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바

파블로바

다른 표기 언어 Anna (Pavlovna) Pavl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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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1. 2. 12(구력 1. 31),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 1931. 1. 23, 네덜란드 헤이그
국적 러시아

요약 러시아의 발레리나.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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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황실 발레단
  3. 국제적 명성

개요

당대에 가장 많은 찬사를 받았다.

1891년부터 마린스키 극장의 황실 발레 학교에서 공부했고, 1899년 황실 발레단에 입단하여 1906년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었다. 1909년 발레 뤼스의 순회공연을 따라 파리로 갔고 1913년 이후 자신의 무용단과 함께 독자적으로 순회공연을 했다.

초기생애와 황실 발레단

파블로바는 춤에 천부적인 재질을 갖춘 아이가 성장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와 장소에서 태어났다.

차르 치하의 러시아에는 공연예술을 위한 훌륭한 황실학교들이 있었다. 시험을 통해 입학이 결정되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가난했지만(아버지는 그녀가 2세 때 죽었음) 189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지금의 키로프 국립극장) 부속학교에 그녀가 훈련생으로 입학하는 것을 허용했다. 발레 전통을 따라 그녀는 당대 위대한 무용가들이었던 교사들로부터 춤을 익혔다.

1899년 학교를 졸업하고 황실 발레단에 입단했으며, 꾸준히 성장하여 1906년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었다. 그무렵 이미 〈지젤 Giselle〉에 출연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1907년부터 그녀의 진로는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그해 몇몇 무용수들과 함께 리가·스톡홀름·코펜하겐·베를린·프라하로 순회공연을 하면서 그녀는 갈채를 받았고, 1908년 또다른 순회공연을 가졌다. 1909년 예술 기획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파리에서 역사적인 러시아 발레 시즌을 열었을 때 그녀는 발레 뤼스와 함께 잠시 파리와 런던에서 공연했다.

그러나 소규모 발레 그룹과 함께 가졌던 순회공연을 통해 독자적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그녀는 디아길레프가 이끌던 꽉 짜인 발레 뤼스의 단원이 되지 않았다. 그녀의 운명은 발레 뤼스 단원들처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고전 발레의 아름다움을 전세계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마린스키 극장을 떠나 있는 동안 1910년 미하일 모르드킨과 함께 뉴욕 시와 런던에서 활동했다.

국제적 명성

황실 발레단을 떠나자(1913) 그녀의 영역은 더 넓어졌다.

그후 로랑 노비코프와 피에르 블라디미로프를 비롯한 여러 파트너 및 무용단과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발레를 소개하면서 자신의 예술을 전파하는 순회공연을 계속했다. 그녀의 공연은 관객들에게 절제된 우아함, 시적인 움직임, 마법을 본 듯한 기억을 오래도록 남겼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발레의 진정한 매력이 갖는 강력하고 신비로운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1914년에 시작된 독자적인 순회공연을 계속하면서 세계의 구석구석을 다녔다. 남편 빅토르 당드레가 이 공연들을 꾸렸다.

안나 파블로바 무용단의 레퍼토리는 대부분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은 〈돈 키호테 Don Quixote〉·〈고집장이 딸 La Fille mal gardée〉·〈요정 인형 The Fairy Doll〉·〈지젤〉을 비롯한 마린스키 극장의 성공작들을 발췌하거나 각색한 작품들을 공연했고, 그 작품들에 대한 그녀의 해석은 뛰어났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것은 흉내낼 수 없는 그녀만의 매력이 실린 일련의 짧은 독무들이었다. 〈잠자리 The Dragonfly〉·〈양귀비 Californian Poppy〉·〈가보트 Gavotte〉·〈크리스마스 Christmas〉 등은 그녀의 유일한 안무작 〈고엽(枯葉) Autumn Leaves〉(1918)과 더불어 관객의 마음에 오래 기억되는 작품들이다.

여러 민족의 민족춤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프로그램에 반영되었다(민속춤). 그녀는 폴란드·러시아·멕시코의 춤들을 공연했다.

인도와 일본 방문을 계기로 그곳의 춤을 진지하게 연구하기도 했다. 이런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후일 인도 춤의 가장 탁월한 공연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된 우다이 샹카르와 함께 인도의 정취를 다룬 〈동방의 인상 Oiental Impressions〉을 제작해 인도에서 춤이 부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속한 무용단의 존재 이유였고 대중적 호소력의 원천이었으며, 재정적 안정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때문에 극도의 부담을 안고 있었던 그녀는 말년에 테크닉이 뒷걸음질치고 점점 더 자신의 독특한 개성에 의존하게 되었다.

1911년 모르드킨과 싸웠을 때처럼 간혹 직업상의 문제가 부각된 경우를 제외하면 사생활은 평범했다. 그녀는 한때 결혼을 비밀로 했고 자식이 없었다. 그녀의 모성애는 자신의 무용단과 1920년 파리에 세운 러시아 피난민 고아원에 바쳐졌다. 그녀는 새와 짐승을 사랑했다.

런던의 햄스테드에 있던 그녀의 집 아이비 하우스는 백조가 사는 장식용 호수로 유명했는데, 1905년 미하일 포킨이 그녀를 위해 창작해 그녀의 가장 유명한 독무가 된 〈빈사의 백조 The Dying Swan〉를 상기하며 그녀는 이 호숫가에서 사진을 찍고 영화도 만들었다. 이때 찍은 영화 장면들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그녀의 영화 가운데 하나로, 1924년 어느 오후 할리우드에서 영화배우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경이 촬영한 그녀의 독무에서 뽑은 장면들과 함께 편집된 〈불멸의 백조 The Immortal Swan〉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