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컨

덩컨

다른 표기 언어 Isadora Duncan 동의어 안젤라 이사도라 덩컨, Angela Isadora Duncan
요약 테이블
출생 1877년 5월 2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사망 1927년 9월 14일, 프랑스 니스
국적 미국

요약 덩컨은 현대 무용의 창시자로, 창작 무용을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형식적이고 기교적인 전통 발레를 거부하고 자유롭고 개성적인 표현력을 중시했다.
어린시절부터 발레의 엄격함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율동과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바탕으로 춤을 췄다. 21살때 영국으로 나가 대영박물관의 고대 그리스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몸짓이 자신의 춤과 같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고전적 춤사위를 부활시켰다. 노출이 많은 고대 그리스의 드레스를 입고 맨발로 자유롭게 춤을 추는 그녀의 무대는 기존의 발레에만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당대의 예술인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러시아 시인 예세닌과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겪고 헤어져 말년을 초라하고 가난하게 보내다 매고있던 스카프가 자동차 뒷바퀴에 말려들어가 사망했다.

덩컨(Isadora Duncan)
덩컨(Isadora Duncan)

창작 댄스를 창조적 예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최초의 인물이다(현대무용). 미국에서 처음 공연했을 때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자유분방한 공연 양식으로 영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곳에서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그녀는 집안 형편은 가난했지만 교양있는 음악교사인 어머니 아래 4형제 중 하나로 자랐다.

어린시절 고전 발레의 엄격함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율동과 움직임을 바탕으로 춤을 추었으며 뒤에 고전 음악가들, 특히 브람스·바그너·베토벤의 작품을 춤으로 해석할 때도 의식적으로 그러한 방식을 택했다. 시카고와 뉴욕 시에서 최초의 공연을 가졌으나 별로 성공하지 못했고, 21세 때 외국에서 인정받기 위해 미국을 떠나면서 돈이 모자라 가축 수송선을 타고 영국으로 갔다.

대영박물관에서 고대 그리스 조각상들을 연구하면서 그녀는 자기가 그때까지 본능적으로 추어왔던 춤사위와 자세들이 고전적인 것임을 확인하고, 고전적인 춤사위를 부활시켜 자신의 춤추는 방식으로 삼았다.

유명한 배우 패트릭 캠벨 여사의 후원으로 런던 지도층 부인들이 벌인 여러 모임에 초청받고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운 춤사위로 춤을 추어, 당시 쇠퇴기에 들어선 기존의 발레에만 익숙해 있던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의 극장과 발표회장은 숲의 요정처럼 옷이라곤 별로 걸치지 않은 채 맨발로 춤추는 이 젊은 여성을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1905년 그녀의 첫번째 러시아 방문은 논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계기로 덩컨의 춤은 그무렵 유럽에서 발레의 부활을 선도한 러시아 평론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녀는 독일·러시아·미국에 무용학교를 세웠으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은 없다.

그녀의 사생활 또한 세간의 금기들을 줄곧 거부한 탓에 그녀의 예술만큼이나 화제가 되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결혼을 혐오한 무대장치가 고든 크레이그와의 사이에 첫 아이 디어드리를 낳았으며, 둘째 아이 패트릭의 아버지는 재봉틀 회사 상속인이자 탁월한 예술후원자인 파리 싱거였다. 1913년 파리에서 덩컨의 두 아이와 유모를 태운 차가 센 강으로 추락해 모두 익사하는 비극이 일어났는데 결국 그녀는 그 충격으로부터 완전히 헤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슬픔을 달래려고 다른 학교를 설립하려 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실현하지 못했다.

이어 남아메리카·독일·프랑스에서 가진 순회공연의 성과는 이전보다 못했지만 1920년 모스크바에 자신의 학교를 세우도록 초빙되었다. 그녀처럼 혁명적 기질을 가진 사람에게 소련은 약속의 땅으로 보였다. 소련에서 그녀는 자기보다 17세 연하의 시인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을 만났다. 1922년 예세닌과 미국 순회공연을 함께 가기 위해 망설임 끝에 그와 결혼했다. 그녀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공포가 고조되어 있던 최악의 시기에 미국에 도착했고 그들 부부에게는 볼셰비키의 첩자라는 부당한 낙인이 찍혔다.

보스턴 심포니 홀에서 공연할 때 덩컨이 예세닌을 소개하자 많은 관객이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는 무대에서 관객을 향해 열변을 토했고 그날 공연은 소동으로 끝났다. 또다시 조국을 떠나면서 그녀는 기자들에게 "미국이여 안녕, 다시는 너를 찾지 않으리라!"고 말했는데 결국 그 말대로 되었다. 유럽으로 간 그녀와 예세닌은 불행한 시기를 보냈으며 예세닌은 정신적 불안정 때문에 덩컨에게서 등을 돌렸다.

혼자 소련으로 돌아간 예세닌은 1925년 자살했다. 그녀는 말년의 몇 해 동안 프랑스 리비에라 해안의 니스에서 초라하고 불안정한 생활을 하다가 타고 가던 차의 뒷바퀴에 스카프가 말려들어가 질식사 했다.

이사도라 덩컨은 당대의 일류 음악가·미술가·작가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그녀는 지식인들에게 영감을 주어 그들의 숭배대상이 되었지만, 때로는 편협한 사람들의 공격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녀의 착상은 시대를 너무 앞선 것이었고 사회의 인습을 완전히 무시하여 대중에게 단지 '자유연애'의 옹호자로만 여겨지기도 했으나, 오늘날 덩컨은 춤의 위대한 개혁자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녀는 인위적·기교적인 제한을 거부하고 자연스런 움직임의 우아함을 중시함으로써 그때까지 엄격한 형식과 현란하지만 공허한 기술적 묘기의 나열에 의존하던 춤을 해방시켰고, 이로써 나중에 마리 비그만과 마사 그레이엄 등이 발전시킨 현대무용이 수용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