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발레

다른 표기 언어 ballet

요약 르네상스 시대의 궁정연예극과 프랑스 궁정 발레에서 발전했다. 륄리와 피에르 보샹에 의해 공연 형태를 갖추었는데 18세기에 기교가 크게 향상되면서 발레를 극 전개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관심으로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기도 하였다.
20세기에는 러시아 발레가 서구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파블로바, 디아길레프 등이 영향력이 커졌다. 전작 발레는 단막 형식에 밀려났고 줄거리를 갖지 않은 현대세계를 소재로 삼을 수 있게 되었으며 친숙하지 않은 리듬·하모니, 일상적 소음으로 이루어진 곡을 토대로 안무할 수도 있게 되었다.
오늘날 발레는 일반 대중의 예술적 오락물이 되었지만. 귀족적이었던 예전의 매끈한 움직임과 정연한 우아미가 여전히 남아 있어 다른 형태의 춤과 구별된다.

목차

접기
  1. 발레 자세
  2. 한국의 발레
발레(ballet)
발레(ballet)

순수한 기교 자체를 말하기도 한다.

발레는 르네상스 시대의 궁정연예극과 그뒤를 잇는 프랑스 궁정 발레에서 발전했다.

당시 왕족과 귀족들의 사교춤은 음악·대사·시가·노래·야외극·장식·의상과 더불어 펼쳐졌다. 17세기 잠시 쇠퇴하기도 했으나 춤에 심취해 자신이 직접 추기도 한 프랑스 왕 루이 14세(1638~1715)는 '완벽한 춤을 재건'하기 위해 1661년 왕립 춤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같은 해에 몰리에르의 대본과 장 바티스트 륄리의 음악을 사용한 최초의 코미디 발레가 공연되었는데 이 작품에서 춤은 연극의 장에 따라 각각 나누어졌다.

오래지 않아 이는 륄리의 오페라 발레로 이어졌으며 오페라 발레를 공연할 직업무용수를 훈련시키기 위한 학교가 설립되어 왕립 음악 아카데미(또는 왕립 오페라 아카데미)에 소속되었다. 새로 등장한 직업무용수들은 귀족들의 행동거지를 그대로 모방해 춤추도록 훈련받았다. 륄리와 발레 감독 피에르 보샹(1631~1719)의 지도로 발레는 공연 형태를 갖추었다.

18세기에 들어와 발레 기교는 크게 향상되었고 극(劇)을 전개하는 수단으로 발레를 활용하려는 새로운 관심이 일어났는데, 그 중심인물은 장 조르주 노베르(1727~1810)였다.

그의 〈춤과 발레에 관한 서한집 Lettres sur la danse et les ballets〉(1760)은 유럽 전역에서 발레닥시옹 혹은 발레극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연기 발레 또는 발레극에서 무용수의 움직임은 등장인물의 성격을 묘사하고 줄거리 전개를 보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작곡가 크리스토프 글루크는 오페라와 발레에 종사하면서 춤 반주음악에 신선한 활기와 극적 효과를 부여했다. 이 시기에는 3가지 발레 양식이 있어서 무용수는 체격조건에 따라 고상하거나 점잖은 기법, 서민적 기법, 코믹하거나 그로테스크한 기법을 훈련받았다. 이렇게 층이 나누어진 발레는 오페라처럼 웅장한 공연양식이 되어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또 많은 오페라에는 발레 디베르티스망(간주곡으로 사용된 발레 모음곡)이 포함되었다.

당시의 발레는 여전히 귀족적 태도를 반영했으나, 18세기말과 19세기초 산업·사회·정치·예술에 일어난 혁명은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발레 교육의 중심지였던 프랑스에서 앙시앵 레짐과 그 사교춤은 더이상 무용수가 따라야 할 본보기가 아니었다. 19세기초의 무대 춤은 특히 마리에 탈리오니(1804~84)와 파니 엘슬러(1810~84)의 춤으로 대표되는 낭만파 발레를 새로운 예술적 목표로 삼게 되었다. 푸앵트(한쪽 발 끝으로 서서 균형을 잡는 자세)가 춤의 기법에 도입됨으로써 발레리나는 지고의 이상적인 무대인물이 되었다.

이때부터 직업 문인이나 대본가에 의해 발레 대본이 구상되기 시작해 19세기에 들어와 일반화되었다. 카를로 블라시스(1803~78) 같은 교사들에 의해 발레 기법이 정리되면서 발레는 오늘날과 같은 특징을 지닌 기본형식을 갖추게 되었고 근본적으로 사교춤과는 구분되었다. 그러나 1830~50년 낭만파 발레에 대한 열정이 널리 확산된 뒤로는 국제적 교류가 거의 없어지면서 발레는 특정 국가에 국한되었으며, 러시아와 덴마크를 제외한 곳에서는 예술적 수준이 떨어졌다.

아우구스트 부르농빌(1805~79), 쥘 페로(1810~92), 마리우스 프티파(1818~1910) 같은 발레 감독들은 발레를 새롭게 안무해 선보였다. 특히 프티파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 The Sleeping Beauty〉, 조수 레프 이바노프(1834~1901)와 함께 만든 〈백조의 호수 Swan Lake〉 등 지금도 계속 공연되는 고전적 레퍼토리를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토대로 안무해 19세기 후반의 수십 년 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정통 발레의 수준을 정상에 올려놓았다.

20세기에 들어와 러시아 발레는 서구세계로 퍼져나가 대단한 찬사를 받고 큰 영향을 끼쳤다.

최고의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1881~1931)는 20년간 전세계를 순회했고, 세르게이 디아길레프(1872~1929)가 이끄는 발레 뤼스는 그가 죽기 전까지 20년 동안 유럽에서 공연하면서 안무가·무대장치가·작곡가 사이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낳았다. 예술가들과 관객들에게 디아길레프가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 그가 관계한 5명의 주요안무가들, 즉 미첼 포킨(1880~1942), 바슬라프 니진스키(1888~1950), 레오니드 마신(1895~1979),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1891~1972), 조지 G. 발란신(1904~83)은 발레 예술을 소생시키고 새롭게 정의하려는 그의 작업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전작 발레는 단막 형식에 밀려났고 발레는 줄거리를 갖지 않아도 되었으며 현대세계를 소재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춤을 염두에 두고 만들지 않은 음악이나 친숙하지 않은 리듬·하모니, 일상적 소음으로 이루어진 곡을 토대로 안무할 수도 있게 되었다.

디아길레프가 죽고 그의 발레단을 본뜬 여러 발레 뤼스(Ballets Russes)가 등장하면서 서구에서 발레를 확립하려는 새로운 시도들이 시작되었으며 발레에 민족성을 부여하고 체계적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새로운 학교들과 무용단들이 설립되었고 1931년 창설되어 니네트 드 발루아(1898 태어남)가 감독을 맡고 프레더릭 애시턴 경(1904 태어남)이 상임 안무가를 맡았던 영국의 빅웰스 발레단(나중에 새들러스 웰스 발레단이 되었다가 다시 로열 발레단으로 바뀜)은 짧은 시일 내에 국가적으로 중요한 발레단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아메리칸 발레 학교(1934 설립)와 그 부속 뉴욕 시립 발레단(1948 창단)이 링컨 커스타인(1907 태어남)과 안무가 발란신의 지도하에 급속도로 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덴마크 왕립 발레단과 특히 레닌그라드의 키로프 발레단, 모스크바의 볼쇼이 발레단은 해외순회공연을 통해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오늘날에는 많은 나라에 발레단과 발레 학교가 생겨났으며 발레는 일반 대중의 예술적 오락물이 되었다. 발레는 모든 양식의 춤을 당스 데콜과 접목시키고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디아길레프 시대에 비해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그러나 귀족적이었던 예전의 매끈한 움직임과 정연한 우아미가 여전히 남아 있어 다른 형태의 춤과 구별된다.

발레 자세

모든 고전 발레의 기본이 되는 5가지 발 자세로, 1588년 투아노 아르보가 맨 처음 사용했고 1680년경 피에르 보샹이 정리했다.

1725년 피에르 라모가 〈춤 교본 Le Maître á danser〉에 기록해놓은 발레 자세는 복잡한 발레 동작의 시작이자 끝이다.

발레의 모든 기본자세는 양 다리를 옆으로 돌려 발가락 끝이 각각 양 옆을 향해 양쪽 발이 일직선을 이루거나 평행선을 이룬다. 체중은 양쪽 발에 고루 실리며, 양쪽 발바닥 전체로 바닥을 디디거나 양쪽 엄지발가락 밑면을 바닥에 대거나(드미 프웽트) 발가락 끝만을 바닥에 대고 서기도(프웽트:여성만 행함) 한다.

발의 각 자세에는 상응하는 팔과 손의 자세가 있어 전체적으로 완벽하게 균형잡힌 자세를 이룬다.

제1번 자세에서는 발뒤꿈치를 맞대고 발가락을 바깥으로 향해 양쪽 발이 일직선을 이루도록 한다. 제2번 자세에서는 양쪽 발을 30㎝가량 뗀 채 두 발끝을 바깥으로 향해 일직선이 되게 하며 체중은 양쪽 발에 균등하게 배분한다.

제2번 자세의 공중자세는 체중을 한쪽 발에 싣고 다른 쪽 발을 옆으로 들어올리는 것이다. 제3번 자세에서는 두 발을 바깥으로 향한 채 한쪽 발뒤꿈치를 다른 쪽 발의 발목에 대고 서서 체중을 양쪽 발에 나누어 싣는다. 이 자세는 미뉴에트와 가보트 같은 18세기 사교춤에서 널리 쓰였는데 발레 공연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제4번 자세에서는 한쪽 발을 다른 쪽 발의 30cm 정도 앞에 놓는데 양쪽 발 모두 바깥을 향하고 체중은 두 발에 나누어 싣는다.

제2번 자세처럼 제4번 자세에도 공중자세가 있다. 제5번 자세에서는 양쪽 발을 바깥으로 돌린 채 맞붙여 한쪽 발의 뒤꿈치를 다른 쪽 발가락에 붙인다.

발의 5가지 기본자세 외에도 고전 발레에는 2가지의 주요 몸 자세가 있다. 아라베스크는 체중을 한쪽 다리에 싣고 다른 쪽 다리를 쭉 편 채 뒤로 뻗는 자세이다. 가장 우아한 발레 자세 가운데 하나인 아라베스크는 팔의 자세, 몸의 각도, 들고 있는 다리의 높이의 차이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발 전체나 엄지발가락 밑부분 또는 발가락 앞부리(여성만 행함)로 바닥을 디디며 디디고 있는 다리는 펴거나 굽힌다. 아티튜드는 아라베스크와 비슷하지만 들어올린 다리의 무릎을 굽히는 점이 다르다. 다리를 앞 또는 뒤로 들어 몸통과 직각이 되게 하며 무릎을 굽히거나 거의 편 상태를 취한다. 바닥에 디딘 다리도 굽히거나 펼 수 있다. 아라베스크에서와 마찬가지로 발바닥 전체나 엄지발가락 밑부분, 발가락 끝을 바닥에 대고 선다.

1829년 카를로 블라시스는 지암볼로냐가 만든 머큐리 조각상에서 착상을 얻어 처음으로 이 자세를 표현했다.

발레 안무는 이러한 기본 자세를 여러 가지로 조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플리에와 바트망 같은 몇 가지 자세를 무용수가 무게중심을 취해 가볍게 균형을 잡고 골반에서부터 다리를 쭉 뻗어 정확한 자세를 취할 수 있게 하는 한편 몸 전체의 힘과 유연성을 증대시키기 위해 고안된 훈련동작이다.

다른 동작으로는 도약(파 델레바시옹)과 같은 발 동작이 있는데, 앙트르샤(제5번 자세에서 뛰어올라 양발을 빠르게 교차시킨 후 다시 5번 자세로 착지하기)나 주테(한쪽 발로 뛰어올라 다른 쪽 발로 착지하기)가 이에 해당한다. 이밖에 피루에트(한쪽 발을 축으로 회전하기), 투르 앙 레르(뛰어올라 공중에서 1~3회 회전하기)와 같은 회전동작(투르)이 있다.

한국의 발레

한국에 발레라는 형식의 춤이 처음 소개된 것은 1924년 벨라루스인인 헬렌이라는 소녀와 그 일행이 '백로(白露) 피난민자선회' 기금모금운동으로 무도회를 가진 것과, 종로 우미관에서 막간을 이용해 토슈즈를 신고 추는 춤을 선보인 것이다.

한국인이 '발레'라는 타이틀을 붙여 공연한 것은 1925년 배구자의 무용발표회에서였다.

배정자의 조카로서 '레뷰걸'로 유명해졌으며, 기록에 따르면 한국 최초의 개인발표회인 이 공연에서 미하일 포킨이 안무한 안나 파블로바의 대표작 〈사(死)의 백조〉라는 작품을 소개했다.

그 당시는 민속무용을 집대성한 한성준이 꾸준히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내한공연에 영향을 받은 한국의 무용지망생들이 일본 유학을 꿈꾸던 때였다. 당대를 대표하는 최승희와 조택원은 발레 형식을 도입하거나 가미하지는 않았다.

후에 현대무용가로 불린 이외선이 1937년 일본에서 안나 파블로바에게 사사한 뒤 귀국해 첫 발표회를 가졌고, 1940년 이후 진수방 등 신인들이 등장했으나 최승희와 조택원의 인기에 밀려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946년 결성된 조선무용예술협회의 회원으로는 정지수·조익환·한동인·진수방 등이 있었으나 이들이 이룬 뚜렷한 업적은 없다.

이들 중 6·25 전쟁 때까지 활동한 한동인의 서울 발레단은 1946년 창단공연으로 〈레실피드〉를 무대에 올린 뒤 〈민족의 파〉(1947)·〈호도까기 인형〉(1948)·〈꿩〉·〈장미의 정〉 등을 공연했고, 〈인어공주〉는 상연되던 날 6·25전쟁을 맞아 무산되었다. 그후 한동인은 6·25전쟁중에 월북했다고 한다. 전쟁중에 피난지 대구로 옮긴 국립극장에서는 이인범 발레단이 제2회 공연으로 〈레실피드〉·〈인어의 전설〉을 공연했다.

1956년 송범의 코리아 발레단 공연이 발레의 면모를 보여주긴 했으나, 6·25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발레가 공연되기 시작한 것은 1954년 일본에서 돌아온 임성남이 발레단을 만들어 1956년 명동시립극장에서 제1회 발표회를 가지면서부터이다.

1957년 조광 발레단의 결성공연이 있었고, 1958년 해방 후 최초로 내한한 대규모의 외국 발레단인 프랑스 자닌사라 발레단이 내한했다.

같은 해 임성남·송범이 아카데미 발레단을 결성하여 〈환상적인 원무곡〉을 무대에 올렸다.

임성남은 1962~93년에 한국 발레를 이끈 사람으로, 〈백조의 호수〉·〈지젤〉 등 고전 발레뿐 아니라 〈지귀의 꿈〉(1982)·〈처용〉(1982)·〈배비장전〉(1984)·〈춘향전〉(1986) 등 한국의 민속을 소재로 한 창작 고전 발레들을 남겼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국립 발레단이 인재양성에 힘쓰지 않았던 점에는 비판의 소리가 제기되기도 했다.

1984년 유니버설 발레단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발레 인재 양성은 발레단에서보다 각 대학의 무용학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홍정희는 한국 최초의 석사무용가로서 1958년 〈사슴호에 전해지는 이야기〉로 데뷔했으며, 홍정희 발레단의 15회 공연과 그의 제자들을 주측으로 1980년 '발레블랑'을 창단했다. 그는 발레의 학술적 연구모임을 강화하고, 발레 소극장 운동, 신인 안무가 발굴 등 발레의 지평을 넓히는 춤예술운동을 펼쳤다. 1984년에는 한국 발레 연구회를 발족시켜 공연 및 학술활동, 해외연수 등을 추진했다.

최초의 민간 발레단으로 창단된 유니버설 발레단은 에드리안 델라스라는 선화예고 교사가 배출해낸 무용수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초대 예술감독을 맡은 에드리안 델라스는 문훈숙·최민화·김인희·강수진 등을 키워낸 인물이다. 유니버설 발레단은 국립 발레단과는 달리 국제적인 안목을 가지고 출발했다. 1984년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패트릭 비셀을 비롯해 페르난도 부호네 등 유명무용수를 초청해 공연을 했고, 러시아 키로프 발레단의 올레그 비노그라도프 등을 초청해 합작공연을 했다.

특히 직업무용단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타이완·중국 공연을 가졌으며, 매년 해외 순회공연을 정기적으로 갖고 있다. 유니버설 발레단은 〈심청〉(에드리엘 델라스 안무, 1986)을 비롯한 창작발레를 무대에 올렸고 고전주의 작품 일색이던 국내에서 네오크리티시즘 계열의 작품을 공연해 레퍼토리를 다양화했으며, 〈돈 키호테〉 등 고난도를 요구하는 작품들을 국내 무대에 처음 소개했다. 주역 무용수 문훈숙은 1989년 러시아 키로프 발레단에 프리마 발레리나로 초청되어 〈지젤〉에서 안드리스 리에파와 공연했다. 그뒤 그는 매년 러시아에서 초청공연을 가졌으며, 러시아 키로프 발레단의 무용수들과 국내에서의 협연을 통해 공연의 질을 높여주고 있다.

광주시립무용단은 지방단체로는 유일한 직업무용단이다.

〈백조의 호수〉·〈돈 키호테〉 등 대표적인 고전 레퍼토리를 재연하고, 〈우수영의 원무〉(1992) 등 광주지역의 소재를 개발해 발레화하고 있다. 그밖에 한국 발레 협회가 1980년 창립되어 조승미(2001. 9. 28 사망)·서정자·서차영·박인자 등의 무용가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