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

교통

다른 표기 언어 transportation , 交通

요약 사람이나 짐을 한 장소에서 다른 지점으로 옮기는 일.

오래 전부터 지표상의 인간과 물자를 이동시킴에 있어서 그 용이함과 신속함의 정도는 주변 환경조건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인간은 직·간접적으로 자연을 통제함으로써 차츰 지구상의 자원을 탐사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21세기를 바라보면서 인간이 대기권을 벗어나 다른 행성을 여행할 수 있도록 한 로켓엔진의 발명은 과거 바퀴, 항해, 증기기관, 내연기관, 전기모터, 항공의 기술적 비약 등으로 이어진 교통역사에 주요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 이동운동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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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이전의 교통

고대의 육상교통

오랜 옛날에는 식량이 부족하고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빨리 움직이고 짐을 쉽게 나를 수 있는 기술을 고안해내고자 했다.

처음에는 가지가 벌어진 나무를 잘라 단순히 그 위에 물건을 얹어 운반하는 방식을 이용했으나, 이것이 차츰 변형되어 나무막대를 V자 또는 Y자 형태로 묶은 썰매가 만들어지고, 보다 이후에는 동물의 힘을 빌어 썰매를 끌게 하는 데까지 발전되었다. 썰매는 설원, 습지, 초원 등 어디나 잘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에 BC 5000년경부터는 유럽, 지중해 연안, 북아메리카, 아시아 등 각지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짐을 나르는 데 이용된 최초의 동물은 나귀였다(→ 길들이기). 동부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나귀가 수송수단으로 처음 이용된 시기는 적어도 BC 3000년 이전이었다고 추정된다(→ 운송용 가축). 지역에 따라서는 소·사슴·코끼리·야크·물소 등도 사용되었고, 낙타는 주로 건조지역에서 많이 이용되었다.이 역축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다른 짐승들에 비해 늦어, BC 1675년경에야 이집트에서 역축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처음 발견되었다.

바퀴의 발명은 교통수단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차량). BC 3500년경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는 농산물을 도시에 공급해야 할 필요가 생긴 동시에 야금술의 발달로 도구가 발명되었고, 교통부문에서도 바퀴를 사용하게 됨에 따라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초기에 사용된 바퀴는 바퀴살이 없는 통바퀴의 형태였으나, 인더스강 유역을 거쳐 BC 2500년경에는 중앙아시아로, BC 1500년경 중국으로, BC 1300년경에는 스웨덴 등지로 점차 확산되어 나갔다.

BC 2000년경에는 말을 가축으로 기르기 시작하고 바퀴살이 발명되는 2가지 중대한 발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2륜마차와 전차가 등장했다. 교통수단이 발달함에 따라 도로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그 형태도 다양하게 발달되었다.

신석기시대말부터 청동기시대초까지 지중해의 몰타 섬에서는 길에 홈을 파 그 위로 수레를 굴렸는데, 이를 훗날 등장한 열차궤도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

로마시대에는 BC 315년부터 통치와 군사의 목적으로 길을 닦기 시작해, AD 200년 무렵에 이르자 남북 방향으로는 영국 북부에서 사하라까지, 동서 방향으로는 모로코에서 유프라테스에 이르기까지 전 식민지에 걸친 도로망이 완성되었다(→ 로마 도로망). 중국에서는 BC1122~1221년의 주(周)나라 시대 이전에 이미 도로를 5등급으로 구분하고 수레바퀴의 규격, 난폭운전, 교차로에서의 통행 방법 등에 관해 통제하였다.

중세와 근대 육상교통

AD 10세기경에는 차대받침을 만들어 승차감을 높인 탈것이 등장했으며, 14~15세기에는 기존의 2륜마차를 4륜으로 바퀴수를 늘려 안정성을 더하였다.

15세기초 유럽에서는 헝가리에서 개발된 마차 코치가 가장 뛰어난 교통수단으로 손꼽혔는데, 오늘날 영어로 4륜마차를 뜻하는 '코치'(coach)라는 단어도 헝가리의 도시 코츠(Kocs)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코치는 대체로 말 1필이 끄는 8인승 마차로서, 앞바퀴가 뒷바퀴보다 작고 차대받침이 갖추어져 있었으며, 덮개가 달린 승객용 좌석은 마부석과 분리되어 있었다. 유럽대륙에서 코치는 장거리 여행의 대표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중세까지 도로의 건설이나 보수는 해당 지역 주민과 지주의 책임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매우 부실한 상태였다.

그러나 16세기 무렵부터는 베르기에르 등에 의해 도로건설 및 포장기술이 발달되었으며, 민족국가가 성립되면서 등장한 강력한 중앙정부에 의해 토목기술자가 양성되고 도로건설 기준이 마련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도로개설이 활발해진 또 하나의 요인은 산업혁명으로 생산이 급증함에 따라 교통수요가 크게 늘어난 데 있었다. 급증하는 교통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초기에는 운하건설이 활발하게 행해졌으나, 운하는 지리적 특성에 따라 입지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고 또 그 규모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건설이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부터는 4륜마차가 보다 가볍고 작아지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기존의 마차는 6~8인승 또는 화물수송용으로 그 규모가 큰 편이었으나, 이때부터 경량화되어 2인승 마차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1800년대초에는 타원형 철제 스프링이 발명되어 보다 가벼운 마차를 만들 수 있게 되었으며, 차체에는 덮개를 씌우고 창문을 달았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개척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튼튼한 마차를 필요로 하게 되어, 여러 필의 말이 끄는 짐수레형 마차 '왜건'(wagon)이 개발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664년부터, 영국에서는 1743년부터 역마차가 등장했으며, 도심의 교통수단으로는 옴니버스 및 2인승 소형마차가 선보이기도 했다. 2인승 소형마차는 정해진 요금을 내고 승객이 원하는 곳까지 갈 수 있었는데, 당시 이 마차에붙여졌던 '캡'(cab)이라는 이름이 지금도 택시를 뜻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고대의 수상교통

옛날 사람들은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 물에 뜨는 도구를 만들었다(→ 보트). 나무가 많지 않은 이집트와 페루에서는 짚·갈대·파피루스 등으로 뗏배를 만들어 썼으며, 지중해 연안에서는 짐승의 통가죽에 바람을 불어넣어 띄웠다.

나무가 자라는 지방에서는 뗏목을 만들어 강을 따라 내려가는 데 이용했으며, 신석기시대부터는 도구가 더욱 개선됨에 따라 나무의 속을 파낸 통나무배가 만들어지고 더 나아가 양옆으로 나무판자를 높이 대서 배의 용적을 늘린 형태도 등장했다.

BC 2000년경에는 배의 소재로 통나무 용골(龍骨)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아직 를 이용해서 배를 움직였기 때문에 노젓기에 적합하도록 배의 폭을 매우 좁게 만들었다(→ 로우보트). 또 이당시는 항해에 필요한 기구들이 미처 발명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항해범위는 강이나 근해로 국한되었다.

고대 지중해 해역에서는 갤리(galley)선이 주로 사용되었다.

갤리선은 선체의 폭이 좁고 선측에 수십개의 노가 열을 지어 설치된 배로서, 상선보다는 전함으로 더 많이 쓰였다. 이 배는 선체가 좁아 화물을 실을 공간이 넉넉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노젓는 사람이 많이 타야 하고 그들이 먹을 물과 식량도 함께 실어야 했기 때문에, 무역을 위한 장거리 항해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BC 13세기경 페니키아 상인들은 갤리선에 보다 크고 튼튼한 용골을 써서 배의 규모를 확장하고 가운데에는 큰 을 달아 노와 바람의 힘을 함께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발전시켜, 멀리 대서양과 영국까지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북부 유럽의 바다는 몹시 차고 거칠었기 때문에,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남쪽의 온화한 지중해 지역과는 다른 모양의 배를 개발해냈다.바이킹선은 파도를 막기 위해 이물과 고물을 높게 만들고 노젓는 구멍에도 문을 여닫을 수 있도록 장치해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했으며 북해의 거친 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가죽으로 돛을 만들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통나무배로부터 나무를 포개어 만든 상자형 배로 발달되었고, 다시 정크(junk) 선이 등장했다.

정크는 70여 종의 변형으로 개발되었으나 고물이 높고 용골이 없는 대신 선체가 여러 개의 선실로 나누어져 있고 방향타, 즉 키가 매우 크다는 점 등은 모든 정크선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선실은 서양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배의 일부가 파손되더라도 전체의 안전에는 문제가 없도록 설계되어 튼튼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중세까지 정크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배로 꼽혔으며 원양항해가 가능해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동쪽 해안까지 두루 다닐 수 있었다.

중세와 근대 수상교통

북부 유럽에서는 400여 년 간 바이킹선이 계속 사용되었으나, 그 구조는 차츰 개선되어 선수와 선미에 전투용 탑이 세워졌고 이후에는 돛대에도 탑이 설치되었다.

북부 유럽에 앞서 상업이 발달된 지중해 지역에서는 선박의 발달도 빠르게 촉진되었다. 배는 더 길고 커졌으며 갑판은 2~3층으로, 돛대도 2개로 늘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노와 돛을 병용하는 방식에는 변함이 없었는데, 이는 노젓는 선원이 많을 수록 해적과의 전투에서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배의 방향을 잡는 데 쓰이는 키를 고물 뒤로 옮겨 설치한 것도 선박구조에서 중대한 진전이었다.

또 중세에는 항해를 돕는 여러 가지 기구가 도입·발명되었다. 11세기경 나침반이 유럽에 처음 도입되었고 12세기에는 앙각측정기가 발명되었으며, 지중해와 흑해 지역에서는 해도(海圖)가 사용되기 시작해 점차 주변으로 확산되었다. 지도와 기구를 사용하게 됨에 따라 항해의 범위도 크게 확장되어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까지, 서쪽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이르렀다.

15~17세기에는 돛을 이용한 범선의 발달이 이루어졌다.

15세기초까지 지중해에서는 3개의 돛대를, 북부 유럽에서는 1개의 돛대를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으나 점차 지중해식으로 통일되었고, 동시에 배 앞머리에도 짧은 돛대를 하나 더 추가해서 달기 시작했다. 배의 규모는 더욱 대형화되어 갈레온(galleon) 범선이 등장했고, 16세기 무렵에는 국가간의 적대감이 고조됨에 따라 몰타·포르투갈·스코틀랜드·잉글랜드·프랑스·스웨덴 등지를 중심으로 치열한 군함건조 경쟁이 벌어졌다.

스페인의 갈레온선 그림
스페인의 갈레온선 그림

17~18세기에 걸쳐 유럽에서는 포르투갈·프랑스·네덜란드·덴마크·잉글랜드·스웨덴 등 6대국의 해양진출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경쟁적으로 동양의 인도 및 동인도 지역과 교역을 행하는 과정에서 상선이 크게 발달하였다. 상선에는 해적의 습격에 대비해 마치 군함처럼 장비가 갖추어졌을 뿐 아니라 호위용으로 작고 빠른 프리게이트 전함이 개발되었다.

배의 밑부분에는 벌레가 나무를 갉아먹거나 바다 동식물이 달라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구리판을 씌웠는데, 그 결과 순항속도도 매우 빨라졌다(→ 쾌속범선). 돛의 형태 및 기능도 다양하게 개선되어 19세기에는 기술수준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 당시의 대표적인 쾌속선들로는 미국의 스쿠너선, 영국의 클리퍼선 등이 손꼽힌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증기선이 등장하면서부터 100여 년에 걸쳐 차츰 범선은 증기선으로 대체되어 범선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요트, 관광용, 해군 훈련용 등으로 소형 범선은 계속 제작되고 있다.

산업혁명기의 교통

철도교통 초기의 개발과정(1801~08)

영국트레비식은 여러 차례 증기기관차를 제작해 실험하였다.

그는 특히 고압증기실린더와 쓰고난 증기를 재활용하는 방법을 비롯해 기차가 궤도 위를 달리게 하는 방법을 고안, 기차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1825년에는 스티븐슨이 영국의 스톡턴과 달링턴 사이에 세계 최초의 일반대중용 철도를 개통시키고, 그뒤 1830년 9월 리버풀-맨체스터 철도가 완성되자 영국에서는 본격적인 철도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스톡턴-달링턴 철도).

대중교통에서 철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확대되어 1836년에는 런던에 철도회사가 설립되는 등 영국 전역으로 철도교통이 확산되었다.

영국과 달리 유럽대륙에서는 철도교통을 대부분 국가의 계획과 통제하에 도입했으며, 일부는 정부에서 직접 철도를 건설한 경우도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1827년 최초로 생테티엔과 앙드레지외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었고 독일에서는 1835년 뉘른베르크와 퓌르트 사이에서 처음으로 철도 운행이 시작되었으며, 1841년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와 스위스 바젤간에 완공된 철도는 세계 최초의 국제철도라 할 수 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1827년 볼티모어-오하이오철도회사가 미국 최초로 철도면허를 얻어 영업에 들어갔다.

1840년경 미국의 철도노선 연장은 4,500km에 불과했으나, 이후 본격적인 철도부설사업이 시작되어 20년 후에는 무려 5만km로 늘어났다. 처음에는 여러 철도회사가 국지적으로 철도노선을 개발했으나, 점차 소규모 철도들은 통합되고 운행범위도 광역화되어갔다. 철도교통은 개발 당시 다른 경쟁 교통수단에 비해 더 빠르면서도 운임 부담이 그다지 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날씨의 영향을 적게 받고 또 대량수송이 가능했기 때문에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경쟁관계에 있던 합승마차와 운하용 선박이 크게 타격을 받고 차츰 쇠퇴되었다. 제조업과 도매업도 이전처럼 반드시 운하나 하천연안에 입지할 필요가 없어졌고, 과거에는 비싼 운송비 때문에 손댈 수 없었던 자원의 개발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처럼 철도가 많은 장점을 나타내자 각 도시와 마을은 앞다투어 자기 고장에 철도노선을 유치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철도교통 성장기(1850~1900)

19세기 후반은 철도교통이 크게 성장한 시기로서 전세계에 걸쳐 철도 관련 기술이 발달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교량 건설에도 영향을 미쳐 기차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크고 튼튼한 교량이 많이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1857년 영국에서 최초의 철교가 부설되었으며, 터널 굴착기술도 발달해 1828~42년 테임스 강에는 강 바닥을 통과하는 터널이 뚫렸고 알프스의 몽스니 터널처럼 긴 암석터널도 만들어졌다.

자동전기신호와 공기 제동기의 발명도 19세기 후반의 주목할 만한 기술발전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이러한 기술적 진보에 힘입어 서부 유럽과 미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철도가 도입·확장되었다. 러시아에서는 1891년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9,313km의 시베리아횡단철도가 기공되었고 캐나다에서는 각각 1885, 1914, 1915년에 모두 3개의 대륙횡단철도가 개통되었다.

내륙수운

교통기술이 발달되기 이전에 강은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교통로의 역할을 담당했으나, 16세기경부터는 교통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자연 하천만으로는 그 수요를 충당할 수 없어 사람들은 인공 운하를 건설해 내륙수송망을 넓히기 시작했다.

18~19세기의 공업발달은 운하건설을 더욱 촉진시켜 영국의 미들랜드 공업지대와 런던을 잇는 운하, 벨기에-네덜란드의 운하, 러시아의 발트해-카스피해 운하, 그리스 코린트 운하, 미국 이리 운하 등이 세워졌다.

운하이용에서 계절에 따른 수위 변동이나 지형적 장애는 갑문의 개발로 대처했다. 19세기 들어 철도교통이 발달되는 가운데 하천과 운하의 이용은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대양과 운하를 연결하려는 노력은 계속 추진되어 1869년 수에즈 운하가, 1914년 파나마 운하가 완공되었으며, 미국에서는 미시시피 강과 오대호를 연결하는 운하건설이 시작되었다.

해운

증기기관의 등장은 수상교통에도 일대 변혁을 가져와 기존의 범선이 증기선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1775년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한 이후 증기선의 실용화를 위한 시도가 진행된 결과, 1803년 풀턴이 센 강에서 증기선 시운전에 첫 성공을 거두었다. 개발 초기의 증기선은 돛도 갖추고 있어, 일반적으로 바람이 좋을 때에는 돛을 이용해 연료를 절약하는 방식으로 운행했다.

영국의 큐나드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증기선을 여러 척 건조하는 등 사업의 성공을 거듭하면서 유명한 큐나드기선회사를 발전시켰다.

초기의 증기 기관은 저압 기관으로서 최대 출력이 1,000마력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행해졌으나, 결국 출력을 높이려면 기관도 따라서 커져야 한다는 제약은 극복하지 못했다.

마침내 1884년 영국의 파슨스와 스웨덴의 라발이 각기 터빈 기관의 원리를 개발해냈다(→ 증기터빈). 이 기관은 크기가 작고 가벼우면서도 열효율이 높은 장점을 지녀 급속히 발달되었고 20세기초부터는 실용화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배의 추진장치로는 선측에 수륜(水輪)을 달아 물길을 헤어나가는 방법이 먼저 도입되었다. 그러나 수륜은 추진력은 좋은 반면 쉽게 파손되고 또 파도가 심할 경우 배를 조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단점이 있어, 19세기 중엽부터 스크루 프로펠러로 대체되었다.

한편 인류가 을 사용하기 시작한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물보다 무거운 물체인 철이 물에 뜰 수도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181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영국의 윌슨에 의해 최초의 철제범선이 건조되었다.

이후 철선이 목선에 비해 폭풍에 견디는 힘이 보다 강하다는 사실이 입증된 결과 1850년경에는 철을 배의 소재로 이용하는 일이 보편화되었다. 또한 바로 이 무렵 배에 부딪히면 폭발하도록 만들어진 대포탄환이 사용되기 시작함에 따라 피격시의 선체 파손을 줄이기 위한 목적에서도 철선은 급속히 보급되었다. 1880년 이후에는 철 대신 강철이 쓰였으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선박전체를 용접하여 배를 만드는 방식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현대의 도로교통

증기자동차

자동차란 도로 위에서 자체추진력으로 움직여 나가는 탈것을 말한다.

이런 자체추진차의 실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세기 중반 무렵부터이다. 스위스의 전부아 목사(1760)는 수레에 소형풍차를 다는 방법을 제안했고, 프랑스 발명가 보캉송(1748)은 시계태엽 모양의 추진장치를 구상했다. 그러나 실질적 의미에서 세계 최초의 자동차로 공인받고 있는 것은 로렌 지방의 퀴뇨가 제작한 자동차였다(→ 퀴뇨 증기자동차).

1769년에 선보인 그의 자동차는 매우 크고 무거우며 증기로 작동되는 3륜차로서, 개발 당시 4명을 태우고 시속 3.6km의 속도로 달릴 수 있었다.

그가 직접 제작한 차의 부품 가운데 일부를 그대로 다시 사용해서 만든 복제품이 현재 파리의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퀴뇨가 발명한 증기자동차는 곧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어 1800년에는 파리에서, 1805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운행되었으며, 1830년대의 영국에서는 증기자동차 생산이 제조업 부문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증기자동차는 소음이 크고 연기가 많이 나며 도로를 파손시키는 경우가 빈번해 시민들에게 큰 불편을 주었기 때문에, 도로에서 증기자동차 통행을 금지시키는 예가 많아졌다.

마침내 1865년에는 증기자동차의 운행속도를 제한하는 법이 제정되었고 이후 증기자동차는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가솔린 자동차

1862년 프랑스의 보 드 로샤는 오늘날 대부분의 자동차에 적용하고 있는 4행정(行程)원리를 고안해냈으며, 1864년에는 마르쿠스가 휘발유와 공기를 혼합하여 연소시키는 방법을 발명했다.

독일에서는 벤츠다임러가솔린 기관의 선구자로서 큰 역할을 했다.

벤츠는 가솔린차의 개량에 주력한 결과 1885년 최초로 2행정 3륜자동차를 만들어냈고, 같은 해에 다임러는 고출력 내연기관을 개발함으로써 4륜자동차의 운행에 성공했다.

당시 다임러의 자동차는 속도를 4단계로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녀 다른 차종에 비해 월등하게 시장성이 밝았기 때문에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임러자동차회사를 세울 수 있었다(→ 자동차산업).

이후 독일의 양대 자동차회사로 성장한 벤츠와 다임러는 1926년 메르세데스벤츠사로 합병하면서 더 한층 발전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데디옹부통, 푀조, 르노 등의 기업이 자동차 제조업을 주도했으며, 이탈리아에서는 1896년에 스테파니니마르티나가 세워진 데 이어 1899년에는 피아트가 설립되었다.

미국의 자동차개발

미국은 현재 세계적인 자동차 생산국으로 자리잡고 있다.

1900년경 미국에는 모두 50여 개의 자동차제조업체가 가동중이었는데, 생산되는 자동차를 연료에 따라 구분해보면 전체 생산량의 40%는 증기를, 38%는 전기를, 나머지 22%는 가솔린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그당시 가솔린 자동차는 고장이 잦고 소음이 많은 데다가 증기차는 조작이 복잡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전기차의 전망이 밝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러나 전기자동차 역시 속력이 느리고 자주 충전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장거리를 주행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20세기에 들어서는 각 제조업체들이 전기자동차 생산을 서로 기피하게 되어 결국 사향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1908년 포드가 내놓은 'T형자동차'는 당시 자동차산업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포드는 가격도 저렴하고 정비하기도 쉬운 자동차를 생산함으로써, 이당시까지만 해도 특정인들의 전유물이었던 자동차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필수품으로 바꾸어 놓았다.

T형차의 등장은 그로부터 약 20여 년에 걸쳐 자동차업계에 일대 변혁을 몰고와, 미국 전역에서 빠른 속도로 자동차 상품이 보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산업이 경제의 주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10년대에는 포드식 자동차생산 철학이 유럽에까지 확산되면서 오스틴, 모리스, 싱어, 피아트, 시트로앙 등 굴지의 기업들이 출현했다.

고전형 자동차

1925~42년에는 각종 고급차들이 생산되어, 자동차 수집계에서는 이 시기를 고전기라 부른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1904년에 설립된 롤스로이스를 꼽을 수 있으며, 이밖에도 20세기 전반기에는 스페인의 이스파노수이자, 프랑스의 부가티와 부아쟁, 미국의 뒤센베르크와 캐딜락이 있다.

그리고, 독일의 메르세데스벤츠, 벨기에의 미네르바, 이탈리아의 이조타프라스키니 등 다양한 고전양식의 자동차들이 선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중고차 수집이 취미활동의 하나로 등장했으며, 고전형 자동차들은 골동품으로 취급되어 그 값이 폭등하는 현상을 보였다. 1951년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는 자동차를 예술작품으로 다룬 전람회가 열리기도 했으며, 20세기말 최근까지도 고전양식 자동차에 대한 인기와 향수는 지속되고 있다.

1945년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는 자동차가 점점 대형화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그러나 유럽에서 독일의 폴크스바겐 등을 중심으로 한 소형차의 생산이 성공을 거두자 미국에서도 이 영향을 받아 소형 또는 중소형차의 생산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전후에는 자동차경주도 다시 유행하기 시작해 주요 스포츠 종목의 하나로 부상했다. 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면에서도 가스 터빈 기관, 연료주입계통, 디스크 브레이크, 전륜구동(前輪驅動) 등이 개발되어 커다란 진보가 이루어졌다.

일본이 세계 주요 자동차생산국으로 부상한 것도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주목할 만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자동차의 안전성

자동차는 그 자체의 속도와 무게로 인해 충돌시 탑승자나 보행자는 물론 다른 차량과 승객에게까지 치명적인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안전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자동차의 안전성은 운전자의 교육, 차량의 정비, 도로의 개선, 교통법규의 철저한 시행 등으로 상당히 보완될 수 있지만, 이밖에 차량의 구조 자체를 개량하는 일도 안전성을 높이는 데 매우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차량안전장치, 안전공학).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대표적인 장치로는 브레이크를 들 수 있다.

브레이크에는 2중 실린더 체계를 적용함으로써 압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경우를 방지하고, 전·후륜의 브레이크를 분리함으로써 어느 한 쪽에 이상이 생길 경우에 다른 하나의 작동만으로도 차가 정지할 수 있도록 설치한다. 탑승자를 보호하는 장치로는 안전벨트나 공기주머니 등 탑승자 제어장치가 쓰이며, 차체의 충격을 조절하는 장치로는 운전대의 충격흡수축을 비롯해 충격흡수식 범퍼가 이용된다. 이밖에도 자동차를 설계하는 단계에서 충돌을 대비하는 방안으로 차체는 크게 망가지더라도 충격을 흡수하도록 하여 탑승자에게는 최소한의 충격이 전달되도록 설계하는 기법이 사용된다.

환경과의 관계

최근에는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자동차에 대해서도 오염방지 및 이와 관련된 규제가 점점 엄격해지고 있다.

자동차의 연료는 적당한 휘발성과 폭연방지능력을 갖추어야 할 뿐만 아니라 오염물질 배출량이 적어야 하는 등 3가지 기본요건을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 폭연방지성은 가솔린 정제과정에서 주로 납을 첨가하는 방법으로 조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사용된 납이 공중에 방출되면 대기를 오염시키고 또 자동차의 오염방지촉매의 사용도 금지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지금은 무연(無鉛) 가솔린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밖에도 근래에는 오염배출량이 적은 기관, 연료의 연소율을 높이는 촉매, 배기가스 재순환시스템, 기존의 기화기를 대신하는 연료주입장치 등이 개발되는 등 오염방지와 관련해서 커다란 기술적 진전이 이루어졌다.

버스

1830년 영국의 거니 경이 증기기관을 장착한 승합차를 고안함으로써 버스의 원형이 선보이게 되었고, 이후 1895년에는 독일에서 8인승 옴니버스가 만들어졌다.

1920년대까지 버스는 단지 트럭용 차대에 버스용 차체를 얹은 형태로 만들어졌으나, 이후 버스의 용도에 적합한 차대가 개발되면서부터 트럭과는 별개의 독자적인 발달과정이 전개되었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운행되고 있는 버스는 대부분 대형 단층차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지만, 영국의 2층 버스나 독일의 1층 버스를 비롯해 굴절버스 또는 트롤리버스 등도 일부 국가에서 사용되고 있다.

버스는 용도에 따라 시내버스, 도시간 고속버스, 학교버스 등으로 구분되며, 각기 승객의 특성에 적합한 구조로 제작된다. 시내버스는 저속운행에 알맞게 설계되고 출입문의 계단이 낮으며 화물칸이나 선반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도시간 버스는 화물칸을 넓히기 위해 출입구를 높게 만들고 좌석위에도 물건을 얹을 수 있는 선반을 설치하며, 승객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독서등이 설비된다. 학교버스는 대부분 트럭용 차대 위에 버스 차체를 연결해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진다.

트럭

트럭은 1896년 독일의 다임러에 의해 최초로 제작된 데 이어 1898년에는 미국의 윈스턴사에서도 가솔린 기관을 이용한 화물자동차의 개발에 성공했다.

트럭은 구조에 따라 단체(單體) 트럭과 굴절 트럭으로 구분된다. 단체 트럭이란 모든 차축이 하나의 차대에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하며, 굴절 트럭은 운전석과 화물칸이 분리되고 또 화물칸들도 각각 따로 분리될 수 있는 구조를 가리킨다.

갈수록 화물수송 수요가 늘고 컨테이너 수송방식이 발달됨에 따라 트럭은 점차 대형화되고 굴절형 트럭의 비율도 늘어나고 있다.

현대의 철도교통

개요

20세기는 철도교통의 성숙기라고 말할 수 있다.

선진국의 경우 철도노선이 신설된 예는 많지 않았지만, 고속운행이 실현되고 특수화물차가 개발되었으며 정교한 교통관리체계가 발달된 것을 비롯해 차량의 안락함이나 안전성이 증진되는 등 기술적인 측면에서 커다란 비약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철도는 차츰 다른 교통수단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20세기 중반 무렵에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여러나라가 경제성이 떨어지는 보조노선이나 지선들은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세계의 다른 지역, 특히 소련·중국·일본·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 등지에서는 주요 철도노선의 건설작업이 계속 진행되었다.

소련에서는 시베리아횡단철도가 복선화되고 1970년까지 대부분의 철도 구간이 전철화되었을 뿐 아니라 많은 노선이 신설되어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망을 보유하게 되었고, 중국에서는 지닝[濟寧]에서 몽골의 울란바토르까지 철도가 부설되었으며, 일본에서는 도쿄[東京]에서 오사카[大阪]까지 고속전철노선이 개통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원래 각 주(州)마다 철로 궤도의 폭이 달라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표준궤도의 노선을 신설하기 시작했고, 캐나다에서도 앨버타·퀘벡·브리티시컬럼비아 주와 노스웨스트 준주 등지의 신개척지를 중심으로 철도건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00~30년 사이에는 전반적으로 많은 기술진보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디젤기관차가 실용화되고 중앙교통관제기술이 완벽한 수준으로 개선된 것을 비롯해, 철로의 이음새에 용접을 이용해서 철도유지비를 절감하고 승차감을 높인 점 등은 20세기 전반의 주요한 기술 혁신으로 평가받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0여 년 만에 증기기관차는 모두 디젤기관차로 대체되었으며, 1950~60년대에는 여러 나라에서 간선철도에 대한 전철화사업이 시작되었다. 현재 전세계 철도노선의 60% 정도는 그 궤도가 표준형으로서 1.435m 폭으로 제작되어 있다.

표준궤도에 비해 폭이 좁은 협궤는 건설비용이 절감되고 또 그 위를 달리는 차량 역시 작기 때문에 운행비용도 적게 드는 이점이 있으나, 속도를 높이면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단면이 T자를 거꾸로 놓은 것과 같은 형태의 궤도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 T자형 궤도를 고안한 것은 1830년대 영국의 비뇰스와 미국의 스티븐슨이었다.

표준형 궤도 1개의 길이는 30m이지만, 지금은 레일과 레일을 용접으로 연결하기 때문에 기차가 연결부위를 지나갈 때 진동이 없고 차량정비 비용도 절감된다.

기관차와 차량

기관차는 사용하는 연료에 따라 증기·디젤·전기기관차로 구분할 수 있다.증기기관차는 20세기 전반까지 널리 사용되었지만, 열효율이 6%에도 못 미치는 구조적인 취약점 때문에 1970년대부터 선진국에서는 거의 사라지고, 일부 개발도상국에 남아 있을 뿐이다.

증기기관차는 차내에 연료와 물을 싣고 다니는 자급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디젤기관차도 연료탱크를 달고 다니지만, 전기기관차는 전선이나 별개의 레일을 통해 외부로부터 동력을 공급받는다. 전기기관차들 가운데 축전지를 쓰는 경우도 있으나 이들은 소형이고 특수용도에 국한되어 있다.

전기를 기차의 동력원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시도가 행해진 것은 1835년부터였으나 상용화된 것은 1895년 미국동부에서였다.

초기에는 단지 증기기관차가 굴속에서 내뿜는 매연과 소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도시근교노선에 전기기관차가 도입되었으나, 1902년 이탈리아에서는 간선철도에도 전기기관차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전철화사업은 제1차세계대전 이후 스웨덴·스위스·노르웨이·독일·오스트리아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1920년대말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 어느 정도의 전철화사업이 진척된 상태였다.

유럽 이외의 지역 가운데에는 1919년 오스트레일리아, 1923년 뉴질랜드, 1925년 인도와 인도네시아, 1926년 남아프리카 등지에서 차례로 전기기관차가 도입되었으며, 미국의 경우 1900~30년 사이 여러 대도시 및 근교에서 전철이 운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전철화 작업이 더욱 활발해져 스위스에서는 전체 철도노선의 99%가 전철화되었으며, 1970년대초까지 스웨덴 62%, 노르웨이 57%, 이탈리아 59%, 프랑스 26%, 서독 33%, 소련 22%, 일본 45%, 영국 19% 등 각국의 여러 노선이 전철화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전노선의 1%에도 못 미치는 극히 일부분의 노선만 전기를 사용하고 있다.

전기기관차는 전기를 값싸게 공급받을 수 있고 교통수요가 최소한 시설투자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유지되어야 한다는 2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다른 어떤 기관차보다도 경제성이 높다. 증기기관차나 디젤기관차는 차내에서 직접 동력을 생산해야 하지만, 전기기관차는 동력을 외부에서 그대로 공급받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훨씬 우수하다.

또한 열차가 출발할 때나 가파른 경사면을 오를 때 충분한 힘을 낼 수 있고 소음이 적을 뿐 아니라 매연을 배출하지 않으며 차량의 구조도 단순해 정비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철에는 전기배선로 등과 같은 고정시설의 건설과 유지·관리에 드는 비용부담이 크다는 약점이 있다.

1960년말 이래로 디젤기관차는 기존의 증기기관차를 거의 대체해, 세계적인 기관차의 표준이라는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디젤 기관). 디젤기관차는 증기기관차에 비해 열효율이 4배로 크기 때문에 연료 소모가 적고 속도를 높이기 쉬우며 중간정비를 받지 않고도 3,000km 이상의 장거리를 주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증기기관차보다 깨끗하고 운행 도중 물을 공급받을 필요도 없어 편리하다.

디젤기관차는 차체내에 발전장치를 갖추고 디젤연료를 사용해서 전기를 생산해 움직이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디젤-전기기관차라 불러야 옳다. 디젤기관차는 전기기관차에 비해 전기 공급을 위한 전선 등과 같은 고정설비 비용 부담이 적지만, 그대신 출력이 약하고 기관차의 구조가 복잡해 가격이 비싼 것이 단점이다.

화차는 무개차(open-top car), 유개차(boxcar), 무개무측의 평대차(flatcar) 등 3가지 유형으로 크게 구분되며, 용도에 따라 각각 다양한 변형으로 제작된 차량들이 사용된다.

특수화차로서는 자동차운반용 2단차, 탱크차, 화차내부를 칸막이한 차, 지붕을 여닫을 수 있는 화차 등이 있다.객차는 크게 유럽형과 미국형으로 나누는데, 유럽형은 6~8인승 객실이 있고 차의 한편으로 통로가 나 있는 것이 많고, 미국에서는 2인용좌석이 통로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배열된 것이 많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에서도 미국형 객차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특수객차로는 2층객차, 침대차, 전망차, 식당차 등이 있다.

교통관제와 경영

철도교통은 한 국가나 지역 또는 대륙 규모의 방대한 범위에 걸쳐 이루어지므로, 이 거대한 교통조직을 효율적으로 관리·운영하기 위해서는 통신 및 제어 체계가 잘 갖추어져야 한다.

통신체계에는 통상적으로 쓰이는 전보와 전화 외에도 무선전화 및 컴퓨터통신체계가 사용된다. 교통관제를 위한 신호체계의 역사를 보면, 초기에는 낮에는 깃발을 밤에는 등을 사용했으나 차츰 자동화체제가 개발되어 이를 대체해왔다. 지금도 교통량이 적은 철도노선에서는 기차운행표와 전화를 이용한 수동식 교통관제 방식이 쓰이지만, 교통량이 많은 지역이나 고속철도가 운행되는 지역에서는 거의 완벽하게 자동관제체계를 갖추고있다.

자동화체계가 더 진전되면 승무원 없이도 기차를 운행할 수 있게 된다. 일본의 신칸센[新幹線]과 같은 고속철도가 그 예로서, 승무원이 하는 일이란 기차를 출발·정지시키고 문을 여닫는 일 정도에 불과하다.

이와 비슷한 무인기차가 영국의 런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도 운행되고 있다. 차량통제는 또한 적환장과 차량기지에서 차량의 분류 및 배치작업에 사용되는데, 여기서도 컴퓨터, 무선전화, 폐쇄회로 텔레비전 등을 이용한 자동관제가 급속히 보급되는 추세에 있다. 자동화는 작업능률을 크게 향상시키기 때문에, 여러 개의 소규모 적환장이나 차량기지에서 일을 분담하는 것보다는 하나의 대규모 차량기지에서 통합하여 작업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므로, 소규모 기지가 많이 폐쇄되는 등 철도시설의 입지에도 큰 변화가 일고 있다.

철도교통이 시작된 초기에는 대부분의 철도가 개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철도가 지역사회와 국가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워낙 크고 광범위하기 때문에 오래 지나지 않아서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철도건설 및 노선의 위치결정 등에 규제를 가하면서 철도관련법안을 제정해 철도운영 전반에 대한 규범을 설정하고 운임구조 등에도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정부의 간섭이 증가되는 과정을 거쳐 1970년대 초에 이르면 거의 모든 나라의 철도가 국유화 혹은 준국유화되었다.

정부통제의 증가는 철도가 봉착한 재정난에도 연유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철도는 다른 교통수단들로부터 심한 도전을 받게 되었는데, 철도는 고정자산이 많기 때문에 급변하는 경제환경에 맞추어 쉽게 변신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어떤 노선이 적자노선이라 하여 공공성을 무시하고 운행을 함부로 중지할 수는 없어 철도회사의 경제적 어려움은 매우 심하여졌다. 이런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 철도의 국유화이며, 프랑스는 1938년에 영국은 1948년에 국유화하였다. 지금까지 사유철도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아메리카에서도 캐나다 국립철도는 정부가 운영하고 있다.

미국의 철도는 고속도로 및 항공교통에 밀려 1960년대에는 도시간 장거리 승객수송서비스를 사실상 포기하게 되었고, 일부 대도시의 통근열차로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 되었다(승객수송).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하여 준관영철도회사로 도시간 승객교통을 담당할 미국철도여객공사(Amtrak)와 화물수송을 담당한 통합화물철도공사(Conrail)를 1970년과 1973년에 각각 설립하였다.

철도가 여러 교통수단들로부터 심한 경쟁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철도는 나름의 중요한 장점도 가지고 있다.

첫째, 곡물, 광석, 석탄과 같은 대량화물의 장거리수송, 도시간 컨테이너 대량수송, 대도시와 주변지역간의 통근자수송 등에서 타교통수단보다 유리하며, 둘째 환경을 교란하는 정도가 자동차나 비행기에 비해 훨씬 적고, 셋째 연료효율도 경쟁수단들보다 훨씬 우월하다. 따라서 철도교통의 미래는 이러한 장점들을 얼마나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승객수송을 위해 개발된 고속열차로는 일본의 신칸센이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1964년 개통된 이 급행노선은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일본의 인구와 산업이 가장 밀집한 핵심지대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에 대단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고, 노선도 계속 연장되어갔다. 이와 비슷한 고속열차로는 영국의 런던-맨체스터-리버풀, 프랑스의 파리-니스와 파리-리옹, 미국의 뉴욕-워싱턴 노선 등도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화물운송분야에서도 화물의 특성에 알맞게 장비와 요금구조를 맞추어 석탄·광석·석유·곡물 등 대량화물수송을 전문화하였으며, 컨테이너화물을 트럭수송과 연계하는 방안 등으로 경쟁에 대처하고 있다.

현대의 도시교통

도시 내에서 이용되는 바퀴달린 교통수단으로는 말이 끄는 승합차와 옴니버스, 자전거, 전차, 지하철, 자동차 등이 운행되어왔다(→ 대중교통수단). 옴니버스는 1828년 파리에서 처음 취역했고, 전차는 미국의 리치먼드에서 1888년 처음 시도되었다. 영국은 템스 강 터널공사에서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지하철 건설에 앞장서 1862년 런던의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고가철도의 형태로는 1867년 뉴욕에서 케이블카가, 1895년에는 시카고에서 고가전차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시가전차).

19세기말 통근열차와 전차가 등장함으로써 도시는 이들 노선을 따라 방사상으로 확장되었고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교외취락이 발달되기 시작했다(→ 도시화). 20세기에 보급되기 시작한 자동차는 노선에 구애받지 않고 다닐수 있다는 융통성 때문에 시가지 중간에 남아 있던 미개발지역이나 도시와 교외취락 사이의 미개발지역들이 시가지로 개발되도록 하는 촉매역할을 했다.

그 결과 자동차는 이제 교외지역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고, 이는 또 도시 외곽과 도심을 연결하는 도시고속도로의 건설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었다. 도시는 빠른 속도로 확장되었을 뿐 아니라, 도시와 도시가 연결되면서 이른바 메갈로폴리스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자동차의 보급, 특히 자가용 승용차의 보급은 가장 먼저 도시에서 전차와 같은 궤도차가 사라지도록 만들었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필라델피아·보스턴, 독일의 함부르크·프랑크푸르트 등을 비롯한 유럽의 일부 도시에는 아직도 전차가 남아 있지만,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더이상 전차를 볼 수 없다.지하철은 지상의 도로와 거주지에 영향을 적게 끼치므로 현재 가장 촉망받는 도시 대중교통수단으로 꼽히며, 어떤 도시들은 이를 교외철도망과 연계하는 광역 전철-지하철망의 계획을 구상하고 있다.

자가용 승용차의 확산은 시내버스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와 버스 운행 빈도가 낮아지고 반대로 요금은 오르도록 만들어, 승용차를 보유할 수 없는 빈곤층 또는 운전능력이 없는 노인과 장애자들의 교통여건을 악화시켰다.

자동차는 도시에 여러 가지 공해, 즉 배기가스에 의한 대기오염, 소음, 여기저기 버려진 폐차와 자동차부품 등에 의한 시각적 공해, 도로를 점유하여 발생하는 공간적 공해 등을 유발하고 있다. 미래의 도시교통대안으로는 지하 진공터널체계와 움직이는 도로 등이 검토되고 있다.

현대의 수상교통

선박의 발달과정

증기선은 장거리항해에 필요한 연료를 충분히 실을수 없다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19세기 후반 브뤼넬에 의해서 배는 크면 클수록 같은 분량의 연료로도 더 빨리 갈 수 있다는 원리가 발견되어, 대형 증기선 건조가 시작되었다(→ 조선공업). 19세기 후반에는 또한 대서양을 보다 빠르게 항해할 수 있는 배를 만드는 경쟁이 불붙어, 여러 가지 조선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이 이룩되었다. 선체소재로는 강철이 사용되고, 엔진 효율을 높이게 됨에 따라 순항속도는 1899년에 22~23kn(노트)까지 개선되었다.

터빈이 고안되고 디젤 증기선이 등장한 것도 19세기 후반이었다.

1920년대에는 선체의 형태가 크게 개선되었다(→ 조선공학). 이물을 흘수선(吃水線)에서 급하게 구부린 다음 물속에 잠기게 함으로써 파도에 잘 견디고 조타능력이 향상된 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1935년 프랑스의 7만 9,280t짜리 상선 '노르망디' 호는 평균 30kn의 순항속도로 대서양을 4일 3시간 만에 횡단하는 신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선박의 수와 톤수가 급증했을 뿐 아니라, 상륙정(landing ship tank/LST)과 같은 군사형 선박을 비롯한 새로운 유형의 배들이 등장했으며, 선체의 용접술이나 조선용 공작기계의 표준화 등 기술의 측면에서도 현저한 발달이 이루어졌다. 종전후에는 대형비행기의 등장으로 인해 장거리 여객선시대는 종말을 맞이했다.

원자력함과 수중익선(水中翼船)의 개발, 컨테이너수송법 등이 등장한 것도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중요한 사건들이다.

특수선

다양한 용도에 따른 특수선의 예로는 첫째, 컨테이너선을 들 수 있다.

컨테이너 수송법은 제2차 세계대전중 군대에서 포장된 화물을 해외기지로 수송하는 효율적인 방법으로 성공을 거두었던 경험과, 종전후 하역 작업의 임금 상승을 배경으로 발달되기 시작했다(→ 화물수송). 운송될 화물은 출발지 창고에서 미리 컨테이너에 적재·봉함되고 기차나 트럭에 의해 항구로 운송된 다음 전용 크레인을 이용해 신속하게 배에 실어진다.

컨테이너 수송은 이와같이 하역에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을 절감할 수 있고, 화물의 도난이나 파손의 우려가 없어 보험 부담이 적으며, 선박의 입장에서 보면 선원수를 줄이고 항행 횟수를 늘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컨테이너 수송에는 전용 부두, 계량기, 하치장 등 여러 가지 전용시설을 갖추기 위해 많은 자본을 들여야 하는 부담이 있지만,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큰 이점이 있어서 1960년대 이래 전세계적으로 컨테이너 항구 개발이 성황을 이루었고, 컨테이너의 대형화, 냉동 컨테이너 등 특수 컨테이너의 등장과 같은 기술적 진전도 경험하였다.

둘째, 특수선의 형태로는 차량전용선(roll-on roll-off)을 들 수 있다.

이는 배의 고물과 이물, 또 경우에 따라서는 선측에 여닫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그리로 차량을 출입시키며, 내부에는 주차장 모양의 갑판을 여러 층 설치하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자동차산업의 발달과 함께 차량전용선의 수는 증대되어 왔다.

셋째, 차량과 승객을 함께 싣는 페리(ferry) 선이 있는데 이는 단거리 항해에 주로 이용되며, 배의 규모도 작다. 영국해협을 다니는 페리 가운데에는 기차를 실을 수 있도록 대형으로 건조된 것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큰 규모의 다리가 많이 건설됨에 따라 페리의 역할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넷째, 고위도지방에서는 겨울 결빙기에 얼음을 깨고 뱃길을 열어줄 배가 필요하기 때문에, 쇄빙선(碎氷船)을 이용한다.

이 배는 앞으로 나가면서 얼음 위로 올라가 배의 무게로 얼음을 깨고 뱃길을 열게 된다. 가능한 한 항로의 폭을 넓게 만들기 위해 쇄빙선의 폭도 넓게 만드는 한편, 배가 얼음 위로 올라가기 쉽도록 이물과 고물의 흘수(吃水)는 얕게 만든다. 또한 프로펠러가 얼음에 부딪혀 파손당할 경우를 대비해 여러 개의 프로펠러를 장착하는데, 전후진이 보다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 대부분 이물에도 프로펠러를 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쇄빙선을 건조·보유하고 있는 나라로서, 1957년에는 세계 유일의 원자력 쇄빙선 '레닌'호를 취항시키기도 했다.

다섯째, 배 안에 여러 개의 탱크를 장치해 석유 등을 실어나르는 탱커가 있다. 탱커는 선박 가운데 그 구조가 가장 단순하며 선원이 많이 필요하지 않고 건조 비용도 저렴할 뿐만 아니라 탱커의 수요도 점점 늘고 있기 때문에 그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있는 추세이다.

1970년대에 일본에서 건조된 유니버설급 유조선의 경우 길이 345m 적재톤수 32만 6,000t에 달하는 큰 규모였으며, 최근에는 50~100만t급 초대형유조선도 건조되고 있다.

탱커가 대형화됨에 따라 기존의 항구가 이를 수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되어, 그 대안으로 해안에서 떨어진 곳에 인공섬을 만들어 대형 유조선을 정박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다. 탱커는 석유수송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천연가스·광석·석탄·곡물 등을 비롯해 심지어는 주류운반용 탱커도 있다.

석탄·유황·광석 등은 물에 개어 반죽된 상태로 탱크에 저장하며, 곡물은 흡입기를 이용해서 싣는다.

여섯째, 원자력선의 이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잠수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종전의 잠수함은 연료 공급을 위해 자주 물위로 떠올라야 했지만, 원자력잠수함은 한번 장진된 핵연료로 오랜 기간 순항할 수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잠수함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원자력선은 건조 비용이 많이 들고 선원의 훈련이 어렵기 때문에 현재는 군용으로만 이용될 뿐 상업용이나 개인용으로는 쓰이지 않고 있다.

끝으로 날개가 달린 수중익선(水中翼船 hydrofoil)의 형태를 들 수 있다. 배는 물위를 움직일 때 만들어지는 파도와 배 뒤로 몰려드는 물결로 인한 마찰 때문에 속도를 내는 데 한계가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선체는 물위로 완전히 띄우고 단지 날개만 물속에 잠기게 하는 수중익선이 고안되었다.

수중날개는 비행기의 날개보다 훨씬 작은 대신 매우 튼튼하게 만들어지는데, 그 이유는 물의 밀도가 대기 밀도의 600배나 되어, 물속에서는 조그만 부양력만으로도 대기 중에서 비행기의 날개가 지니는 것과 같은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수중익선을 만들 때에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선체에는 경합금, 날개에는 티타늄이나 특수강을 사용한다. 수중익선은 일찍이 1898~1905년 이탈리아인 포를라니니에 의해 실용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수중익선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18년 벨과 볼드윈의 합작으로 제작된 수중익선이 시속 60km의 경이적인 속도를 기록하면서부터였다.

그뒤 1950년대에는 미국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물에 완전히 잠기는 수중익의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배의 운항속도가 더욱 향상되었다.

선박의 정비와 수송방법

과거 배의 규모가 작았을 때에는 승무원이 정비와 수리를 모두 맡고 있었으나 차츰 규모가 커지고 정교해짐에 따라 전문적인 정비소를 찾는 일이 불가피해졌다.

정비소는 선거(船渠), 즉 독(dock)과 대형 기중기 등의 설비를 갖추고 있으며, 배는 18~36개월에 한번씩 독에 보내져 배밑을 청소하고 도색하게 된다. 정비는 전문 정비소에서 행하는 것 이외에 배에서 직접 선원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때가 있다. 최근 이와 같은 현장정비를 하는 데에는 모듈식 정비, 즉 부품을 하나하나 수리해서 다시 쓰는 것이 아니라, 해당 부문 전체를 새 부품으로 교체하는 새로운 정비방식이 급속히 확산되어가고 있으며, 선박 건조과정에서도 모듈식 정비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화물수송의 형태는 정해진 항로를 정규적으로 왕복하는 정기선 운행방식과, 계약에 따라 항로와 취급화물이 각기 다른 부정기선으로 나뉜다.

소하물과 우편물을 나르는 데에는 정기선이 적합한 데 반해 대량 화물은 부정기선을 이용하는 것이 화주에게 유리한데, 그 이유는 운임을 입찰에 부쳐 보다 싸게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정기선 회사는 출발지와 종착지 및 중간기착 항구에 지사를 두어 운영하며, 부정기선은 일반적으로 중개인을 통해 용선계약을 맺는다.

현재 국제적인 용선 중개는 런던에 본부를 둔 발트거래소(Baltic Exchange)에서 가장 많이 담당하고 있다.

한편, 선주들은 국가별 혹은 지역별로 선주협회를 조직해 활동하는데, 국제선주기구로는 국제선박위원회(International Chamber of Shipping)와 국제해운연맹(International Shipping Federation) 등이 있다.

국제해양법

각 나라의 해상 운송은 자국의 다양한 법규에 의해 통제를 받을 뿐만 아니라, 화물이 수송되는 상대방 국가의 법률은 물론 여러 가지 국제법의 적용도 받는다(→ 해상법). 1889년에 제정된 '해상충돌방지에 관한 국제규약'(1889)은 선박의 항행규칙을 비롯해 등이나 신호의 사용법 등을 정하고 있으며, 1912년의 '해상에서의 생명안전에 관한 국제협약'은 선박의 구조, 방수, 구명장비, 방화장비, 무선시설, 위험화물의 취급 등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다(→ 국제해상충돌방지규약, 국제해상인명안전협약).

이밖에도 선박과 승무원, 승객의 안전에 관한 국제규약에 따라 국제유빙(流氷)감시대가 설치되고, 국제만재흘수선협정(1930) 등이 체결되기도 했다.

무역부문의 국제법규로는 1921년 브뤼셀에서 제정된 '헤이그 규칙'이 대표적인데, 이 원칙은 화주와 선주의 책임 소재 및 권리에 관한 사항을 담고 있다.

공기 쿠션 장치

호버크라프트라는 이름으로 보다 잘 알려져 있다. 이 탈것의 개념은 일찍이 1870년대 소니크로프트 경에 의해 구상되었으나 오랫동안 이와 관련한 기술발전이 미진한 상태로 머물다가 1950년대초 영국의 코커렐에 의해 호버크라프트의 실용화가 실현되었다.

호버크라프트는 운행중에 차량 내부에 물방울과 소금기가 들어가기 때문에 정비 부담이 매우 크다는 것이 개발을 지연시킨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현재 호버크라프트는 해협 횡단 등과 같은 5~40km의 단거리 여객수송에 주로 사용되고 있으며, 1970년대초부터 시작된 영국해협 횡단 운항이 상업적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정규 여객수송 이외에는 일반 차량이 다닐 수 없는 사막이나 습지에서의 교통, 고위도지방의 자원탐사 등에 동원되고 있다. 군사상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예가 가장 많아, 상륙작전시의 병력수송이나 습지의 순찰 및 작전용 등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공기 쿠션 방식은 아직도 기술적으로 개선의 여지가 많고 경제성이 입증된 것도 아니어서 미래의 위상은 불확실한 상태이다.

현대의 항공교통

기구와 비행선(1783~1900)

인류는 오랜 옛날부터 하늘을 나는 꿈을 키워왔지만 비행의 핵심적인 이론, 즉 공기도 움직이는 물질이라는 점을 깨닫기까지는 매우 오랜 세월이 흘렀다.

1643년 수은기압계가 발명되면서, 공기는 무게를 가졌을 뿐 아니라 온도와 기압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이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공기보다 가벼운 물질을 이용해서 날으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783년 7월 남부 프랑스의 몽골피에 형제가 직경 10.7m 기구에 더운 연기를 채워 2.4km 가량 날려보내는 데 성공했으며(→ 조제프 몽골피에, 에티엔 몽골피에), 그해 8월 샤를이 수소 가스 기구를 띄우는 데 성공한 뒤 11월에는 필라트르와 아를랑데가 인간으로서는 최초로 기구를 타고 16km를 비행했다.

한편 수소 가스가 폭발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었다. 1937년 힌덴부르크 비행선의 폭발참사가 있은 후 비로소 수소 가스는 더이상 기구나 비행선에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1783년 1년동안 프랑스에서 행해졌던 일련의 기구비행 실험은 다른 여러 나라에 자극을 주어, 이후 50여 년간 영국에서만 무려 800회 이상 기구를 띄우는 시도가 행해졌다.

또한 기구는 군사적으로도 이용가치가 있어 1793년 프랑스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기구부대가 구성되었고, 1861~65년 미국의 남북전쟁에서도 정찰용 기구가 사용되었다.

한편 기구는 자체 추진력이 없어 바람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비행선을 다시 구상하기 시작했다. 비행선 개발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된 부분은 가볍고도 성능이 좋은 동력장치를 고안해내는 일이었다.

1852년 파리에서는 지파르가 증기기관을 장착한 비행선을 만들어 매우 짧은 거리였지만 공중을 나는 데 성공을 거두었고, 1884년에는 르나르와 크레프스가 비행선을 타고 23분의 비행기록을 세웠다.

비행기의 초기 발달과정

1500년경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날개 모양의 날으는 장치와 오늘날의 헬리콥터와 비슷한 물체를 도안한 적이 있었지만,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를 이용한 비행이 실제로 성공한 것은 이보다 300여 년이 더 지난 뒤였다(→ 중항공기). 1800년대초 영국 항공술의 창시자로 불리는 케일리 경은 글라이더 비행에 성공하고, 사람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물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기체역학이론을 수립했다.

19세기 후반에는 비행기 기관 실험이 수없이 행해졌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단지 독일의 릴리언탈과 미국의 처누트 등에 의한 글라이더 실험으로 비행기의 조종술 분야에서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19세기말에 이르면 여러 가지 기술과 지식의 축적에 힘입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기다려왔던 가벼운 내연기관의 개발이 마침내 가능하게 되었다.

연료로 쓰일 석유가 발견되고, 화학의 발달로 정유작업이 가능해졌다. 금속기술 또한 고강도의 강철과 알루미늄을 생산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전기에 관한 이론이나 공작기계기술도 정교한 항공기 기관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발전되었다.

1901년 오스트리아의 크레스는 3개의 날개가 직렬로 배열된 비행기를 만들었는데, 그 비행기는 이륙하자마자 곧 추락했다. 그러나 최초로 가솔린 기관을 사용했고, 동체에 얇은 철판을 사용했다는 점 등은 항공기 발달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국의 랭글리(1834~1906)는 기체역학에 관해 체계적인 연구를 전개한 저명한 학자로, 스미소니언 연구소에서 풍동(風洞)을 만들어 각종 실험을 하면서 가볍고 출력이 큰 가솔린 기관 개발에 힘썼다.

미국 오하이오의 라이트 형제는 동력기를 최초로 실용화한 인물들이다(→ 윌버 라이트, 오빌 라이트). 이들은 미리 비행술을 익히면서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비행기를 제작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곧바로 비행기 제작을 시도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1900~03년에 연과 글라이더 등으로 일련의 실험을 거친 라이트 형제는 마침내 1903년 12월에는 자신들이 제작한 비행기로 이륙해 12초간 체공하다가 무사히 착륙했다(→ 플라이어 1호). 이는 인간이 비행기를 조종해 하늘을 난 최초의 일이다.

한편 라이트 형제의 경쟁자였던 커티스는 벨이 조직한 비행실험협회(1907)에 가입하고 우수한 비행기 제작에 힘써, 1909년에는 그가 직접 만든 '골드버그'호를 타고 시속 56km의 속력으로 39.5km를 비행하기에 이르렀다.

커티스는 비행정의 개발에도 참가해 1911년에는 배 위에서 비행기를 이륙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오늘날 항공모함의 개념을 도입하고 전세계 항공계에서 손꼽히는 인물이 되었다.

1900~14년

20세기초는 항공기술의 개화기였다.

1908년 라이트 형제가 자신들의 비행기를 프랑스에 가져와 비행한 것이 자극이 되어, 유럽에서도 새로운 기록들이 수립되기 시작했다. 1909년 영국해협의 횡단 비행이 시도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상금을 건 각종 비행대회가 연이어 개최되었다. 이들 비행 경주나 공중 서커스 대회 등은 수많은 비행기와 인명을 앗아갔지만, 그 대신 기관과 기체는 크게 개선되었고 비행고도 역시 수천km 상공으로 높아졌으며, 체공시간도 몇 시간에 이를 정도로 늘어나게 되었다.

한편 수직이착륙이 가능한 비행기로 헬리콥터의 개발이 시도되었다.

1904년 르나르의 무인 헬리콥터 실험을 거쳐 1907년에는 코르뉘에 의해 비록 몇 초에 불과하지만 수직이륙에 성공했고, 1910년 미국에서는 시코르스키가 무인 헬리콥터 제작에 성공했다.

1910년대에는 기구비행이 일종의 운동경기로 간주되어 여러 가지 국제경기가 열렸으나, 비행기 개발의 그늘에 가려 있다가 1930년대에 고공관측과 연구에 기구의 중요성이 인정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1900년 이전의 비행선은 골조가 없는 풍선만으로 만들어지다가 1900~20년 사이에 골조를 갖춘 형태로 대체되었고, 1930년대에는 다시 골조를 가벼운 물체로 감싼 체플린형 비행선이 널리 사용되었다.

낙하산의 개념은 오랜 옛날부터 발달되었고 무인 낙하산의 실험도 여러 차례 있었으나, 사람이 직접 낙하산을 탄 것은 1797년 파리에서 가르너링이 기구 밑에 우산 모양의 낙하산을 매달아 900m를 낙하했을 때가 최초였다.

20세기초에는 기구비행이 운동경기로 행해지던 것과 더불어 낙하산도 흥미거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 비로소 인명구조용으로 낙하산의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축제나 게임에서 행해지던 비행의 역할은 막을 내리고, 이제 비행기는 정찰과 폭격이라는 전혀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당시 각국의 광적인 개발 경쟁은 수십년이 걸렸을 기술발전을 단 몇 년으로 단축시켰다. 또한 비행기는 동일한 모형이 대량생산되는 체제로 바뀌고, 조종사 양성기관도 발달되었다. 독일은 체공시간이 긴 전투기를 제작하는 데 앞서 장거리폭격용 체플린급 비행선과 대형 폭격기를 개발해냈으며, 프랑스는 전투기 분야를 비롯해 항공사진촬영과 무선교신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한편 영국은 독일이나 프랑스에 비해 항공분야가 낙후된 상태에서 참전했으나 해군용 항공분야에서 우위를 다져 전후에는 주도적으로 항공모함 개발의 기틀을 마련했다.

1920년대

제1차 세계대전 종전후 1920년대 중반까지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기술의 진전이 없었다.

그 이유는 우선 비행기가 다시 축제와 게임용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과 더불어, 전쟁중에 생산된 비행기의 재고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0년대말부터 항공계에서는 새로운 진보가 시작되었다. 1926년 미국에는 구겐하임 재단이 설립되어 항공학분야의 교육 및 연구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1940년대 이래의 항공발달과 우주탐험의 성과 가운데 상당한 정도가 구겐하임 재단이 지원한 연구나 이 재단 산하 학교 졸업생들에 의해 이룩된 것이었다.

유럽에서도 항공부문에 대한 정부의 연구 지원이 활발해졌다. 영국에서는 1912년부터 왕립항공기제작소(Royal Aircraft Factory)가 개발사업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프랑스에도 항공연구소(Institute Aerotechnique)가 세워졌으며, 독일정부 역시 여러 대학과 기술학교에 지원활동을 벌였다.

항공산업이 확장됨에 따라 이에 대한 규제의 필요성도 커져, 1925년경부터는 나라별로 필요한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1926년 항공통상법이 제정되었고,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지에서는 내각에 항공 업무를 관장하는 부서를 두었다.

1920년대에는 대서양과 북극 횡단비행에 관심이 모아지면서 각종 비행 신기록이 수립되었다. 이 시기에는 또한 비행선이 쇠퇴기를 맞이하는 반면, 헬리콥터 부문에서는 1923년 스페인 기술자 시에르바에 의해 회전날개를 축에 다는 방법이 고안됨으로써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1920년대 중반까지 전천후 비행을 도울 만한 장비로는 초보적인 수준의 라디오와 표시등 정도에 그쳤기 때문에 이착륙은 전적으로 조종사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구겐하임 재단은 미육군 항공단의 협조를 얻어 새로운 계기를 개발해 1929년에는 완전계기비행에 성공했다.

1918년 클라크대학교의 고더드 교수는 어깨에 메고 발사하는 방식의 로켓을 개발했다(→ 로켓모터). 당시의 소련과 독일도 로켓의 연구개발에 주력해 1929년에는 글라이더 후미에 로켓을 달아 발진시키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종전후에는 또한 글라이더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 조종사의 훈련, 기체역학, 비행기 신소재 실험 등에 널리 쓰이게 되었고, 1920년 뢴 산맥에서 사상 첫 글라이더 경기가 개최된 이후 글라이더 경기는 여러 나라에서 자주 행해졌다(→ 제트 추진).

민간항공 부문에서는 1912년 그라프폰체펄린의 비행선에서 돈을 받고 사람을 태운 것이 상업적 항공교통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종전후 항공교통은 급속히 발달되어 1920년 무렵에는 유럽의 주요 도시간에 많은 정기 항공노선이 개설되었다. 또한 1920년대에는 유럽 각국에서 국적기(國籍機)를 가지려는 시도가 전개되어 임피리얼항공사(BOAC와 BEA의 전신), 에어프랑스, 카엘엠(Royal Dutch Airlines), 루프트한자, 스위스에어, 알라리투리아 등 여러 항공사가 설립되었다. 비행기도 제1차 세계대전 때의 군용 폭격기를 개조해서 사용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보다 안락한 민간용 항공기가 개발되었다.

미국에서는 먼저 항공우편제도가 발달되고 난 뒤 1927년에야 비로소 뉴욕-보스턴 노선 취항을 시발로 여객수송 활동이 시작되었다.

1930~45년

1930년대초에는 미국과 유럽을 모두 합해도 승객수가 연간 수천명에 불과하고 사고율은 800만 승객 마일당 1명에 달했었으나, 10여 년 후에는 승객수가 수백만 명으로 늘어나는 동시에 사고율도 1억마일당 1명 수준으로 크게 개선되었다.

이와 같이 급속한 발달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비행기와 서비스의 개선에 힘입은 결과였다. 비행기의 동체는 유선형으로, 날개는 단엽으로 바뀌었으며, 소재는 모두 금속을 사용하고 공냉식 기관을 장착하게 되었다. 또 바퀴는 이륙 후에 동체 속으로 들어가도록 개조되었고 비행기 내부에도 단열·방음 처리를 해 쾌적성을 높였다.

자가용 항공기도 크게 늘어나고 비행단체도 많이 등장해, 1939년 미국에서만도 조종사 면허를 가진 사람이 3만 명을 넘어섰다.

군사부문에서도 항공기의 역할은 점차 확대되었다. 공군이 지상군이나 해군으로부터 분리·독립되었으며 전투중 대규모 폭격기 편대로 상대방 영토 깊숙이 출격하는 전략, 공정대의 사용과 보급물자의 공중투하, 항공모함에 의한 전투기의 행동반경과 공격능력 향상 등 여러 가지 주요 전략개념이 개발되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연구개발은 대부분 군사적 목적을 가진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1928년 영국의 휘틀이 가스터빈 원리를 발표한 데 이어, 1939년 독일에서는 최초로 제트 비행기가 실용화되었다. 로켓 부문에서도 선두를 달린 독일은 1942년 A-4형 로켓을 시험발사한 뒤, 이를 다시 V-2로 개선해 1944년과 1945년 영국본토 공격에 사용했다.

1945년 이후

종전후 우선 민간부문에서는 1949~59년 사이에 제트 기관이 보급되기 시작해 대부분의 여객기와 수송기에서 프로펠러가 사라졌다.

1954년에는 4발기관을 장착한 보잉 707 제트 여객기가 첫 시험을 거친 뒤 1958년부터 상용화되었고, 이밖에도 보잉 720, 콘베어 880, DC-8, 보잉 727, 트리덴트, 카라벳, 보잉 737, DC-9 등을 비롯해, 소련의 Tu-104, Tu-114 제트여객기 등이 개발되었다. 1970년부터는 대형 제트기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보잉 747은 무게 32만 7,300kg, 길이 56.4m로서 365~490명의 승객을 실어나를 수 있는 거대한 규모였다.

고속 비행기도 개발되어 197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합작품인 콩코르드와 소련의 Tu-144가 선보였는데, 2가지 기종 모두 마하 2급의 초음속 여객기로서 1970년대말부터는 대서양 횡단노선에서 상용화되었다.

자가용비행기의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6~15인용의 소형 제트기도 다수 개발되었다.

비행거리가 짧고 지방공항의 규모가 작은 유럽에서는 단거리이착륙비행기(short take off and landing/STOL)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캐나다의 더해빌런드, 영국의 브리튼노먼, 독일의 도르니에, 스위스의 필라투스포터 등 다양한 10~20인승 비행기가 개발되었다.헬리콥터도 여러 기종이 개발되었는데, 민간용으로 가장 널리 보급된 유형은 2~4인승으로서 기동성과 유연성이 뛰어나 농약살포, 경찰이나 소방서의 지원활동, 환자수송, 사진촬영, 통근자 수송 등 다양한 분야에 쓰이고 있다.

한편, 군사부문에서는 1960년경에 이르러 대부분의 군용기가 제트기로 교체되었고, 초음속 전투기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비행속도가 늘어남에 따라 비행기의 기능은 조종사의 능력을 벗어나는 수준이 되어, 자동화 전자장비의 필요성이 점점 더 절실하게 되었다. 기체의 구조에도 변화가 시도되어, 날개는 뒤로 비스듬히 뻗치는 모양을 하게 되고 삼각익의 형태도 등장했다. 해리어 기와 같은 수직이착륙기나 폭격기의 공중급유장치 등도 전후에 이루어진 주목할 만한 발전이었다. 현대전은 정보전의 성격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위해 정찰과 첩보용 비행기도 여러 종이 개발되었다.

1950년대말 U-2 고공정찰기, SR-71 장거리 고속정찰기 등이 출현한 데 이어, 1960년대에는 첩보위성이 등장했다.

공항의 구조와 운영

비행기의 이착륙장과 부대시설이 모여 있는 장소 가운데 일반적으로 규모가 크고 연중 항공교통량이 많은 곳을 공항(airport)이라 하며, 이에 비해 규모가 작고 시설이 빈약하며 교통량도 비교적 적은 곳은 비행장(airfield)이라고 구별해서 부른다.

요즈음에도 전세계적으로는 규모가 작은 잔디 활주로, 간단한 터미널, 관제탑 정도의 시설만을 갖춘 비행장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한편, 각지의 주요 공항에서는 비행기가 대형화되고 교통량이 늘어남에 따라 그 시설도 보다 대형화·다양화되고 있다. 현재 공항의 시설은 크게 나누어 공항유지·관리시설, 여객·화물터미널, 활주로 및 유도로와 비행기 계류장, 항공기정비와 화물관리 및 보급에 관련된 용역시설 등의 4개 시설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항의 입지를 결정하는 데에는 활주로건설에 적절한 지형여건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며, 이밖에 공항주변의 다른 토지이용과 상충되는 점은 없는지, 공항에로의 교통은 편리한지 등도 중요한 입지결정요인으로 꼽힌다.

또한 요즈음 항공 교통량은 거의 매 4~5년마다 배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기 때문에 일단 공항을 건설한 후에도 공항을 더 확장시킬 여지를 남겨야 한다는 점도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입지요건의 하나이다. 최근에는 비행기 소음문제 때문에 대규모 공항일수록 번잡한 시가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입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공항과 도시간 통행 부담을 늘리고, 공항과 연결되는 주요도로에 교통체증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공항과 도심지간의 교통문제의 해결은 공해문제와 더불어 대부분의 대규모 공항이 안고 있는 과제이다. 공항은 많은 수의 비행기를 적절히 배치해 승객과 화물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공항의 구조에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수지형 또는 부두형 공항은 1960~70년대에 많이 건설된 유형으로서 중간 규모의 공항에 적합한데, 승객이 탑승하기까지의 동선이 길다는 단점이 있다. 둘째, 단위 터미널형의 공항은 여러 개의 소단위 공항으로 나누어진 구조로서, 승객의 동선이 짧고 필요에 따라 공항의 면적을 쉽게 확장시킬 수 있어 대형 제트기를 수용하기에 적합하다. 셋째, 기본적인 구조가 단위 터미널형과 비슷한 선형공항의 형태가 있으며, 마지막으로는 터미널과 비행기 사이를 라운지가 이동하면서 승객을 실어나르는 이동 라운지형 공항이 있다.

이동 라운지를 이용할 경우 계류장 공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반면, 라운지 이동에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결함이 있다.

근래에는 항공 교통량이 대폭 늘어남에 따라 공항에서의 비행기 체류시간을 최소화해야 할 뿐 아니라 공항을 확장해야 할 필요성도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에 선형공항 구조를 채택하는 예가 점차 늘고 있다.

현대의 교통관제

도로교통
교통
교통

교통체증은 오랜 옛날부터 인간사회의 문제로 존재해왔다.

1세기경 로마의 줄리어스 시저는 낮시간에 수레 통행을 금지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 교통체증의 근본적인 원인은 도시계획의 결여로 인해 시내교통이 일부 지점에 집중되도록 짜여진 도로망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에는 차량 수의 급증으로 세계 어느 도시에서나 심각한 교통문제를 겪고 있다.

승용차는 교통체증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 대중교통수단의 기반을 잠식하며 나아가 도시의 토지이용에도 영향을 끼친다. 또 승용차는 기동력을 높여 도시가 교외지역까지 필요이상으로 확장되어 응집력을 잃고 관리상의 어려움을 초래한다. 뿐만 아니라 자동차는 매년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며 소음과 대기오염을 일으킨다.

차량과 운전자를 통제하기 위해 운전자는 연령, 차량의 종류, 보험 등으로 규제하고 차량 역시 등록, 점검 등의 절차를 이용해 관리한다.

차량 운행방법에 대해서도 일방통행, 특정방향으로의 회전금지, 속도제한 등의 규제가 널리 실시되고 있는데, 일방통행이나 회전금지 규정은 도로의 수용능력을 높이고 차량통행을 순조롭게 해준다. 주차에 관해서도 일정한 구역을 주차장소로 지정하거나 아니면 주차금지구역을 설정하기도 하며 주차시간을 제한하는 방식을 이용해 규제하기도 한다.

교통규제를 알리는 대표적인 수단으로는 도로표지가 이용된다.

도로표지가 잘 발달된 유럽에서는 글자 대신 부호를 사용해 언어장벽을 극복함으로써 도로표지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도로표지는 통행자의 관심을 쉽게 끄는 동시에 내용을 빨리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며 차량통행에 지장을 주지 않는 장소에 세워야 한다. 도로표지는 그 내용에 따라 '출입금지' 등과 같은 금지형, '정지' 등과 같은 규제형, '노면이 미끄러움' 등의 경고형, '주차장' 등과 같은 유도형의 4가지로 구분된다.

교통신호등에는 적색·황색·녹색이 이용되며, 신호 간격을 일정하게 고정시키는 방법과 현지 교통상황에 따라 간격을 바꿀 수 있도록 하는 2가지 방식이 모두 쓰이는데, 대부분의 나라가 전자의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최근에는 컴퓨터와 도로면 감지기를 활용한 전자유도체계, 자동경로탐지체계 등 새로운 교통관제 기법이 개발되었다(→ 통신 시스템).

철도교통

철도가 등장한 초기에는 각 노선의 주요 지점에 신호수(信號手)를 배치해 낮에는 신호기를, 밤에는 등을 손으로 조작하는 방법으로 신호를 전달했다(→ 시그널, 수기신호). 뒤이어 전보를 이용해 각 역에 열차의 주행상황을 전달하는 체계로 진전되었고, 19세기 중반에는 기계신호기가 도입되어 원거리 관제소에서 철선을 통해 신호기를 조작하는 방식으로 표준화되었다.

이 기계신호기는 신호판의 각도에 따라 열차의 정지·주의·정상주행 등의 내용을 알리는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오늘날에는 색채등을 이용하는 통신법도 널리 쓰이고 있다.

현재는 교통관제 전과정을 차츰 자동화하는 방식이 추진되고 있는데, 그 한 예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고속통근용철도(Bay Area Rapid Transit/BART)와 같이 도시의 전철에 무인운행체제를 도입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자동화 추세는 여객수송뿐만 아니라 화물수송, 철도노선의 순찰, 시설보호 등의 목적으로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항공교통

항공교통의 발달 초기에는 비행이 조종사 개인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하였으며, 판단의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무선교신이 가능해져서 조종사는 비행위치를, 지상에서는 기상정보와 비행지시를 서로 알릴 수 있게 되었다(→ 항공교통관제).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항공관제 부문에서는 여러 가지 기술의 진보가 이루어졌는데, 야간폭격에서 유래한 '비행중 관제 및 표준전파 접근법'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전후에는 비행기 충돌을 예방하기 위한 여러 가지 관제방법을 비롯해 시계가 불량할 때 이용할 수 있는 계기를 이용한 비행 착륙방법 등이 고안되었다.

국제적으로는 국제민간항공기구가 구성되어 통관시설, 교통관제, 항공기정비, 표준화 등의 문제를 담당하고 있으며, 영어가 항공관제를 위한 국제공용어로 채택되어 있다.

항공관제에서는 하늘을 상층·중층·하층·통제공간의 4구역으로 구분한다. 통제공간은 공항주변의 하늘과 활주로 유도공간을 말하는데, 상층공간은 고도 7,500m 이상의 고공으로서 조종사가 임의로 비행노선을 택해도 무방한 지역이다. 중층공간은 관제탑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구역이며, 하층공간은 고도 1,500m 이하의 부분을 가리킨다.

모든 항공기는 비행중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지상이나 해상에서 관측될 수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규정되어 있다.

수상교통

수상교통에서는 일찍부터 항해중인 선박들 사이에, 또는 선박과 육지 사이에 소리나 신호를 이용해서 서로 교신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개발되어왔다(→ 커뮤니케이션). 교신용 수단으로는 주로 깃발·신호기·나팔·종·호루라기·사이렌·등불 등이 쓰이는데, 등불 또는 탐조등은 모스 방식으로 교신을 하고, 깃발이나 신호기도 표준화되어 있는 교신방법을 이용해 신호를 주고받는다.

사이렌이나 종은 시계(視界)가 선명하지 못한 상황에서 경보를 발할 때 쓰인다.

또한 선박의 건조과정에서 지켜야 할 규칙들이 제정되어 배를 만들 때에는 구명장비, 방수·방화벽, 항행보조장비 등을 올바르게 갖추도록 하고 있으며, 이들 규칙이 잘 지켜지고 있는가를 사찰하기 위해 영국의 로이즈선급협회, 미국 해운국, 이탈리아의 선급협회, 독일 게르만로이드, 프랑스 선급협회 등의 여러 기구가 설치되었다.

최근 해상오염이 날로 심각해짐에 따라 이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도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쓰레기를 그냥 버리지 않고 중간 처리하는 일, 대기오염을 줄이는 일, 원유나 폐유에 의한 오염을 방지하는 일 등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며, 국제연합 산하의 국제해사기구(International Maritime Organization/IMO)가 이를 관장하고 있다.

한국의 교통

조선시대 육상교통

한반도의 과거 통치자들은 교통로를 관리하면서 지방 주민들의 생활편의보다는 정치적·군사적 기능에 치중해, 육로는 주로 통신로로 이용하고 화물수송은 수로에 의존하는 정책을 폈다.

따라서 육상 교통시설은 전반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머물렀다. 뿐만 아니라 산지가 많은 지형 조건은 도로 건설에 적합하지 않아, 넓은 평야와 건조한 기후를 가진 서부 아시아에서처럼 수레 문명이 발달되기는 어려웠다. 육로에서 사람들은 탈것을 이용하는 대신 걸어다녔고, 화물도 동물을 이용하기보다는 사람이 직접 밀고 끄는 손수레로 운반했으며, 동물을 부리는 경우에도 수레를 끌게 하는 것이 아니라 등에 길마를 지우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길마나 손수레 이외의 수송도구로는 사람이 지는 지게가 널리 쓰였고, 일부 지방에서는 소를 이용해 서양의 썰매와 비슷한 '발구'를 끌게 하기도 했다.

한국의 육상교통망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 소지왕(炤知王) 9년(AD 488)에 우역(郵驛)을 세우고 관로(官路)를 닦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미 7세기 이전부터 전국적인 교통 통신 체계가 수립되어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역제도가 정비되어 전국에 22개의 역도(驛道)와 525개의 역이 설치되고 역에는 토지와 역민이 배정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역참제도(驛站制度)가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서울을 중심으로 해서 의주로(義州路)·경흥로(慶興路)·평해로(平海路)·동래로(東來路)·제주로(濟州路)·강화로의 6대 간선도로를 비롯한 전국적 도로망이 발달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에는 군사 통신을 전담하는 파발제(擺撥制)가 신설되어 서울-의주를 잇는 서발(西撥), 서울-경흥 간의 북발(北撥), 서울-동래 간의 남발(南撥) 등 3방향의 파발로가 이용되었다.

주요 도로의 주변에는 약 30리마다 역과 참을 두었는데, 역은 국가의 기본적인 교통·통신 거점으로서 행정 통신과 공물(貢物) 수송을 담당했고, 은 공무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역의 보조기관 역할을 했다.

조정에서 설립한 참이나 관(館) 이외에도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사설 숙식제공 시설인 (院)이 크게 발달되었다. 원은 대부분 절에서 설치·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원이 국영화되었다.

가장 번성한 시기에는 전국에 1,200여 개의 원이 분포한 때도 있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 나라에서 경영하는 원은 점차 쇠퇴하고,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주막·객주(客主) 등과 같은 사설 여관 시설들로 대체되었다.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는 인구와 물산이 중부와 남부지방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로망이나 역·원 등의 부대시설들도 대부분 중부 이남에 분포했다. 조선말 갑오개혁 이후로는 역제와 파발제가 폐지되면서 우체사와 철도국이 그 기능을 대신하기 시작했고, 옛 도로망은 점차 일본이 닦은 신작로로 대체되었다.

조선시대 수상교통

나라의 화물수송은 육로보다 뱃길을 이용하는 조운(漕運)에 더 크게 의존했다.

조운은 세금으로 수납한 곡식을 조창(漕倉)에 모은 다음 국가가 관리하는 선박에 실어 뱃길을 통해 서울로 운반하는 체제였다. 내륙 수로는 민간의 화물수송에도 긴요하게 이용되어, 소금과 해산물은 강을 거슬러 중상류지방으로 전달되고, 목재를 비롯한 내륙의 생산품은 강을 따라 하류지역으로 수송되었다. 강 바닥이 얕은 곳에서는 준설작업으로 간이 운하 형태의 '뱃골'을 만들어 상류부에 가항수로를 늘렸다.

배가 닿는 포구에는 부정기 시장인 '갯벌장'이 세워졌으며, 큰 마을로 발전되는 경우도 많았다.

내륙 수로는 여러 가지 산물의 수송뿐만 아니라 사람의 왕래에도 도움을 주어, 하천유역을 따라 자연스럽게 하나의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내륙 수운은 중부 이남의 4대 하천인 한강·금강·영산강·낙동강과 예성강 등을 중심으로 발달되었으나, 북부지방에서는 하천의 이용이 많지 않았다.

바다에서는 고려시대에 예성강-대동강-등주(登州)-산동(山東)을 잇는 북방 해로가 송(宋)과의 무역에 이용되다가, 고려 후기 남송(南宋) 시절에는 예성강-흑산도-양자강의 남방 해로가 무역로의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초까지도 남방 해로는 계속 이용되었으나, 조선 후기 중국의 수도가 북경으로 옮겨지면서부터는 대(對) 중국 교역이 육로 위주로 전환되었다. 일본과는 일찍이 조선초부터 동래 부산포, 웅천 내이포, 울산 염포의 삼포(三浦)에서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에 이르는 해로를 통해 연결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해금(海禁) 정책으로 인해 해상교통이 크게 번성하지 못했으나, 19세기 후반 부산(1876)·원산(1880)·인천(1883)의 3개항이 개항되면서 수상교통은 해운 중심의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20세기의 교통 발달과정

한말 이래 1945년 해방까지의 20세기 전반부는 한국의 전통적인 교통체계가 일제의 교통체계로 개편되는 시기였다(일제강점기). 일제는 철도망을 구축하고 신작로를 닦고 항만 건설사업을 벌여, 1930년대 중반 무렵에는 육상·수상 교통망이 새로운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신설되는 교통로와 항구의 입지는 일제의 교통 수요에 맞추어 결정되었다. 따라서 철도와 신작로는 옛 길을 비껴가는 경우가 많았고 새 도로의 교차점과 개항장이 교통의 요지로 등장하는 등, 전국의 도시 및 교통 체계에 상당한 변화가 초래되었다. 1940~50년대의 20여 년은 교통 부문의 정체기였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말 이래로 일제는 전쟁에 몰입했고, 해방 이후에는 6·25전쟁으로 더욱 피폐한 상황이 이어져 교통 부문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교통량도 많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20세기말까지 한국의 교통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960년대초부터 정부는 사회 기반시설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교통 부문에도 대대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또한 1960년대 이래로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국내외의 물자수송 수요가 급증했을 뿐 아니라, 인구 증가와 소득 증대에 따른 생활양식의 변화도 교통 수요를 늘리는 요인으로 작용했고, 첨단기술의 발달은 교통 부문의 빠른 성장을 뒷받침해주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요인이 어우러져 1960~90년의 30여 년 간 교통시설 및 교통량은 놀라운 증가추세를 나타냈다.

이 기간 동안 특히 도로와 항만 부문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장이 이루어졌다. 전국의 도로 연장은 2배 이상 확장되고 도로포장률은 5%에 불과하던 것이 73% 수준으로 크게 개선되었으며, 항만의 하역 능력도 30년 만에 25배 이상 증대되었다. 교통량의 측면에서도 지난 30년간의 변화는 엄청나다.

국내 여객수송량은 1961년에 비해 20배 이상 증가했고, 국제 항공 여객수송에서도 1961년 출입국 승객수가 3만여 명에 불과하던 것이 1990년대 초반에는 1,000만 명을 상회하는 급격한 성장이 이루어졌다. 경제성장은 국내외 물동량의 증가로 이어져, 1961~90년 사이 국내 화물수송량과 국제 화물수송량이 각각 17배, 60배씩 늘어났다.

20세기 후반의 변화는 단순히 교통시설과 절대적인 교통량의 증가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우선 고속도로와 같은 자동차 전용 도로망이 구축되고 광양항 등의 대규모 항구가 여러 지역에 신설됨에 따라, 전국적으로 사람과 물자의 이동 양상이 달라졌다. 또한 자동차의 증가와 지하철의 등장으로 도시 내의 교통 유형이 크게 변화되어 통행 거리가 길어지고 통행 빈도가 증가했으며 도시 구조까지도 새로운 교통 노선에 맞추어 변모했다.

그밖에 각 교통수단별 수송 분담 구조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1960년경 국내 교통사정이 취약하던 시절에는 철도가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기능해, 여객수송은 철도와 도로 부문이 각각 절반씩 나누어 맡았으나, 화물수송은 90% 가량을 철도가 전담했다. 당시 항공과 해운의 국내 수송 분담률은 여객수송이나 화물수송 모두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도로 및 해운 부문에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진 결과, 30여년이 지난 1990년에 이르자 국내 여객수송 분담률에서는 도로 부문이, 화물수송에서는 해운 부문이 각각 제 1위를 차지하고 철도는 2위로 밀려나게 되었다.

항공 부문 또한 1990년 국내 여객수가 1,000만 명을 넘어서면서 수송 분담률이 3% 수준으로 높아졌고, 항공 화물수송량도 급증하고 있다.

현재 교통업무에 직접 관련된 중앙 행정기관으로는 교통 부문 전반을 관장하고 도로의 건설 및 유지를 담당하는 건설교통부, 도로교통에 관한 법규의 시행과 단속을 담당하는 내무부 등이 있고, 외청으로는 철도청과 해운항만청이 각각 철도와 해운·항만 행정을 맡고 있다.

또한 수도권의 교통정보를 다루는 교통방송국이 설립되어 있다.

현대의 도로교통

한국에서 자동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03년 고종 황제가 승용차를 이용하면서부터였지만, 본격적인 자동차 교통시대가 열린 것은 1960년대 이후였다.

일제시대는 철도교통 위주였고,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면서부터는 휘발유 부족으로 자동차 이용이 극히 제한되어, 1945년 해방 당시 차량 수는 남북한을 합해 7,300여 대에 불과했다. 해방 후에도 잇따른 전쟁과 경제침체로 1950년대까지 자동차 보급은 보잘것없는 수준에 머물러, 1961년 남한의 자동차는 3만여 대뿐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는 국내 자동차산업의 발달에 힘입어 1971년 14만 대, 1981년 57만여 대로 자동차 수가 꾸준히 증가했다.

1980년대는 한국의 자동차 생산 및 보급에 획기적인 시기였다. 한국은 세계적인 자동차 생산국의 하나로 발돋움했고 국내 자동차 보유대수도 1996년 6월 현재 무려 900만 대를 넘어섰다. 특히 승용차 이용이 크게 확산되어,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승용차 수가 다른 차종의 차량수를 훨씬 능가하고 있다.

이처럼 놀라운 수준의 자동차 보급 추세는 또 한편으로 교통혼잡·사고·오염문제 등 바라지 않던 일들까지 동시에 야기시키고 있다. 전국의 차량 가운데 약 1/3이 서울에, 또 1/5이 인천과 경기도에 등록되어 있어, 전체 차량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몰려 있다. 이밖에도 부산·대구·광주·대전 등 4대 도시의 차량까지 합하면 수도권 및 광역시급 대도시의 차량수가 전체의 3/4이나 되어, 수도권과 대도시에서는 교통문제가 극도로 심각한 현실이다.

한국의 도로는 고속국도·일반국도·특별시도·지방도·시도·군도의 6가지 종류로 구분되어 있다.

고속국도·일반국도·지방도는 전국의 주요지점들을 연결하는 기간도로망으로서 주로 중·장거리 교통에 이용된다. 특별시도는 특별시와 광역시의 도로를 지칭하고 시도·군도는 각각 시와 군의 하위도로를 말하는데, 이들은 모두 시내 교통을 담당한다. 자동차는 국내 여객교통의 약 2/3 가량을 분담하는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화물수송의 분담률은 아직 철도와 선박의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그 비중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자동차를 이용한 중·장거리 여객용 교통수단으로는 시외버스와 고속버스가 가장 대표적인데, 이들은 모두 민간업체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특히 지역주민의 발이 되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온 시외 버스는 운행방식에 따라 주요거점만을 연결하는 직행버스와 모든 정류장을 연결하는 일반버스로 다시 구분된다. 도로가 개선되고 주민들의 이동이 증가함에 따라 이제는 시외 버스의 운행 범위도 광역화되어, 2개 도(道) 이상을 경유하는 노선이 매우 많아졌다.

시외 버스 가운데 그 노선의 전구간 또는 대부분이 고속도로를 경유하는 것은 특별히 고속버스로 분류한다.

고속버스는 1968년말 서울-인천 간 고속국도가 개통되면서 이듬해인 1969년 봄 최초로 운행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전국의 모든 고속도로에 버스 노선이 제공되고 있다. 고속버스 노선은 기점과 종점 사이를 직행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고속도로 연변의 정류장마다 정차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현재 고속버스 노선은 서울과 전국 각 지방도시를 잘 연결하고 있으나, 실제로 지방·도시 간을 연결하는 노선은 매우 적다.

화물수송 체계는 3가지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첫째, 교통부가 대부분 도(道) 단위로 지정하는 사업구역 내에서 1t 이상 화물차를 이용하는 '일반구역 화물자동차 사업', 둘째, 전국을 사업구역으로 운영하는 '전국 화물자동차 운송사업', 셋째, 1t 미만의 '용달 화물자동차 사업' 등으로 구분된다. 이밖에 냉장·냉동차, 현금 및 귀금속 운송, 중기 운송 등의 특수운송사업도 행해지고 있다. 차량수로는 일반구역 화물차가 가장 많아 전체 화물차량의 3/4을 차지하며, 용달차의 수도 약 20%에 달하는데 주로 도시 내의 소화물 배달을 맡고 있다. 전국화물자동차 운송은 대부분 정기화물 수송을 담당하는데, 근래에는 컨테이너 등의 대형화물 수송이 늘고 있다.

현대의 철도교통

1899년 9월 경인선의 노량진-제물포 구간이 개통된 것이 한국 철도의 출발이었지만, 실질적인 철도운수업은 이듬해인 1900년 7월 한강철교의 완공으로 지금의 서울역(남대문 앞)까지 노선이 연장되면서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1905년 경부선(서울-부산)이 개통되고, 1906년 경의선(서울-신의주), 1914년 호남선(대전-목포)과 경원선(서울-원산)이 각각 완성됨으로써 1910년대까지는 철도망의 X자형 기본 골격이 마련되었다. 이어서 1929년 충북선(조치원-충주), 1931년 장항선(천안-장항), 1936년 전라선(이리-여수), 1939년 경춘선(서울-춘천) 등이 추가되어 일제 말기에는 지금과 같은 철도망의 틀이 갖추어졌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일부 노선이 신설되기는 했지만, 노선의 증가보다는 전철화·복선화를 비롯한 기술적인 면의 개선이 철도사업의 중심을 이루었다.

1960년대 들어 태백산지의 자원개발을 위해 산업철도가 부설되었고, 1963년과 1968년에는 서울 근교를 순환하는 교외선과 진주-순천 간의 경전선도 각각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1970년대에는 도시의 발달과 물동량 증가에 대처하기 위해, 중앙선을 비롯한 태백산지의 산업철도 노선들과 서울 주변의 수도권 구간들을 대부분 전철화하고, 이를 서울의 지하철 노선과도 연결해 수도권의 광역 전철망을 구성했으며, 호남선 등 여러 노선이 단선에서 복선 또는 복복선으로 개선되었다.

1972년에는 경제성이 취약한 수려선(수원-여주)이, 1980년에는 진삼선(진주-삼천포)이 각각 폐선되었다.

2004년 4월 1일에는 고속철도가 개통되었다. 프랑스 테제베(TGV) 시스템의 차량을 도입하여 경부선과 호남선이 동시에 개통되었는데, 최대 운행 속도는 300km/h이고 서울-부산간은 2시간 40분, 서울-목포간은 2시간 58분이 소요된다. 이에 따라 철도여객의 수송능력이 증가했으며, 기존 철도의 화물수송능력도 증가했다.

또한 서울에서 지방 대도시로 당일 장거리 출장×여행이 가능해졌고, 서울로 출퇴근 할 수 있는 지역도 확대되었다.

과거 일본은 자신들의 식민정책상 사설 철도를 권장해, 충북선·장항선·수려선·수인선(수원-남인천)·경춘선·삼척선(북평-삼척) 등 전국 각지에 사설 철도가 많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들은 8·15해방 이후 이 사설 철도들이 모두 국유화되어, 지금은 철도청이 전국의 철도시설을 모두 관할하고 있다.

현재 운영중인 철도 노선의 총연장은 약 3,100km에 달하며, 강원지방을 지나는 노선들은 화물수송 기능이 강하고, 경부선·호남선 등 여타 노선들은 여객수송 위주로 이용되고 있다. 20세기 중반까지는 철도가 국내 교통의 주역이었지만, 이후 도로 및 항만 설비가 확충되고 자동차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철도의 비중은 많이 줄어들었다.

현대의 도시교통
교통
교통

과거 한국의 도시는 대부분 규모가 작았고 사람들은 거의 걸어서 이동했다.

탈것으로는 남여·평교자·가마 등이 있었으며, 조선 말기부터는 인력거와 자전거도 선보였으나 그다지 많이 이용되지는 않았다. 일제시대에도 도로가 개선되고 1920년대말에는 버스까지 등장했으나, 실제로 이같은 교통수단이 운행된 것은 일부 대도시였을 뿐, 대부분의 도시는 여전히 도보 도시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동차 교통시대로 전환되었는데, 교통이 점차 편리해짐에 따라 도시는 크게 확장되고 도시외곽에는 위성도시나 도시 통근자들의 마을이 형성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도시는 대부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어 자동차시대 이전에 형성된 곳이 많기 때문에, 길이 좁고 구불구불하며 도로율과 주차공간도 충분하지 못하다. 근래 자동차의 보급은 이와 같은 도시의 도로망에도 영향을 미쳐 자동차시대에 적합한 도로 체계로 재편되고 있다.

대다수의 도시에서는 버스·택시 및 자가용 승용차가 주요 교통수단으로 운행되고 있으며, 이밖에 일부에서는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사용하기도 한다.버스는 도시교통량의 약 절반 가량을 담당하는 가장 핵심적인 대중교통수단이며, 나머지 절반의 교통량을 택시와 자가용 승용차 등이 분담하고 있다.

택시는 원래 '1회 자가용 승용차'로서 고급 교통수단에 속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의 도시에서 택시의 수송분담률이 15~25% 수준에 달해 마치 준(準)대중교통수단처럼 이용되고 있다.

또 하나의 도시 교통수단으로는 궤도차가 많이 이용되었다. 과거 서울·부산·평양의 3개 도시에서는 전차가 운행되었는데, 1899년 서울의 서대문과 청량리 간에 전차가 운행된 것이 도시 궤도차의 효시였다. 이후 1930년대 중반까지 서울의 전차 노선은 거듭 확장되어 남쪽으로는 노량진, 서쪽으로는 마포와 독립문, 동쪽으로는 청량리까지의 광범위한 규모의 전차노선망이 완성되었다.

따라서 20세기 전반기에는 사실상 전차가 유일한 대중교통수단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8·15해방 이후에는 점차 버스 교통에 밀려나, 1968년말 전차는 운행이 중단되고 궤도선도 철거되었다. 부산에서는 1915년 초량-부산진 구간에 최초로 전차 운행이 시작된 뒤, 동래 및 부산 시내까지 노선이 확장되어 부산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교통 업무를 수행하다가, 서울의 전차와 마찬가지로 1960년 철거되었다.

평양의 전차는 부산보다 다소 늦은 1923년에 운행을 시작했고, 1930년대 중반까지 평양역-사동에 이르도록 확장되었었다.

20세기 후반 우리나라의 대도시에서는 전차 대신 지하철을 이용한 새로운 형태의 궤도차 시대가 시작되었다. 서울 지하철은 1974년 1호선의 청량리-서울역 구간이 개통된 데 이어 2호선(1984)·3호선(1985)·4호선(1985) 등 여러 노선이 추가되었으며, 이들 노선이 다시 수도권 전철망과 연계되어 하루에 수백만 명을 실어나르는 핵심적인 교통수단으로 자리잡았다.

부산에서도 1985년 1호선이 부분적으로 개통되면서 지하철시대가 시작되었다. 현재 서울과 부산에서는 급증하는 교통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기존의 지하철 노선을 계속 연장하고 있어, 2000년대에는 지하철의 여객수송 분담률이 50% 까지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1980년대말부터는 다른 여러 도시에서도 지하철 건설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해, 1991년 대구의 지하철이 착공된 데 이어 광주·인천·대전 등 광역시급 대도시로 확산되고 있다.

궤도차는 도시 공간의 발달 방향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과거 전차시대에는 전차 노선을 따라 시가지가 길게 확장되어나갔으며, 오늘날에도 도시 전철과 지하철로 인해 역 주변의 토지 이용이 변화되고 노선을 따라 교외지역에는 위성도시의 발달이 촉진되고 있다.

현재 도시의 주요 교통수단 가운데 시내버스와 택시 운행은 사기업이 담당하고 있으며, 지하철은 공사(公社)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현대의 수상교통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로 부산·인천·원산이 차례로 개항되면서 수상교통은 조선시대의 내륙수운이나 연안수송으로부터 외국과의 해운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수상교통의 거점 또한 개항장 중심으로 재편성되기 시작했으며, 선박은 목선에서 기선으로 대체되었다. 뒤이어 일제 통치하에서는 1915년 원산과 블라디보스토크 사이에, 1917년 진남포와 다롄[大連] 간에 연이어 국제항로가 개설되었으며, 1922년부터는 원산-부산 간 직통항로 등 국내 장거리 항로도 개설되었다. 이들 항로를 통해 1930년대 후반에는 국내외 해운이 크게 성했다.

항만시설은 부산·인천·원산에 그치지 않고 진남포·신의주·청진·성진·군산·목포·마산에서도 새롭게 축항 공사가 실시되었다.

이들 항구도시에는 일본인을 위한 신시가지가 조성되어 재래 도시와는 뚜렷이 형태가 구분되는 도시구역이 등장했다. 지금도 마산·군산 등지에서는 이러한 과거 일본식 시가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해운 부문 역시 다른 교통 부문과 마찬가지로 1960년대 이래 괄목할 만한 성장을 경험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항만시설 투자가 꾸준히 이루어져 하역능력이 크게 증대되었고, 새로운 공업항(工業港)도 많이 신설되었다. 외국선이 출입할 수 있는 1종 지정항으로는 인천·목포·군산·장항·여수·제주·통영·삼천포·마산·진해·장승포·부산·울산·포항·묵호·속초·서귀포·옥포·동해·광양·삼척·완도·고정·고현·평택항 등이 있는데, 특히 부산·광양·포항·인천항은 그 규모가 매우 크며, 동해·울산·마산·군산항도 하역능력이 큰 항구로 손꼽힌다.

또한 산업기지에 위치한 포항·창원·북평·온산·평택·옥포·광양·여수항 등은 공업항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근래에는 각종 전용선이 증가하는 추세를 반영해 부산·광양·마산·울산항에 컨테이너 전용 부두가 만들어졌고, 전국의 유수 항구에 석탄·고철 등을 다루는 여러 가지 전용부두가 마련되었다.

국내 여객선 항로 가운데에는 부산·제주·목포·여수·포항·울릉도 등 남해와 동해의 주요 항구를 연결하는 노선에 교통량이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연안 항로는 전반적으로 영세한 편이며, 여러 외딴 섬에는 정부가 재정을 보조하는 낙도 보조항로가 개설되어 있다. 국제 여객 수송은 부산-시모노세키[下關], 인천-웨이하이[威海] 등의 노선에 취항한 정기여객선이 담당하고 있다.

내륙수운은 20세기 중반까지 다소나마 명맥을 유지했으나, 20세기 후반에는 철도 및 도로교통과의 경쟁에서 밀려 급격히 쇠퇴했다.

뿐만 아니라 큰 강의 중·상류에는 수력발전용 댐이 건설되어 뱃길이 막히고 하구에도 둑이 만들어져 바다와의 연결마저 단절됨에 따라 강을 이용한 교통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지금은 소양호, 충주호, 한강 하류 등지에서만 국지적으로 관광선이 왕래하고 있을 뿐이다.

현대의 항공교통

1928년 서울 여의도와 경상남도 울산에 비행장이 착공되고 1929년 봄 도쿄[東京]-울산-다롄[大連]을 연결하는 우편·화물수송 항로가 개통됨으로써 한국에서 항공교통시대가 시작되었다.

1930년 그 노선이 서울까지 연장되고 운항편수도 늘어나면서 항공운송이 본격화되었다. 국내 항공교통은 국제선보다 늦은 1936년 서울-이리 노선 개통으로 운항을 시작한 뒤, 1938년에는 광주까지 연장되었다. 8·15해방 이후에는 1948년 대한국민항공사(KNA)가 민영으로 설립되어 국내외 노선을 운항했는데, 이 항공사가 1962년 국영화되면서 대한항공회사(KAL)로 개편되었다가 1968년 다시 민영화되었다.

1988년에는 아시아나항공사(AAR)가 세워져, 오랫동안 계속된 대한항공의 독점체제에서 벗어나 경쟁시대로 돌입했다.

국내 항공노선은 서울(김포)·부산(김해)·제주·대구·진주(사천)·여수·광주·목포·포항·울산·예천·강릉·속초 등 전국의 주요 도시와 관광지를 연결하고 있으며, 특히 서울·제주·부산을 연결하는 노선이 가장 교통량이 많다. 이밖에 제주·추자도·거제도·홍도 등 작은 섬이나 관광지에는 부정기 노선이 마련되어 있다.

국제노선에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외에도 일본, 미국, 동남 아시아, 유럽 각국의 항공사가 취항하고 있으며, 근래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한국에 취항하는 외국 항공사의 수는 날로 늘어가고 있다. 현재 국제공항으로는 김포·김해·제주공항이 있으며, 늘어나는 항공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영종도와 청주에 국제공항을 건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