초 디아길레프의 경우같이 혁명적인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고전 발레 양식은 서방과 소련을 통틀어 절대적으로 군림했다. 발레가 사람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끌고 영구적인 무용단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발레의 양식과 내용에 폭넓은 변형이 생겨났다.

국제적인 순회공연이 대규모로 재개되었다. 발레와 현대무용은 양식과 인원 면에서 상당한 상호작용을 주고받았다. 현대무용은 혁신적인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마사 그레이엄과 트와일러 타프의 노력에 힘입어 계속 발전했다. 이들은 독자적인 무용단을 창설하여 새로운 무용양식을 모색했다. 또한 발레와 현대무용의 안무가들은 미국식의 뮤지컬 연극을 위한 무용을 만들기도 했다. 인도·실론·발리·타이 등지의 무용단들은 발레와 현대무용 모두에 영향을 미쳤다.

무수한 앙상블 작품이 생겨났으며 전통적인 민족무용에 바탕을 둔 그들의 레퍼토리는 무대용으로 각색되었다. 동유럽의 몇몇 나라와 이스라엘, 아프리카의 몇몇 신생국, 그리고 브라질·멕시코·필리핀 등지에도 그와 비슷한 무용단들이 있었다.

20세기초부터 무용활동은 지극히 다면적이고 화려한 면모를 보였다. 다른 어느 세기에도 사회적 활동 가운데 무용이 그처럼 중요한 역할을 한 적은 없었다. 이 점은 무용에 관한 연구와 집필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 별도의 무용학부가 개설되고 소련에 무용연구소들이 창설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20세기에 무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무용이야말로 서양 문화의 생명력과 힘을 샘솟게 하는 마르지 않는 원천임을 말해준다.

동양무용의 역사

고대의 무용을 보면 동양과 서양으로 분명히 구별지을 수 있는 어떤 근거는 찾기 어렵다. 어느 것이나 정신생활에서 비롯된 종교무용의 개념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그 구성도 비극적이었다. 그러나 중세로 들어오면서 서양무용은 교회가 무용금지령을 내린 이후 종교성을 잃고 오락적 색채가 두드러졌다.

반면 동양에서는 종교무용이 주류를 이루어 인간의 내적 세계를 표현하는 예술무용으로서 위치가 강조되었다. 동양무용은 일반적으로 오락성이 두드러진 서양무용에 비해 예술적 요소가 많고, 서양무용이 동적이며 형식미를 높이 사는 데 비해 동양의 것은 표현적이며 형이상학적 미에 차 있다. 또 서양무용이 하체운동에 중점을 두는 반면 동양무용은 상체운동에 중점을 둔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동서양 간에 개념이나 형식, 기교가 서로 어우러져 전통이나 인습이 강한 고전적 요소를 떨쳐버림으로써 그 차이를 인정하기 어렵게 되었다.

특히 창작무용의 경우에는 예술적인 것이든 오락적인 것이든 간에 명백한 차이점을 찾기 어렵다. 아시아의 많은 무용은 단순함과 복잡함, 집단과 개인, 소박함과 세련미 등의 2가지 대립적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이 범주는 또 민중과 궁정, 좀더 간단하게는 아마추어와 전문가로 나누어진다. 무용 형태에 나타나는 미학적 이념은 전통을 강조한 것이다.

인도 무용

인도 무용
인도 무용
개요

인도의 무용은 베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리그베다〉 가운데 여자의 춤에 관해 쓴 기록이 보이고 또 브라만교·불교·힌두교의 거의 모든 유적들이 무용에 관한 돋을새김이나 조각을 간직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예부터 종교에서나 왕궁, 서민의 생활에서 무용이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무용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2~5세기 사이에 썼다는 바라타의 〈나티아 샤스트라 Nātya-Śāstra〉이다. 오늘날에도 쓰이는 3개의 무용용어는 바라타의 이론으로서 가장 중요하다.

우선 나티아란 연극적인 내용과 관계가 있고 그 내용을 담은 정서와 감정을 몸짓으로 표현하는 무용이다. 또 순수 율동무용인 리타는 리듬을 정확히 맞추고 여러 가지 양식의 무용기법을 따라 추는 춤이다. 리티아의 경우는 단순한 리듬 운동에 따른 움직임이 아니라 정서나 감정의 표현을 목적으로 하고 여러 제스처를 써서 이야기를 하면서 춤을 춘다.

나티아·리타·리티아의 해석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인도 무용에 관한 문헌으로 이것에 언급하지 않은 것은 〈나티아 샤스트라〉 이후 오늘까지 거의 없다. 또 바라타는 남자와 여자의 춤을 구별해 남자의 춤은 신에게 바치며 여자의 춤은 성적 감정에 바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보다 나중에 나타난 난디케시와라의 〈아비나야 다르파남〉에서는 무용의 표현기교를 아비나야라고 칭하고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아비나야는 제스처로 하는 표현, 언어나 노래로 하는 표현, 의상이나 분장에 의한 표현, 종합적 유형에 의한 표현 등 4가지의 표현기교로 이루어져 있어 3, 4세기경에 이미 놀랍도록 정밀한 무용이론이 확립되어 있었던 사실을 보여준다.

또 칼리다사의 희곡에도 무용에 관한 기록이 많다. 특히 〈말라비카구니미트라〉를 보면 무용의 신 시바에 관한 신앙이나 당시 왕궁에서의 무용에 관한 논의, 남자 무용교사와 여자무용수의 관계, 반주음악이나 사용되는 악기 등 구체적인 사실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다만 기교의 구체적인 형태는 오늘날에도 불분명한 것이 많다. 10~13세기에 많은 무용이론서가 나왔지만 대개 〈나티아 샤스트라〉를 각기 다른 관점으로 다룬 것이다. 다만 샤룬 가디바가 남자의 춤(탄다바)과 여자의 춤(라사)을 분명하게 규정짓고 그 기교까지 분류한 것은 주목할 만한다.

12, 13세기부터는 특히 이슬람 왕조의 진출과 함께 서아시아적인 기교나 양식이 북인도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서민적인 요소를 지닌 노치, 곧 유흥가의 춤 등에서 영향을 받아 오늘날 더욱 세련된 카타쿠라의 고전무용으로 이어지지만 그 경위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남인도에서는 샤룬 가디바가 말하는 탄다바의 연극적 무용 전통이 카타칼리로, 또한 라사의 정감적 무용은 바라타나티아로 오늘날에도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카타칼리

인도에서는 4개의 주된 무용 유파가 잔존하여 고전무용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우선 남인도의 말라바르 연안에 전해지는 전통적 고전무용 카타칼리(카타는 '춤' 또는 '극', 칼리는 '음악'을 뜻함)는 본래 남자만의 연극적 내용을 갖는 무용이다. 인도의 4대 고전무용 가운데서도 특히 오랜 전통을 강하게 보존하고 있는데 기교가 아주 어렵고 신체 각 부위가 각기 독립된 움직임이나 표정을 나타내야 한다. 예를 들면 일정한 리듬을 타고 걸으면서 좌우의 팔을 각기 따로 놀리고 눈썹을 위 아래로 움직임으로써 놀람을 표현한다.

또 뺨으로 기쁨을 나타내며 주어진 연기를 해보이는 매우 복잡한 것이다. 특히 유명한 기교로는 얼굴의 왼쪽 반은 웃으면서 동시에 오른쪽 반은 우는 것도 있다. 또 손의 모양이나 얼굴 표정이 각기 다른 개념과 연결된다. 이들에는 상징적이고 전통적인 일정한 유형(手印과 라차칸이라고 함)이 있고 그 종류는 수백 가지에 이른다. 따라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수인만으로 대략적인 대화가 가능하다고까지 한다.

카타칼리는 보통 적색이나 청색의 원색을 쓴 화장을 한다. 특히 턱 옆에 종이를 붙여 얼굴을 크게 만들고 아름답게 장식한 큰 관을 쓴다.

17세기 이후에는 유럽인, 특히 포르투갈인 등에게서 영향을 받아 큰 스커트 모양의 의상을 입게 되었다. 그전에는 거의 벌거숭이 상태로 춤을 추었다. 카타칼리의 주제는 〈마하바라타 Mahābhārata〉·〈라마야나 Rāmāyana〉의 서사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또한 크리슈나에 관한 전설도 즐겨 다룬다. 주된 반주악기는 피리와 북, 그리고 타람이라는 심벌즈인데 다른 고전무용에 대해 압도적으로 강렬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다.

바라타나티아

2번째 유파는 남인도의 타밀나두 주를 중심으로 한 고전무용인 바라타나티아이다.

이것은 본래 여자 혼자 추는 춤이었다. 바라타나티아의 기원은 분명치 않다. 4개의 고전무용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나티아 샤스트라〉의 전통을 이어받아 특히 라사의 전형적인 춤으로서 사원에서 신에게 예배하는 여성 무용수(데바다시)에 의해 전수되어왔다. 바라타나티아라는 이름은 바라타의 〈나티아 샤스트라〉에서 생겼다. 그러나 이 이름은 일찍이 19세기말부터 불렸으며 그전에는 데바다시의 춤이라거나 다티람이라고 불렸다.

몇백 년 전부터 남인도의 왕궁 등에서는 데바다시를 불러들여 춤추게 했고 특히 그녀들을 훈련시키는 전업 남성교사들이 전통적인 이론을 발전시켜왔다.

19세기말부터는 사딜이라고 불리는 무대예술로서 일반에 공개되었고 오늘날 고전무용의 기초가 되었다. 이 무용은 사원에 봉사할 목적으로부터 오직 예술적인 표현만으로 전환이 이루어져왔다. 다만 그 내용은 역시 매우 종교적이며, 주로 신화에서 소재를 골라 여성의 매력을 가장 완성된 무용으로 표현했다는 칭송을 받는다.

바라타나티아의 무용 형식은 여러 가지이다. 보통은 우선 아라리프라고 하는 예배적·의식적 춤을 춘다. 아라리프는 연기의 마지막에 보여주는 티츠라나와 함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순수한 신체적 운동으로서 바라타의 이론으로 말하면 누르타에 해당하는 것이다. 3박자의 리듬에 맞춰 우선 눈·눈썹·목·가슴·팔·다리 등 신체 각 부분을 움직이기 시작해 신에 헌신하는 모습을 움직임으로 드러낸 것이다. 다음에는 바담이라는 내용의 간단한 노래가 불리며 크리슈나와 라다, 시바와 바바티의 사랑을 춤으로 묘사한다.

이 춤은 바라타의 이론에 따르면 서술적인 극무용인 느루티아에 해당한다. 바라타나티아의 무용 가운데 가장 내용이 복잡한 것은 바라남이라는 형식인데 크리슈나나 비슈누 신의 이야기, 시바나 바바티의 신화 등을 많은 변주부분을 지닌 음악에 맞춰 표현한다. 따라서 이것이 나티아에 해당한다.

기교가 매우 어렵고 복잡한 음악의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일 뿐 아니라 감정이나 연극적 내용을 전개해나가야 한다. 음악 반주에는 성악 외에 비너, 피리의 일종인 클람, 북의 일종인 무리단감 등이 쓰인다.

카타크

3번째 유파는 북인도의 러크나우 및 자이푸르을 중심으로 하는 고전무용 카타크이다.

카타크는 본래 여성의 독무인데 남자도 추곤 한다. 원래는 이슬람 왕조의 왕궁에서 추던 서아시아계의 무용으로서 여기에 인도 전래의 무용, 특히 라사의 요소와 힌두교 신화를 더해 만들어낸 무용이다. 각 요소의 기원이나 역사는 오래되었으나 카타크로서 통합된 때는 그리 오래지 않다. 이와 같은 인도, 이슬람적 요소의 혼합은 11, 12세기부터 북인도에서 활발했다. 무굴 왕조 이후에는 완전히 종교성을 탈피한 대중무용으로 퍼져 서민들이 즐기는 향락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다시 종교적 테마를 넣어서 인도 전래의 기법을 사용, 무대예술로 격상시켰다.

그러나 몸의 움직임에는 멀리 스페인의 플라멩코 무용에까지 통하는 것이 있다. 구체적으로 개념을 표현하기보다 상징적·암시적 포즈에 뛰어나고 율동적인 기교에도 어색함이 없다. 대개 서정적인 표정에 차 있고 힘찬 회전이나 세부적인 하체 동작에도 섬세한 맛이 깃들어 있어 북인도 음악 일반의 표정과 매우 일치한다. 반주음악으로는 유일하게 사란기와 같은 현악기만 쓰인다. 근년에는 다른 모든 북인도의 악기를 첨가하여 연출이 호사스럽다. 의상으로는 엷은 천으로 된 스커트 밑에 레깅즈와 같은 바지를 입는다.

꽤 무거운 방울을 다리에 다는데, 이 방울은 빠르게 회전할 때 중심 역할을 한다.

마니푸리

4번째 유파는 동북 인도 아삼 주의 민속무용에서 생겨난 고전무용 마니푸리로서 지금은 벵골 주에 퍼져 있다.

원래는 여성의 군무로서 아름다운 2겹 스커트, 우아한 손동작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교로만 본다면 다른 고전무용에 비해 간단하다. 아삼 주 마니푸르 왕국에서 생겼다고 하는데 크리슈나의 전설과 관계가 있고 카타크의 신체언어와 유사한 것을 사용한다. 이것은 궁정의 여자들이 연출했으며 전에 카타크나 바라타나티아가 오명을 들었을 때도 무사했다. 자주 상연되는 것은 '라스 릴라'라는 크리슈나에 관한 춤으로서 이것은 크리슈나 신에 대한 연애감정을 품은 처녀들의 가련한 표정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반주음악도 친근한 노래에 북인도의 살롯이나 발현악기인 시탈, 사란기나 에스라지 등의 악기가 조합되어 이루는 밝은 곡조가 특징이다.

민족무용

인도의 민족무용은 단순하며 인생의 기쁨이나 슬픔, 신에 대한 감사와 두려움, 기도 등을 자유로운 동작 속에 군중의 리듬 운동으로 나타낸다.

민족무용은 다음 3가지로 나뉜다. 첫째, 종교적 의식을 담은 것으로 인도에는 특히 이런 유의 민족무용이 많다. 비를 기원하는 춤이나 풍년을 기원하는 춤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 싸움의 춤으로 지금도 각 지역에 산재하는 부족 사이에서는 특색있는 의상을 입고 칼·방패·창을 손에 들고 춤을 춘다. 셋째, 민중의 기쁨을 나타내는 춤이다. 이 춤에는 윤무(輪舞)·방형·자유대형·종횡렬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아삼 지방에는 악마 파스칼과 크리슈나의 싸움의 춤 사트리야, 풍년의 춤 비라, 나가족의 싸움의 춤이나 투계의 춤 닐르이라림, 원진(圓陳) 춤인 칸바림 등, 그리고 4개의 긴 대나무를 겹쳐 우물 모양으로 만들어놓고 거기에 발이 빠지지 않도록 하면서 추는 쿠키나가, 볼로족의 기도무용 나트푸자가 알려져 있다. 벵골 지방에는 윤무인 킬턴이나 카지하 무용극인 자트라가 있다.

비하르 지방에는 비하루스라는 가면무용이 있어서 고도의 예술성을 자랑한다. 북부 우다르 지방에서는 종교극풍의 나우탄키, 에로틱한 동작이 많은 카하르, 사교무용인 졸라, 전투무용인 톨라 등이 있다. 펀자브 지방은 방그라나 깃다가 민속무용으로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라자스탄 지방에는 진다타라는 봉(棒)무용, 비루스족의 구마르나 게르 등 부락의 전통을 지닌 무용이 많다. 마디아프라데시 지방에는 종교무용으로 곤차나 락슈미자갈이 있고, 죽마(竹馬)무용인 스티루트도 널리 알려져 있다. 마자파라트 지방에는 사운다르야·켈로·다크라 등의 민속무용도 있다.

이들 외에도 인도 각지에는 많은 민족무용이 있다.

동남 아시아의 무용

인도에 기원을 둔 힌두교와 불교의 2대 종교가 아시아 전체로 퍼져 아시아 각지의 무용은 이들 종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독자적인 무용의 특성을 이루었다. 특히 동남아시아의 무용에는 힌두교의 영향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 고대 인도의 세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스리랑카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칸디아 무용으로 유명하다. 칸디아 무용은 가끔 연주회 형식으로 연출되기도 하고, 유명한 불교제인 찬디펠라헬라, 혹은 부처의 치아를 가지고 스리랑카의 오래된 도시를 따라 순회 전시하는 행렬의 필수요소가 되었다. 동남아시아 무용의 한 특징으로는 때때로 남성이 여장을 하거나 여성이 남장을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예술적으로 가장 세련된 동남아시아 무용은 궁정 무용수들이 왕궁에서 추었던 것이다.

유럽의 그리스도교국들과 대립한 이슬람 세계, 곧 서남아시아는 역사적으로 사라센 세력에 의한 정치적 통일, 그리고 이슬람교에 의한 종교적 통일을 이룬 지역이다. 이슬람 종교무용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오늘날 무용 형식의 예배동작이 남아 있다. 아라비아인은 음악이나 무용을 사랑하여 주연을 열면 으레 무희의 춤을 즐겼다. 말레이시아는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으로 술탄 지방의 토후는 각기 음악무용단을 거느렸다고 한다.

미얀마에서는 '푸에'라는 말이 모든 불교의식에 바치는 연극적 종합예능을 가리킨다. 아시아 대부분 지역의 연극이 그렇듯이 무용이 우위에 서지 않으면 어떤 연기도 완성되지 않는다. 미얀마의 가장 전통적인 종교연극 형식인 '자트푸에'는 부처의 전생을 묘사한 '자타카'에서 발췌한 것을 주제로 삼는다. 또다른 '요쿠테 푸에'는 서민의 제전에 따르는 춤으로서 가두에서 연출된다. 이들 '푸에'는 어느 것이든 아름다운 음악을 곁들인다.

인도와 중국의 영향을 받은 라오스·캄보디아·타이에서는 민속무용과 사교무용이 함께 발전해 3국에 공통된 무용 형식을 세웠다. 고전무용은 한결같이 궁중무용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 중에서도 인도·타이·인도네시아는 이른바 동양무용의 보고이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무용은 인도 카타칼리의 역동적인 힘과 타이의 무용이 보여주는 우아한 선의 전통을 합한 무용이다. 팔·손목·손가락의 섬세한 움직임과 관절을 중심으로 한 인형과도 같은 동작이 조화를 이루어 신비한 느낌을 준다.

필리핀에는 농사에 관한 무용을 중심으로 비교적 분명한 주제와 단순한 동작을 지닌 민속무용이 있다.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로 서양의 영향을 받은데다가 아시아에서 유일한 그리스도교국인 만큼 현존하는 민속무용의 대부분은 아시아적이기보다 서양적인 색채가 짙다.

티베트의 무용은 티베트 불교(라마교)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티베트에서는 무용을 모두 티베트 불교 의식, 행사의 일부로 인식한다. 따라서 주제도 완전히 종교적인 것뿐이다.→ 중국무용, 한국춤

봉산탈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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