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무용

현대무용

다른 표기 언어 modern dance

요약 19세기말 미국과 유럽에서 개발되기 시작하여 20세기에 명칭을 부여받고 널리 성공을 거둔 연극적 춤.

당시의 발레적이고 설명적인 춤 전통에 대한 저항으로서 발달했다.

유럽에서 현대무용의 선구자로는 음악교육의 일환으로 유리드믹스 체계를 주창한 에밀 자크 달크로즈와 인체동작을 분석하고 체계화한 루돌프 라반이 있다. 현대무용 선구자의 대부분은 미국 여성들이었다. 무용가로 변신한 미국의 배우 로이 풀러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자유 무용가로서 예술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녀는 극장 조명과 다양한 길이의 투명한 중국 비단을 사용하여 일반 관객뿐만 아니라 예술가들로부터도 환호를 받았다.

그녀는 다른 현대무용가들에 앞서 모든 형식적 기교에 저항하고 무용단을 설립했으며 영화를 만들었다. 풀러가 달성한 연극적 효과에서 춤의 역할은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러나 또다른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에게 춤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덩컨은 기본동작 하나하나를 웅대하고 표현적인 수준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대단한 연극적 표현력을 지닌 자신의 춤에 일정한 기준을 부여하면서 팔과 다리를 드러낸 하늘거리는 얇은 의상을 입고 공연했다. 단순한 동작이 지닌 힘을 드러내보임으로써 춤에 부여한 인상은 그녀가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공식적인 현대무용 교육은 루스 세인트 데니스와 테드 에 의해 더욱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세인트 데니스는 자기 작품 가운데 상당부분을 동양춤 양식을 토대로 구성했고 자기 무용단에 이국적 매력을 부여했다.

숀은 데니스의 무용단에 동참한 최초의 남성으로 데니스의 파트너로 활동하다가 곧 남편이 되었다. 데니스와 숀이 데니숀 무용학교를 세운 1915년에 비(非)발레적인 춤은 완전히 확립되었다. 데니숀 단원들 가운데 현대무용에 새로운 중대한 양식적 의의를 부여하고 진정한 의미의 현대무용을 한 2명의 여성이 나왔다. 도리스 험프리는 안무에서의 숙련과 구조를 강조하는 한편, 군무에서 군집 및 복합성을 활용하는 법을 발전시켰다. 마사 그레이엄은 정서의 참신한 요소들을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험프리의 기법은 쓰러짐과 회복의 원리를 바탕으로 했고, 그레이엄의 기법은 수축과 이완의 원리를 바탕으로 했다. 이와 동시에 독일에서 마리 비그만, 한야 홀름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그에 버금 가는 형식적·표현주의적 양식들을 확립하고 있었다. 덩컨의 춤에서처럼 몸통과 골반이 동작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바닥에 밀착된 수평적 동작은 발레에서 곧게 선 자세가 그렇듯이 현대무용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무용수가 뻣뻣하고 간혹 의도적으로 추하게 사지를 굽히고 발뒤꿈치를 들지 않음으로써 현대무용은 그때까지 발레가 피해온 내면의 정서를 전달했다.

더욱이 현대무용은 발레의 형식적이고 고전적이며 때로는 서술적인 측면과는 대조적으로 직접적인 현대의 관심사를 다루었다. 현대무용은 강력하고 직접적인 표현을 담아냈다. 그후 다시 머스 커닝엄은 마사 그레이엄의 표현주의에 대한 반항을 주도하여 안무에서 심리적·정서적 요소를 거부했다. 커닝엄의 기법은 현대무용 못지않게 발레도 도입하기 시작했고, 그의 안무 방법은 춤의 구성과 배열의 한 요소로서 우연성을 수용했다.

또한 1950년대에 알빈 니콜라이스는 춤을 조명·무대장치·음향효과 속에 가라앉히는 작품들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폴 테일러는 고전 악곡에 맞춘 여러 작품에서 대단한 정밀성과 연극적 표현력을 지닌, 전반적으로 발랄하고 율동적인 양식을 이룩했다. 커닝엄은 1960년대와 그 이후 포스트모던 춤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뉴욕에 기반을 둔 많은 새로운 무용수들과 안무가들은 능란한 기교를 버리고 극장이 아닌 공간에서 공연했으며 춤에 반복·즉흥·미니멀리즘, 노래나 말, 그리고 영화를 비롯한 복합 매체 효과들을 짜넣기 시작했다. 이런 맥락과는 별도로 트와일러 타프 같은 무용가들이 등장했는데, 그녀는 발레를 기초로 대중적 사교춤의 즉흥적 형식과도 관계 있는 자신의 춤 양식에 전통춤의 능란한 기교, 율동, 음악성, 연극적 서술법을 점차 다시 도입했다.

현대무용은 그것이 성립된 이래로 여러 차례 다시 정의되었다. 현대무용은 어떠한 전통적 정의에 따르더라도 발레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때때로 발레 동작도 포괄한다. 또한 현대무용은 수많은 춤 요소들(예를 들면 민속춤이나 민족춤·종교무용·사교춤)을 차용할 수도 있으며 동작의 단순한 한 측면만을 다룰 수도 있다.

새로운 세대의 안무가들이 등장하면서 현대무용의 개념과 실천이 변화함에 따라 현대무용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더욱 모호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1926년 일본인 이시이 바쿠[石井漠]가 조선총독부 후원으로 경성공회당에서 행한 공연에서 처음 신무용을 소개하면서 이전의 전통춤이나 민속춤과는 다른 춤을 선보였다.

당시 독일 표현주의 무용의 영향을 받은 그의 춤은 특히 최승희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고 한국 현대무용의 효시가 되는 신무용시대를 촉진했다. 이후 서구 현대무용의 기법을 한국전통무용 및 발레 기법과 절충하는 방안이 신무용의 맥락에서 시도되었다. 8·15해방 직후 함귀봉등에 의해 잠시 존속했던 조선무용예술협회 산하 조직으로 현대무용부가 있었던 사실은 현대적인 무용을 발레 및 전통무용과 구분하는 개념화작업이 싹트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현대무용이 독립된 장르로 인식되기는 1960년 이후의 일이다.

일본에서 발레와 현대무용을 배운 박외선이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현대무용을 가르쳤고 그 제자 육완순이 미국에서 현대무용을 배우고 귀국하여 1963년 오케시스 대학생 현대무용을 창단했다. 1964년 육완순이 〈흑인영가〉 등의 레퍼토리를 공연함으로써 한국에서 현대무용은 활발히 창작되기 시작했다. 이후 1970년대 후반부터 여러 현대무용단이 조직되었고 무용계의 춤 활성화와 더불어 현대무용도 확산되고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마사 그레이엄 스타일에 치우친 경향에서 벗어나는 현상도 진행되고 있다.

현대무용
현대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