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프레드

앨프레드

다른 표기 언어 Alfred 동의어 Aelfred, 앨프레드 대왕, Alfred the Great, Ælfred Micela
요약 테이블
출생 849
사망 899
국적 웨식스, 영국

요약 남서부 잉글랜드의 색슨족 왕국인 웨식스의 왕(871~899 재위).
Aelfred라고도 씀. 별칭은 앨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

앨프레드(Alfred)
앨프레드(Alfred)

잉글랜드가 데인족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막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 Anglo-Saxon Chronicle〉의 편찬은 그의 재위중인 890년경에 시작되었다(덴마크).

앨프레드가 태어났을 때 형이 4명이나 있었기 때문에 그가 왕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 스스로 자신은 전혀 왕권을 바란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평생 학자로 사는 것이 그에게는 만족스러운 삶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일찍부터 그에게 영시(英詩)에 대한 관심을 불어넣었으며 또한 소년시절부터 그는 라틴어 학문을 동경했는데 853, 855년의 로마 방문으로 자극받은 듯하다.

세기초에 학문을 부흥시킨 위대한 프랑크 왕 샤를마뉴에 대해서 알고 그를 찬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앨프레드는 생애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기가 바라던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는 같은 신분의 젊은이들이 보통 받는 군사학 교육을 받았던 것 같다. 그가 처음으로 적극적인 군사활동에 나선 것은 그와 그의 형인 애설레드(에설레드) 1세 왕이, 865년 이스트앵글리아에 상륙해 867년 노섬브리아를 점령한 데인족의 대군을 상대로 머시아(템스 강과 험버 강 사이에 있던 왕국)의 버그레드를 도우러 간 868년이었다.

데인족이 전쟁을 거부함에 따라 평화협정이 맺어졌다. 이해에 앨프레드는 외가 쪽으로 머시아 왕의 후손인 애얼스위스와 결혼했다. 871년말에 데인족은 웨식스를 침공했고 애설레드와 앨프레드는 그들과 몇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애설레드가 871년에 죽자 앨프레드가 그를 계승했다. 윌턴에서 성과 없는 전투를 치른 후 그는 평화협정을 맺었다.

5년 동안 데인족의 공격을 무산시킨 것은 웨스트색슨인의 저항적 기질 때문이었다.

876년에 데인족은 또다시 웨식스로 진격했다가 별 성과 없이 877년에 물러났으나 878년 1월에는 기습공격을 가해 거의 성공을 거둘 뻔했다. 데인족은 치퍼넘에 진을 쳤으며 웨스트색슨인은 '앨프레드 왕만 빼고' 모두 항복했다. 앨프레드는 서머싯 소택지의 한 요새를 근거로 데인족을 괴롭히면서 부활절 이후 7주가 지날 때까지 은밀하게 군대를 모아 에딩턴 전투에서 데인족을 격파했다.

결국 그들은 항복하고 그들의 왕인 구드룸은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앨프레드의 후원 아래 다음해에 이스트앵글리아에 정착했다.

웨식스는 다시는 그같은 위험을 겪지 않았다. 앨프레드는 한동안 전투를 중단했다가 885년 이스트앵글리아에 있던 데인족의 지원을 받아 켄트에 침입한 데인족 군대를 물리쳤다. 886년에 그는 공세를 벌여 런던을 점령했으며 이 전과를 계기로 데인족의 통치를 받지 않는 모든 잉글랜드인들이 그를 왕으로 인정했다.

런던을 점령함으로써 그의 아들의 치세중에 데인족의 영토를 재정복하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앨프레드 자신은 더이상 진군을 할 수 없었지만 그는 아마도 훗날의 진군을 위해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892년에 그는 대륙에서 온 대규모 데인족의 공격을 받아야 했고 그들이 전쟁을 포기한 896년까지 전투가 이어졌다. 데인족이 앨프레드를 상대로 더이상 진격하지 못한 것은 대체로 전쟁중에 그가 효과적인 방어조치를 취한 결과였다. 낡은 요새가 강화되고 전략지점에 새로운 요새가 건설되었으며 인원 보충을 위한 영구적인 방법이 마련되었다.

앨프레드는 육군을 재편하고 일찍이 875년부터 전함을 이용해 침략자들을 막았다. 나중에 그는 896년 이후까지도 계속 발생한 해안침략을 막는 데 쓰기 위해 자신이 직접 더 큰 배를 설계하여 건조하게 했다. 현명한 외교술 또한 앨프레드의 방어조치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머시아 및 웨일스와 우호관계를 지속했고 웨일스의 통치자들은 그의 지지를 얻고자 했으며 893년에는 그의 군대에 병력을 일부 제공하기도 했다.

앨프레드는 전쟁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현명한 행정가였던 그는 세인(thane : 귀족과 자유민의 중간계급)으로부터 자금과 군역금을 거두어들였다. 그는 사법행정을 면밀히 조사해 약자들이 무지로 인해 또는 부패한 재판관들에 의해 억압받는 일이 없도록 보호조치를 취했다. 그는 약자와 종속자들을 보호하는 데 특별히 관심을 갖고 〈출애굽기〉에 나오는 입법원리와 켄트의 애설버트 왕 법전, 웨식스의 이네 왕(688~694) 법전, 머시아의 오파 왕(757~796) 법전 등을 연구한 이후 중요한 법령들을 반포했다. 관습을 불필요하게 변화시키지 않고서도 유혈분쟁의 풍습을 제한하고 맹세나 서약을 깨뜨리는 행위에 대해서 중벌을 부과했다.

그러나 앨프레드는 군사적 업적이나 행정적 치적보다도 학문에 대한 태도에서 가장 특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당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이킹의 침략을 사람들이 죄짓는 데 대한 신의 벌이라고 보고 죄의 원인을 학문이 쇠퇴한 탓으로 돌렸다. 왜냐하면 학식이 있어야만 지혜도 얻고 신의 뜻에 따라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878~885년 외적의 침입이 뜸했던 시기에 그는 머시아와 웨일스를 비롯, 유럽 대륙 각지에서 학자들을 궁정으로 초빙했다. 그는 직접 라틴어를 배우고 887년에는 라틴어 서적들을 영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재산이 있는 모든 자유민 젊은이들에게 영어 읽는 법을 배우도록 지시하고 자신과 조력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과 사람들에게 지혜와 도덕을 가르치는 책을 영역해 공급했다. 잉글랜드 역사가 비드가 쓴 〈영국인교회사 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와 5세기의 신학자 오로시우스가 쓴 〈이교도에 대항한 7권의 역사서 Historiarum daversus paganos libri Ⅶ〉는 역사 속에 나타난 신의 뜻을 밝혔다(이 2권의 책은 앨프레드가 번역한 것이 아니지만 그렇게 알려져왔음). 앨프레드가 번역한 6세기의 위대한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의 〈목회지침 Liber regulae pastoralis〉은 사제들이 회중을 가르칠 때 명심할 지침을 담았고 워퍼드 주교가 번역한 그레고리우스의 〈대화 Dialogi di vita et miraculis patrum Italicorum〉는 성인들에 관한 교훈적인 읽을거리를 제공했다.

5세기 신학자인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Confesio〉은 신앙과 이성 및 영생의 본질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었는데 앨프레드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교부들의 다른 저작에서 따온 내용을 첨가했다. 이 번역본은 원본과 별도로 독자적인 연구가치가 있으며 그가 번역한 보이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De Consolatione Philosophiae〉도 역시 그렇다.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섭리와 신앙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예정된 운명과 자유의지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등의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서 앨프레드는 보이티우스의 입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초기 교부들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 이 두 번역본에는 모두 당대의 상황에서 나온 대비적 내용이 덧붙여져 있으며 그 사회질서와 왕의 직분에 관한 앨프레드의 견해를 보여주기도 한다.

앨프레드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 책을 썼지만 신학적 문제 자체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번역본의 첫 권인 그레고리우스의 〈대화〉를 맡아 작업하면서 세속적인 번민의 와중에서도 가끔씩은 거룩한 문제에 관해 생각하곤 했다. 그는 또한 최초의 찬송가 50편을 번역하기도 한 것 같다. 앨프레드의 저작은 아니지만 890년경에 유포되기 시작한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색슨족 시대 잉글랜드에 관한 가장 방대한 정보를 담은 책으로서, 앨프레드 치하 학문부흥의 소산인 것으로 보인다.

앵글로색슨 연대기 (Anglo-Saxon Chronicle)
앵글로색슨 연대기 (Anglo-Saxon Chronicle)

그가 다스리던 시대에는 또한 건축과 예술활동도 활기를 띠었으며 외국의 장인들이 그의 궁정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앨프레드는 1가지 일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수도회 활동을 부활시키고자 수도원과 수녀원을 설립했으나 다음 시기에 대륙에서 수도 생활의 부흥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수도생활에 대한 열정적인 호응이 잉글랜드에서 일지 않았다.

앵글로색슨족 왕들 중에서 유일하게 앨프레드만이 전기작가들의 전면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전기는 893년에 웨일스의 학자 애서가 썼다. 이 책은 값진 정보를 많이 담고 있으며 앨프레드가 고통스러운 질병의 재발에 시달리면서도 줄곧 열심히 일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애서의 수사적 표현을 떠나서도 매력적인 성격에 동정심이 넘치고, 사람들의 애정을 끌며, 왕으로서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는 한 인물의 모습이 밑바탕에 잘 그려져 있다. 이러한 모습은 앨프레드가 제정한 법률과 그가 쓴 저술에서 나타난다.

앨프레드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진 적이 없었다.

그에 관한 기억은 명백히 절망적인 상황에서 승리를 거둔 왕으로서, 그리고 현명한 입법자로서 전설이 되어 살아 남았다. 그의 번역서 일부는 12세기 무렵까지도 사본이 제작되었다. 현대의 연구를 통해 그에 관한 정보가 더욱 풍부해졌지만 중세에 확립된 위대한 왕으로서의 평판은 본질적인 내용에서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