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제

역제

다른 표기 언어 驛制

요약 전근대시대의 국가권력을 중앙정부와 지방에 효율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설치한 교통통신조직의 일종.

목차

접기
  1. 중국의 역제
  2. 일본의 역제
  3. 한국의 역제

우역이라고도 한다. 역제는 국가의 동맥으로서 군사·외교적 측면만이 아니라 교통·행정적 측면에서도 중앙집권국가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특히 역제는 근대 교통제도인 철도·도로·선박 등이 출현하기 이전의 전통사회를 유지·발전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역제는 중국 및 일본의 것과 상호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중국의 역제

중국에서는 역제를 흔히 역전(驛傳)이라고 불렀다.

역전제도는 대체로 (周)나라 때부터 비롯되었다고 본다. 주나라에서는 왕실과 지방 제후 간의 봉건적 권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긴밀한 통신조직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서주시대(西周時代)에는 수레[用車]와 도보(徒步)에 의한 전거제도(傳遽制道), 그리고 사신 접대를 위한 관사제도(館舍制道)를 두고 평시통신과 군사통신체제로 나누어 운영했다.

그후 춘추전국시대에는 관사(館舍 또는 傳舍)와 우(郵)·거(遽) 제도를 실시했고, 진(秦)·한(漢)대에 이르러 정(亭)·우·역·전 등의 다양한 교통제도가 실시되었다.

역의 명칭은 나라 무제시대를 전후하여 최초로 나타나는데, 소식을 전달하는 통신기관으로 30리(里)마다 1개 역을 설치하고 마기(馬騎), 즉 말[馬]을 사용하여 전달했다. 우가 도보로서 전달하는 것과는 방법상의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진한시대의 교통조직은 수(隋)·당(唐)의 통일을 거치면서 점차 통합·일원화되었다.

의 역제는 우와 역 및 관사로 조직된 역전제도를 발전시켰다.

당나라에서는 한대의 우·역의 기능을 통합하여 30리마다 1개의 역을 설치했다. 그래서 이후부터 우역 또는 관역이라고 불렀다. 역의 조직은 주로 육로에 설치된 육역과 강변에 있던 수역으로 편성되어 육역 1,297개, 수역 260개, 수륙겸역(水陸兼驛) 86개 등 총 1,643개의 역을 설치하여 병조(兵曹)·절도사(節度使)·현령(縣令)의 관할을 받도록 했다. 육역에는 역마를, 수역에는 역선(驛船)을 배치하여 운송수단으로 삼았다.

대(宋代)에 이르러서는 보체(保遞)·마체(馬遞)·급각체(急脚遞)로 구성된 체포제도(遞鋪制道)로 발전했다.

이와 같은 체포는 중앙의 병부(兵部)와 추밀원(樞密院), 각 지방의 장관에 의해 통제되었으며, 10~25리를 간격으로 1개의 체포를 설치했다. 체포에는 군졸(軍卒)로써 체부(遞夫)로 삼아 포병(鋪兵)이라 하고 중요한 요로(要路)에는 10~12명씩, 벽로(僻路)에는 4~5명씩 배치하여 전송업무를 맡게 했다.

한편 중국의 역제는 원대(元代)에 이르러 가장 크게 발전했다.

의 역제는 참적(站赤)과 급체포(急遞鋪)로 조직되었다. 참적은 태종대에 설치된 것으로 역의 기능을 수행했으며, 급체포는 세조대에 설치되어 우의 역할을 수행했다. 참적에는 육참(陸站)과 수참(水站)이 있었는데, 육참의 교통수단으로 말·소·나귀, 수레와 가마 및 도보가 있었으며 수참에는 배가 배치되었다. 원대의 참적조직은 육참 1,095개, 수참 424개 등 총 1,519개의 참적으로 편성되었으며, 말이 4만 4,293필(匹), 소 8,583두(頭), 나귀 6,007두, 수레 3,967냥, 배 5,921척(隻), 가마 378승(乘), 개 3,000척이 배치되어 전국적인 역로망을 형성했다.

급체포는 송대에 성립된 이후 원대에 크게 발달했다. 급체포는 역참과 병행되어 설치되므로써 문서전송의 역할을 수행한 통신조직의 하나가 되었다. 특히 1260년에 설치된 이후 1270년(세조 7) 상서성에서 급체포제도를 제정함으로써 제도적인 틀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대(明代)에 이르러 역제는 회동관(會同館)·수마역(水馬驛)·급체포·체운소(遞運所)로 조직되었다. 명 태조는 1368년 역참설치에 대한 조칙을 반포했으며, 또 1393년에는 〈응합급역조례 應合給驛條例〉를 반포하여 역참의 명칭개정, 난징[南京] 중심의 역로개설, 역민의 부역감면 등을 시행함으로써 역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회동관은 재경역참으로 난징과 베이징[北京]에 설치했는데,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대사(大使) 1명, 부사(副使) 1명, 관부(館夫) 400명을 배치하여 업무를 맡게 했다. 수마역은 원의 참적을 재편한 경외의 역참으로서, 마역은 60~80리 간격으로 요충지에 설치하고 중요한 역로에는 역마 30~80필씩 배정하고 그렇지 않은 곳은 5~20필씩 배정하여 사객전송과 군사정보를 전달했으며, 수역은 10~20척 또는 5~7척의 배를 배치하고 10여 명의 선부(船夫) 또는 수부(水夫)를 두었다.

명대의 수마역은 〈명회전 明會典〉을 따르면 모두 1,298개였다.

급체포도 송대의 보참(步站)을 계승하여 매 10리마다 1포(鋪)를 설치하고 포사(鋪司) 1명, 포병(鋪兵) 4~10명을 배치했는데, 통상 주야 300리를 달려 주로 공문서를 전송했다. 그러나 명대 중기 이후 역참으로 흡수되었다. 체운소는 육로와 수로에 설치하여 육체운소와 수체운소로 구분되었으며, 육로에는 대거(大車)·소거(小車)와 인부(人夫) 및 소를 두어 물자를 운송했고, 수로에는 홍선(紅船)과 선부 10~13명을 두어 사람과 물자를 실어날랐다.

그러나 명대 중기 이후 급체포나 체운소는 역참에 흡수·통합되었다.

한편 명나라는 중앙에 병부 직속의 거가사(車駕司)를 두고 회동관 및 전국의 수마역·체운소·급체포를 관리했으며, 또한 마패에 해당하는 감합이나 화패(火牌) 발급, 우역 전장(典章)의 제정, 역의 치폐, 역의 감독 검사 등의 업무를 맡았다.

지방에는 포정사(布政使)와 안찰사(按察使)의 지휘 아래 지방 우역을 운영했다. 이처럼 명의 역제는 주로 국가 문서의 전달(傳宣政令)과 군사 정보의 전송(飛報軍情) 및 사신 영송과 접대(接待四方賓客)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淸)은 강희(康熙)·옹정(雍正)·건륭조(乾隆朝)에 이르러 명의 역제를 바탕으로 우역제도를 재정비했다. 중앙 병부 소속 거가청리사(車駕淸吏司)와 지방 안찰사의 감독 아래 역·참·당(塘)·대(台)·소(所)·포 등으로 조직되었다.

역을 각 성(省)의 중요지역에 설치하여 통신의 전송과 사신의 영송을 담당하도록 하고 관물을 운송하게 했다. 또 역과의 사이에는 요역(腰驛), 각 현(縣)에는 현체(縣遞)를 설립했다. 참은 군보소(軍報所)에 설치하여 북로와 남로로 조직했으며, 당은 가산곡관구 밖에 설치되었는데 군당(軍塘)과 영당(營塘)으로 나뉘며, 소는 체운소, 포는 지방 주현에 포사(鋪司)를 두고 15리마다 1포를 설치했는데, 급체포의 성격을 띠었다. 청대의 참·당·대는 특히 중국의 내지(內地)와 변강(邊疆) 지구를 연결하기 위해 설치한 특수한 교통통신조직으로 변경의 군사정보 및 순라·정찰·운수기능을 담당했다고 생각된다.

역에 복역하는 역호는 그 역할에 따라 마부(馬夫)·수의(獸醫)·역조(驛皂)·역선수수(驛船水手) 등으로 다양하게 나누어지나 통칭하여 역부(驛夫)라 한다.

역부는 대로에 100~200명 또는 70~80명이 배치되었고, 소로에는 20~30명이 배치되었으며 총역부수는 7만 4,859명 정도였다. 역의 운송수단인 역마는 말·나귀·노새·소 등 모두 5만 3,392필이었고 수역에는 참선(站船)·도선(渡船) 등의 역선이 배치되었다. 역의 재정은 초기에는 차역제(差役制)에 의거하여 일반 농민으로부터 징수했으나, 후기에는 모용제(募用制)에 의거하여 지량세(地粮稅)를 징수하여 역도고(驛道庫)라는 창고에 수납하여 지출했다.

청대의 역로는 황화역(皇華驛) - 퉁저우[通州]- 산하이관[山海關]- 성경역(盛京驛) - 지린 성[吉林省] 성오납참(城烏拉站) - 헤이룽 강[黑龍江] - 둥베이 3성[東北三省]에 이르는 동로(東路)와 황화역 - 러허[熱河] - 몽골참[蒙古站]에 이르는 동북로(東北路), 황화역 - 두스커우[獨石口]- 몽골참- 투무역[土木驛] 북쪽, 장자커우[張家口]- 몽골참 - 투무역 서북쪽에 이르는 북로(北路), 황화역- 탁주 줘루역[涿鹿驛]- 산둥 성[山東省]- 안후이[安徽]- 장시[江西]- 광둥[廣東]에 이르는 산둥중로[山東中路], 산둥성 - 저장[浙江]- 푸젠[福建]에 이르는 산둥동로[山東東路]의 남로(南路) 등으로 조직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역참은 1,970개, 급체포(소) 1만 3,935개, 포병은 4만 4,643명이다.

이와 같은 청대 역제의 특징은 ① 우와 역의 조직이 단일화되어 교통과 통신제도가 일원화된 점, ② 변강의 소수 민족이 거주하는 지역까지 역참이 확대 설치된 점, ③ 통신의 효율화를 제고하고 역승을 폐지하여 각 지방 군현중심의 관리체제를 수립한 점, ④ 역참의 재정제도를 개혁하여 민역민차제(民驛民差制 : 差役制)에서 관양관응제(官養官應制 : 募用制)를 시행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청대의 말기에는 우정국(郵政局)을 설립하여 종래의 역참업무를 대신하게 했으며, 중화민국이 성립되고 나서 1914년에 이르러 결국 역참제가 폐지되었다. 그리하여 서양문물제도의 도입과 함께 윤선(輪船)·철도(鐵道)·전신(電信) 등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인 교통·통신제도가 비로소 발달하게 되었다.

일본의 역제

일본의 경우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시대에 '대도'(大道)를 설치하는 등 어느 정도 도로 교통이 발달된 것으로 추측되나, 제도적으로 역제가 정비된 것은 645년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이후 율령국가 시대부터였다.

646년(大和 2)에 '개신조'에 의거하여 지방 행정 및 군사시설의 설치와 함께 역마·전마(傳馬)등의 교통시설을 설비한 데서부터 구체화되었다. 그리하여 672년 진신[壬申]의 난을 거쳐 덴무[天武]-지토조[持統朝]의 아스카키요미하라 령[飛鳥淨御原令]과 몬무[文武] 덴노의 다이호[大寶] 율령에 의한 지배체제를 확립하면서 역제도 완성되었다.

율령국가시대의 역제 조직과 시설을 살펴보면, 역로는 도카이도[東海道]·도산도[東山道]·호쿠리쿠도[北陸道]·산인도[山陰道]·산요도[山陽道]·난카이도[南海道]·사이카이도[西海道]의 7도(道) 역로로 조직되었으며, 역의 간격은 30리이고, 총 역의 숫자는 400여 개(전장 약 6,400km)였다.

이 당시 역제는 역마와 전마로 편성되었는데, 역마는 도(都 : 수도)와 각 지방의 고쿠후[國府]를 연결했고 전마는 고쿠후와 군가(郡家 : 郡衙)를 연결하는 제도였다.

〈영의해 令義解〉 구목령(廐牧令) 제역치마조(諸驛置馬條)에 의하면, 대로(大路) 20필, 중로(中路) 10필, 소로(小路) 5필씩 역마를 배치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전국의 역마를 합하면 모두 3,487필이었다. 전마는 각 군(郡)마다 5필 기준으로 배치되었으나 전국 590여 군 중에서 전마가 실제 배치된 곳은 1/4정도였다.

역마의 확보는 역제의 경우 역의 재정[驛稻]으로써 시중에서 말을 구입하여 충원했으나, 전마는 목장에서 사육한 관마(官馬)를 동원했다. 그리고 그의 관리에 있어 역내의 경우 재산의 정도에 따라 인호(人戶)를 구분한 구등호제(九等戶制)에 의거 중중호(中中戶), 또는 삼등호제(三等戶制)하의 중호(中戶)가 관리했으며, 전마는 겸정(兼丁 : 국역 부담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는 부유한 가정에서 맡았다.

결국 역마는 역호에 의해서, 전마는 일반 민호(民戶)에 의해서 사육되었다.

역호는 지역과 역의 크기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으나, 대개 1역에 120~130명 정도 배치된 것 같다. 역의 재정은 역기전(驛起田)과 역기도(驛起稻)에 의존했다. 역기전은 역호의 요역노동에 의거하여 경영되었으며, 그 수확을 역기도에 이월하여 그 이자로써 소요경비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러한 재정구조도 739년(천평 11) 일반회계 상의 정세(正稅)에 병합됨으로써 마침내 740년에 폐지되었다.

한편 역의 관리는 중앙 병부성(兵部省) 산하의 병마사(兵馬司)가, 지방에서는 섭진직(攝津職)·태재부(太宰府)를 포함하여 고쿠시[國司]에서 맡았다.

역마나 전마는 공적임무를 띤 역사(驛使)나 전사(傳使)가 주로 이용했는데, 역사는 일상의 행정공문서를 전달했으며, 마패의 일종인 역령(驛鈴)과 전부(傳符)를 발급받아 1일 10개 역 이상 약 300여 리를 달렸다. 그러나 율령국가시대의 역제는 9세기 헤이안시대[平安時代] 이후 조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토지국유제의 붕괴, 장원의 발생에 따른 율령제도의 붕괴와 함께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중세시대에 이르러 체송(遞送)과 여숙(旅宿)의 2가지 기능 중 체송기능은 장원의 발달에 따라 소멸되었고, 숙박기능도 지방관 고쿠시의 관장 아래 관리들의 통행 편의를 제공하면서 영업적 여관의 성격으로 전환·변질되어 교통취락의 하나인 숙역(宿驛)제도로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는 가마쿠라[鎌倉]와 교토[京都]를 잇는 가마쿠라가도[鎌倉街道]와 숙역이 발달하게 되었고, 그 다음 교토를 장악한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는 영주제(領主制)의 발달에 따른 장원 연공물(年貢物)의 수송, 지방산업의 발달에 따른 마차(馬借)와 차차(車借)에 의한 교통조직이 발전되었으며, 센고쿠 시대[戰國時代]에는 다이묘[大名]들의 지원 아래 숙역과 전마제도(傳馬制道)가 다시 재정비되었다.

센고쿠 시대의 역제는 다이묘의 정치적·군사적 목적에 의해서 교통제도가 발전했다는 점에 그 특색이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근세 에도 시대[江戶時代]에 이르면, 바쿠한 체제[幕藩體制]의 형성과 유지를 위하여 센고쿠 다이묘[戰國大名]의 영국(領國) 중심의 교통체계로부터 에도[江戶]를 주축으로 오가도(五街道) 교통로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1635년에 산킨코타이제[參勤交代制]가 확립된 이후 200여 개의 다이묘들이 해마다 에도[江戶]와 영국(領國) 사이를 왕래하기 위하여 종래의 전마제도를 확충하고 숙역제도를 보다 더 충실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1659년 도카이도, 니카센도[中山道], 닛코 가도[日光街道], 오슈 가도[奧州街道], 고슈 가도[甲州街道] 등 5가도와 기타 가도가 설치되었으니 도카이도는 시나가와[品川]-모리구치[守口] 간 53숙(宿), 니카센도는 이타바시[板橋]-모리야마[守山] 간 67숙, 닛코 가도는 센주[千住]-하쓰이시[鉢石] 간 21숙, 오슈 가도는 시라사와[白澤]-시라카와[白川] 간 10숙, 고슈 가도는 가미 다카이도[上高井戶]-가미 스와[上諏訪] 간 44숙을 설치·조직했다.

한편 에도시대에는 숙역제도가 크게 발달했다.

숙역이란 바쿠후[幕府] 권력에 의한 봉건적 지배체제의 형성과정에서 정치적·군사적 요구에 따라 일정한 경제 발전을 전제로 하여 정비된 교통제도상의 기초단위이다. 이러한 숙역제도는 1635년 산킨코타이제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간토 영국[關東領國] 시대와 전국통일의 단계에 이르러 바쿠한 체제의 정비, 강화와 함께 확립되었다. 숙역의 인적 구성은 흔히 숙역인(宿役人)이라 하는데, 각 한[藩]에 따라 차이가 있다.

원칙적으로 도이야[問屋]·도시요리[年寄]를 가리키지만 지방의 촌역인(村役人)인 묘슈[名主]를 추가하여 숙3역(宿三役)이라고 한다.

또한 햐쿠쇼다이[百姓代]나 돈야바[問屋場]의 장부(帳付)·인마지(人馬指)를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숙역의 기능은 화객(貨客)에 대하여 인마(人馬)를 제공함으로써 수송하는 것인데, 이른바 어전마역(御傳馬役)이 그것이다. 그러나 숙역주민의 전마역 부담이 과중하고 신흥 상품유통 기구의 확립, 특히 해상교통이 발달하자 숙역의 재정 궁핍을 초래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보호정책에도 불구하고 숙역제는 여러 가지 모순과 폐단을 자아내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메이지 정부[明治政府]는 1868년 6월 개정사법서의 반포를 계기로 숙역의 도이야 역인[問屋役人] 등을 폐지하고 새로운 전마소취체역(傳馬所取締役)을 설치했으며, 그후 1870년에는 역법을 개정하여 취체역마저 폐지했다.

결국 1872년 도카이도 및 여러 가도에 설치한 전마소와 스케고[助鄕]를 폐지하고 우편마차회사 및 육운회사(陸運會社) 등을 설립함으로써 근대적인 철도·도로 교통체계로 발전되었다.

한국의 역제

우리나라의 역제는 현재 문헌기록상으로 볼 때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었다.

역제
역제

〈삼국사기〉 신라본기 487년(소지마립간 9) 3월조의 "사방으로 우역을 설치하고 유사들에게 명하여 도로를 수리하게 했다"고 한 기록에서 최초의 역제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668년(문무왕 8) 10월조에 "왕이 욕돌역(褥突驛)에 행차하니 국원경 사신인 대아찬 용장(龍長)이 사사로이 잔치를 베풀고 왕과 모든 시종을 접대하며 음악을 연주했다"라는 것과,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에 "압록 이북에서 이미 항복한 성(城)은 11개인데, 그 하나는 국내성으로서 평양으로 부터 17역을 지나 여기에 이른다"라고 한 사실에서 삼국시대에 광범위하게 역이 설치·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역은 군사 명령의 전달, 물품의 수송 등과 같은 통신 및 교통시설로 설치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역제가 전국적인 규모로 설치된 것은 고려시대였다.

고려의 역제는 신라 말기 이래 피폐된 역로의 시급한 복구와 지방행정구역의 재편을 통한 국가 통치체제의 확립과 함께 조직화되었다. 특히 지방행정구역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성종 때에 10도제(十道制)·12목(十二牧) 및 지방의 주·부·군·현제도의 확립과 더불어 관(館)·역(驛)·강(江)·포(浦)의 명칭을 개편했으며, 983년(성종 2) 6월에는 역의 크기에 따라 공수전(公須田)·관전(館田) 등의 역전(驛田)을 지급하여 역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런데 1018년(현종 9)에 대대적인 군현제 개편작업이 시행되면서 역제도 변화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문종대에 이르러 초기의 6과(六科)체제에서 점차 22역도(驛道)체제로 바뀌었고, 전국적으로 22역도와 525개의 역이 설치되었다. 고려의 역로(驛路) 조직은 〈고려사〉 병지(兵志)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산예도 10개역, 금교도(金郊道 : 개성-곡산) 16개역, 절령도 11개역, 흥교도(興郊道 : 영변-용강) 12개역, 흥화도(興化道 : 황주-안주) 29개역, 운중도(雲中道 : 평양-창성) 43개역, 도원도(桃源道 : 개성-회양) 21개역, 삭방도(朔方道 : 안변-간성) 42개역, 청교도(靑郊道 : 개성-양주) 15개역, 춘주도(春州道 : 춘천-횡성) 24개역, 평구도(平丘道 : 남경-영월) 30개역, 명주도(溟州道 : 강릉-울진) 28개역, 광주도(廣州道 : 광주-연풍) 15개역, 충청주도(忠淸州道 : 수원-해미) 34개역, 전공주도(全公州道 : 전주-회덕) 21개역, 승라주도(昇羅州道 : 나주-순천) 30개역, 산남도(山南道 : 전주-진주) 28개역, 남원도(南原道 : 남원-순천) 12개역, 경주도(慶州道 : 경주-평해) 23개역, 금주도(金州道 : 김해-양산) 31개역, 상주도(尙州道 : 상주-문경) 25개역, 경산부도(京山府道 : 성주-보은) 25개역 등이다.

고려시대에는 대개 30리(里)마다 1개 역을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역장 2~3명, 역정호 7~75명을 배치했으며, 초기의 역제인 6과체제에는 제도순관(諸道巡官)이, 그뒤에 시행된 22역도체제에는 공역서(供驛署)의 관할 아래 관역사(館驛使)가, 그리고 고려말에는 역승(驛丞)의 지휘·감독 아래 역운영을 했다.

그리고 공문서의 전송방식은 현령전송(懸鈴傳送)과 피각전송(皮角傳送)의 2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역제는 몽골의 간섭을 받으면서 몽골식 역참조직으로 개편되었다. 그에 따라 참(站)이라는 용어가 관(館)과 함께 역의 이름으로 통용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권문세가의 발호와 함께 그들에 의해서 유흥경제가 파행적으로 운영되었다. 이때 권문세가들은 자신의 개인물품을 강제로 역도를 통해 운반했는데, 이로 인해 역마의 남승과 그에 따른 역호의 조잔 현상이 야기되는 등 여러 가지 폐단이 나타났다.

결국 역로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자 위화도회군 이후 신흥사대부와 결탁한 무인세력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면서 대대적인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역제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면서도 4군 6진 등 북방역로의 신설과 역의 합병, 역의 원근(遠近)에 따른 역도의 재편, 합배(合排)의 설치 등을 통하여 독자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성종대의 〈경국대전〉 반포를 계기로 명실상부한 전국적인 역참 조직, 즉 41역도 500여 개의 역로망이 구성되었으며, 대부분 커다란 변동없이 구한말까지 존속되었다.

한편 조선 전기의 역제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그 기능이 거의 마비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 까닭은 말 값의 상승과 고역에 따른 역민(驛民)의 도망으로 역마(驛馬)를 확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역마의 남승과 역토지의 사유지화, 국가 기강의 해이로 인하여 역의 책임자인 찰방·역승 등의 작폐가 심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이후 역제의 복구문제가 계속 논의되었으며, 또 봉수제(烽燧制)가 군사통신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자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서 명(明)의 파발을 참고하여 마침내 군사 및 행정명령을 위주로 전송하는 파발제(擺撥制)를 성립시켰다.

1597년(선조 30)에 설치된 파발제는 기발(騎撥)은 20~25리 마다, 보발(步撥)은 30리 마다 1개의 발참(撥站)을 두어 전국에 모두 205개의 발참을 설치했다. 이러한 파발제는 서울-의주를 연결하는 서발(西撥), 서울-경흥을 연결하는 북발(北撥), 서울-동래를 연결하는 남발(南撥)의 3대로를 근간으로 하여 조직되었다. 파발의 조직은 전송방법에 따라 기발과 보발로 나뉘며, 지역에 따라 서발·북발·남발로 편성되었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기발은 말을 타고 전송하는데 25리마다 1개의 발참을 두어, 발장(撥長) 1명, 색리(色吏) 1명, 기발군(騎撥軍) 5명과 역마 5필을 배치했다.

보발은 도보로 전달하는데 30리마다 1개의 발참을 두고, 발장 1명과 보발군 2명을 배치했다. 이와 같이 조직된 파발제는 종래 역제가 담당한 기능 가운데 군사통신만을 주로 전달했으며, 1895년(고종 32) 근대적인 전화·전보통신 시설이 설치되기 전까지 군사통신수단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역에 소속되어 그의 역을 담당한 사람을 역민(驛民) 또는 역속(驛屬)이라 한다.

대개 역에는 찰방·역승의 감독 아래 역장·역리·역노비 등이 배치되었으며 각 참에는 참리·일수·급주인·마부가, 관에는 관군·일수·조역백성 등 다양한 역민이 배치되었다. 역승·찰방은 역도의 크기에 따라 종9품 또는 종6품의 문관으로써 1명씩 배정되었으며, 역장은 역리 중에서 2~3명을 뽑았으며, 역리는 역의 대소에 따라 그 정원이 정해졌으나 실질적으로 일정하지 않았다. 역노비는 급주노비(急走奴婢)와 전운노비(轉運奴婢)로 편성되어 역의 대소에 따라 상등역에 50명, 중등역에 40명, 하등역에 30명씩 배정되었다.

일수는 급사(給事) 역할을, 마부·관군은 역마보급에 관한 업무를 맡았으며, 급주인은 뜀박질하여 문서를 전달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민은 고역으로 인하여 도망하는 사례가 많아 역부근의 보충군(補充軍)이나 정군(正軍)·향호(鄕戶) 또는 일반 백성들을 차출하여 역민을 보충하는 조역(助役) 정책이나 봉족 등의 급보(給保) 정책을 통하여 확보하기도 했다.

한편 역마는 역의 주된 운송수단이기 때문에 그의 확보 문제가 중요시되었다.

역마는 용도에 따라 승마용 기마(騎馬)와 운반용 태마 또는 복마(卜馬)로 구분되고 크기에 따라 대마·중마·소마 또는 상등마·중등마·하등마로 구별하여 지급되었다. 역마의 관리는 찰방의 책임 아래 병방역리(兵房驛吏)가 담당했으며, 마적(馬籍)을 작성하고 말의 비척과 조련상태를 점고했다. 역마를 이용할 때에는 상서원에서 발급한 마패에 근거하여 〈경국대전〉 급마 규정에 따라 역마를 지급했다.

이러한 역마 지급은 고려 원종 때에 포마법(鋪馬法)의 제정과 함께 제도화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1410년(태종 10) 포마기발법(鋪馬起發法)과 마패법(馬牌法)을 실시하면서 점차 확립되었다.

그런데 역을 원만하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우선 역마의 확보가 마련되어야 했다. 조선 초기에는 역리·역졸 등의 역민에게 마위전(馬位田)을 지급하여 자체적으로 확보하거나 목장마 등 관마(官馬)를 지급했다. 그러나 교역확대에 따른 역호의 조잔, 역마 남승의 폐단 등으로 원래의 역호에 의한 역마 보충은 많은 제약이 따랐다. 이에 일반 민호에게도 마위전의 경작권을 주고 입마하게 하는 제도를 실시했는데, 이를 보호 마호입역(馬戶立役)이라 한다.

또한 역마의 부족시 민간인의 말을 사서 보충하는 쇄마고립(刷馬雇立)을 실시하기도 했다.

역의 관할에 있어 고려시대에는 병조 직속의 공역서(供驛署), 조선시대에는 승여사(乘輿司)가 관리했으며, 실제로는 각 역도별로 찰방역승을 두어 총괄했다. 역승·찰방의 기원은 고려 초기의 제도관(諸道官) 또는 역순관(驛巡官)에서 비롯되어 제도관역사(諸道館驛使)를 거쳐 고려말에는 역승(驛丞)이라 했고, 조선 초기에 각기 병행되어 존속되다가 1535년(중종 30)에 찰방으로 일원화되었다.

역승·찰방의 정원은 〈경국대전〉에 따르면 경기도·충청도·전라도에 각 3명씩, 경상도 찰방 5명, 역승 6명, 강원도 각 2명씩, 황해도 찰방 2명, 역승 1명, 영안도 찰방 3명, 평안도 찰방 2명이었다.

한편 역의 주요기능으로 ① 국가명령이나 공문서의 전달, ② 내외 사신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 ③ 관수 물자의 수송, ④ 내외인의 왕래 규찰 및 죄인 체포·압송, ⑤ 유사시 국토방위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변경의 급박한 군사정보나 외교문서 등의 전달은 그 완급에 따라 국익에 미치는 영향이 컸기 때문에 전달과 보안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이와 같은 공문서의 전달방식에는 가죽 부대에 문첩(文貼)을 넣어서 전달하는 현령전송(懸鈴傳送)과 피각전송(皮角傳送)이 있다. 현령전송은 일의 완급에 따라 3현령·2현령·1현령을 사용했으며, 피각전송은 완급에 따라 통과하는 역의 수를 달리했다.

우리나라의 역제는 중앙정부의 명령을 지방에 전달하거나 각 지방의 산물을 다른 지역으로 운반하는 교통·통신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며, 교통행정상의 요지에 역촌을 형성하여 지방도시가 발달하고 상품경제의 발달을 촉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