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란신

유럽 시절

조지아 공화국 출신인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마린스키 극장의 황실 발레 학교에서 공부한 무용가 세대에 속한다.

1917년 이 극장은 몇 개월간 문을 닫았으며, 1918년 황실 발레 학교가 소련 국립 발레 학교로 다시 문을 열 때까지 그는 막일을 하거나 영화관에서 피아노를 연주해 생계를 유지했다(키로프 발레단). 그후 3년간 더 무용을 배운 뒤 졸업했다. 작곡가를 아버지로 둔 그는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하기도 했다(1921~24). 학창시절에 이미 안무를 시도했는데, 그가 1920년에 만든 첫 작품은 안톤 루빈슈타인의 곡 〈밤 Nuit〉에 맞춘 소품이었다.

또한 국립 발레 학교 친구들과 함께 실험적 발레 발표회를 마련하고 여러 작품을 안무했으나 학교 책임자들은 이러한 활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페트로그라드의 미하일로프스키 극장을 위해 새로운 실험 발레를 몇 편 만들었는데, 그중에는 장 콕토와 다리우스 미요의 〈지붕 위의 황소 Le Boeuf sur le toit〉(1920)와 조지 버나드 쇼의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Caesar and Cleopatra〉의 한 장면 등이 있다. 그는 순회공연을 목적으로 소련을 떠난 최초의 발레 무용수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 다닐로바, 타마라 게베르게바(후에 게바), 니콜라스 에피모프를 포함한 소규모 소련 무용단과 독일·런던·파리를 여행하던 중, 느닷없이 1925년 6월 파리에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에 입단했다(이당시 디아길레프가 그의 이름을 발란시바제에서 발란신으로 바꾸었음).

디아길레프는 그를 안무자로 발탁했다.

당시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가 디아길레프를 떠난 직후였으므로 그가 니진스카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던 것이다. 1925년 발레 뤼스는 발란신의 〈바라보 Barabau〉를 공연했다. 이 작품은 발란신이 디아길레프의 발레단을 위해 만든 10개의 작품 가운데 첫 작품이었다. 디아길레프를 위해 안무한 발레들 가운데 두 작품이 유명해져서 세계적인 레퍼토리가 되었는데, 발란신의 독특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첫 작품인 〈아폴로 Apollo〉(1928)·〈탕아 Le Fils prodigue〉(1929)가 그것이다.

1929년 디아길레프가 죽자 덴마크 왕립 발레단, 그리고 발레 뤼스 드 몬테 카를로와 일했으며, 〈다툼 La Concurrence〉(1932)·〈코티용 Cotillon〉(1932) 같은 작품을 만들어 더욱 명성을 쌓았다. 1933년 전위파 발레단인 '레 발레 1933'의 창단에 관여했다.

이 발레단의 활동에 크게 감동한 미국의 춤애호가 링컨 커스틴은 발란신을 초청해 아메리칸 발레 학교와 아메리칸 발레단을 세우게 하고 자기는 공동 설립자 겸 감독을 맡았다. 이리하여 발레계에서 '미스터 B'로 불리는 발란신과 미국 발레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미국 시절

아메리칸 발레단은 뉴욕 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상주 발레단이 되었고, 여기서 발란신은 〈요정의 입맞춤 Le Baiser de la fée〉(1937)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할리우드 영화처럼 전혀 다른 분야에서도 안무 개척가로서 창의력을 발휘했는데, 그가 안무한 작품 가운데는 뮤지컬 〈방탕한 생활 On Your Toes〉(1936)에 나오는 유명한 〈10번가의 살육 Slaughter on Tenth Avenue〉이 있다(음악영화). 1938년 아메리칸 발레단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과의 불편한 관계를 청산했다. 커스틴은 1936년 캐러밴 발레단을 창단하여 미국 안무가들의 작품을 공연했다.

1941년 이 발레단과 아메리칸 발레단의 잔류 조직이 연합하여 남아메리카 순회공연을 했는데 발란신은 이 공연을 위해 〈바로크 협주곡 Concerto barocco〉과 〈발레 임피리얼 Ballet Imperial〉을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는 미국에서 오리지널 발레 뤼스와 발레 뤼스 드 몬테 카를로를 위해 일했고 할리우드나 브로드웨이에서 일하기도 했다.

한편 커스틴은 발란신의 예술적 지도하에 미국 발레를 확립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46년 발레 소사이어티를 창립했고 이것이 1948년 뉴욕 시립 발레단으로 발전했다. 처음에는 뉴욕 시 센터에 자리잡았다가 뒤에 링컨 센터의 뉴욕 주립극장으로 옮긴 이 발레단은 특히 발란신과 거의 동일시되었다. 다양한 양식에 걸쳐 풍성한 창의력을 지닌 그는 뉴욕 시립 발레단을 위해 150편 이상의 작품을 창작해 이 발레단이 풍부한 레퍼토리를 갖는 데 기여했다. 그 가운데는 전작 〈호두까기 인형〉·〈돈 키호테〉가 있다.

1964년 포드 재단이 미국 발레를 진흥시키기 위해 거의 800만 달러의 돈을 뉴욕 시립 발레단과 그 부설학교인 아메리칸 발레 학교,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발란신의 지도를 받고 있던 6개의 발레단에 기부하자 미국 무용계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발란신은 건강이 악화되어 직책을 수행할 수 없게 된 1982년말까지 뉴욕 시립 발레단의 예술감독 겸 발레 교사로 일했다. 그는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지만 국제적인 안무가였으며, 전세계의 뛰어난 발레단은 거의 모두 그의 작품을 적어도 1편 이상 공연했다. 해외에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 브람스의 〈사랑의 노래 왈츠 Liebeslieder Walzer〉(1960) 같은 진지한 음악이나 허시 케이의 〈서부 교향곡 Western Symphony〉(1954) 같은 희극적 음악, 로버트 슈만의 〈다윗 도당의 춤 Davidsbündlertänze〉(1980) 같은 매우 낭만적인 음악을 춤으로 해석한 것 등이 있다.

발란신은 작곡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특별한 예술적 교분을 가졌다. 스트라빈스키는 디아길레프를 만나면서 발레와 관련을 맺기 시작했는데 발란신이 그의 음악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25년 발레 뤼스를 위해 〈나이팅게일의 노래 Le Chant du rossignol〉를 새로 안무하면서였다.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하고 발란신이 안무한 발레는 그후로도 많이 발표되었는데 두 사람이 함께 작곡한 작품도 있었다.

스트라빈스키가 죽은 이듬해인 1972년 뉴욕 시립 발레단은 스트라빈스키 축제를 열었다. 10년 뒤인 1982년에는 2번째 스트라빈스키 축제가 스트라빈스키 탄생 100주년 기념제 기간에 열렸다. 발란신은 여기서 공연된 14편의 스트라빈스키 작품 가운데 4편을 안무했다. 안무한 다른 현대 작곡가의 작품으로는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작품 번호 34 Opus 34〉와 찰스 아이브스의 〈아이브시아나 Ivesiana〉가 있다.

그는 안무의 예비단계로 악보를 면밀히 연구했고, 첫 리허설 때부터 비로소 춤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무용수들과 함께 작업할 때 영감이 떠오른다고 말했지만 무용수들과 의견을 나눈 적은 없었다. 그는 냉정하고 신속하게 창작했다. 이러한 면모가, 따뜻한 정서보다는 냉철한 지성을 느끼게 하는 그의 작품들과 더불어 사람들에게 그를 어딘가 생소하고 초인간적인 인물로 인식되게 했다. 한편 그는 연극과 영화의 모든 음악물을 즐기는 전혀 다른 면모를 지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