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

바이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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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 출신인 바이킹은 9~11세기에 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을 습격하고 약탈행동을 일삼아 식민지로 만들었다. 865년 잉글랜드를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했고, 윌리엄 1세 재위중 크누드 2세가 몇 차례 침공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것을 끝으로 사라졌다. 북유럽 서해에는 바이킹의 팽창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바이킹은 아일랜드를 자신들의 주도 아래 통합시키려 했으나, 1014년 무참한 패배를 당해 실패했다. 10세기 센 강변에 형성된 정착촌은 노르망디 공작령의 시초가 되었는데, 이는 샤를마뉴 제국 영토 안에 이룩한 바이킹의 유일한 업적이다.
바이킹의 동방 진출은 대서양 연안에서보다 덜 폭력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비잔틴 황제의 바랴크인 근위대로 복무하기도 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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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잉글랜드
  3. 북유럽의 서해와 아일랜드
  4. 카롤링거 제국과 프랑스
  5. 동유럽
바이킹
바이킹

개요

9~11세기에 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을 습격하고 식민지로 만들어 유럽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 출신인 이 이교도 전사들은 자국의 과잉인구 문제와 이방인들의 상대적 무력함 등 다양한 요인이 겹쳐 약탈행동을 더욱 일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잉글랜드

잉글랜드에서는 8세기말 이따금 바이킹의 약탈이 자행되다가 865년 랑나르 로드브로크의 아들들인 헤알프데네·인바에르·후바 등이 이끄는 군대가 고대왕국 이스트앵글리아와 노섬브리아를 정복하고 머시아 영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면서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웨식스를 다스리던 앨프레드 대왕은 계속 버티다가 878년 바이킹과 휴전협정을 맺었는데, 이는 886년경에 맺은 조약의 바탕이 되었다. 이 조약에 의해 잉글랜드는 대부분 데인족(族)의 수중에 있다는 것이 사실로 인정되었다. 앨프레드는 892~899년 다른 무리의 바이킹에게 심한 공격을 받았으나 마침내 그들을 무찔러 웨식스의 사기를 드높였다. 그 기세를 몰아 그의 아들 대(大)에드워드는 데인령(領) 잉글랜드를 재정복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옛 머시아와 이스트앵글리아 영토에 자리잡은 데인족의 소국(小國)들은 924년 에드워드가 죽기 전에 그에게 굴복했다. 더 멀리 있던 노섬브리아는 대체로 아일랜드에서 온 바이킹 지도자들의 지휘를 받아 좀더 오래 저항했으나, 마침내 954년 에드레드가 그곳의 스칸디나비아 세력을 분쇄했다. 그뒤 바이킹은 980년 잉글랜드를 다시 습격했고 잉글랜드는 결국 크누드 제국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1042년에 평화적으로 토착 왕조가 복원되었으며, 바이킹의 위협은 윌리엄 1세 재위중 크누드 2세가 몇 차례 침공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것을 끝으로 사라졌다.

북유럽의 서해와 아일랜드

북유럽의 서해에는 사실상 바이킹의 팽창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적어도 900년경부터 정착민들이 아이슬란드로 쏟아져 들어왔고, 그들은 아이슬란드 식민지에서 다시 그린란드로 옮겨가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북아메리카에도 정착을 시도했다. 같은 시기에 오크니·페로·셔틀랜드·헤브리디스 제도와 맨 섬 등지에도 정착촌들이 생겨났다. 바이킹이 아일랜드를 침략한 것은 795년 레크루 섬(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음) 약탈이 최초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래로 끊임없이 싸움이 벌어졌으며 토착민들도 지지만은 않았지만 점차 더블린·리머릭·워터퍼드 등지에 바이킹 왕국이 생겨났다.

특히 더블린의 바이킹 왕들은 한때 해외원정을 감행할 만큼 강한 세력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 중 몇몇은 10세기초 더블린과 노섬벌랜드를 동시에 통치하기도 했다. 바이킹은 아일랜드를 자신들의 주도 아래 통합시키려 했으나, 1014년 클론타프 전투에서 오크니 백작과 그밖에 아일랜드 토착민의 지원을 받았으면서도 무참한 패배를 당해 통합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12세기 잉글랜드인들이 아일랜드를 침공했을 때도 더블린·워터퍼드·리머릭·웩스퍼드·코크에는 여전히 바이킹(그리스도교도가 되기는 했음)이 지배적이었다.

카롤링거 제국프랑스

바이킹의 침공을 비교적 잘 막아냈던 대륙에서는 영국 제도에 세워진 것과 같은 대규모의 바이킹 식민지가 건설되지는 않았다.

대륙의 언어와 제도에 미친 영향도 노르망디를 빼고는 극히 미미한 정도에 그쳤으나 바이킹 시대가 끝날 때까지는 대륙도 가끔 습격을 받았다. 10세기 센 강변에 형성된 정착촌은 노르망디 공작령의 시초가 되었는데, 이는 샤를마뉴 제국 영토 안에 이룩한 바이킹의 유일하고도 영구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르만족). 프랑스보다 더 남쪽의 이베리아 반도와 지중해 연안에서도 이따금 바이킹의 습격이 있었으나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동유럽

바이킹의 동방 진출은 대서양 연안에서보다 덜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발트 해에서 수많은 약탈이 빈번하게 자행되었지만 사실상 이 지역의 바이킹 왕국은 무력으로 세운 것이 아니었다. 동방을 향한 바이킹의 최대 이동은 러시아의 심장부로 옮겨간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확실하게 침투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한때 노브고로트·키예프·러시아의 여러 중심도시들에서 바이킹이 지배적이기는 했지만 그들은 슬라브 주민 속에 빠르게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러시아인을 뜻하는 '루스'(Rus)라는 명칭 속에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루스는 무역상인임이 분명한데 〈러시아 원초 연대기 Primary Chronicle〉의 912, 945년 항목에는 그리스인과 체결한 그들의 통상조약 2가지가 기록되어 남아 있다. 여기 서명한 루스 사람들은 틀림없는 바이킹계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루스는 때때로 서방의 바이킹들처럼 약탈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그들이 별개의 민족으로 존재한 것은 길어야 1050년까지였다.

11세기 초반 바이킹은 동방을 향해 새로운 이동을 한 듯하다. 많은 스웨덴의 룬 문자 비석에는 윙바르와 함께 여행을 떠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 여행은 동방을 향한 것이었으나 정확한 방향과 목적에 대해서는 단지 전설적인 이야기만 남아 있을 뿐이다.

동방에서 바이킹이 벌인 또다른 활동으로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용병으로 복무한 것을 들 수 있는데, 비잔틴 황제의 바랴크인 근위대가 바로 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