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

조운

다른 표기 언어 漕運

요약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전근대사회는 조세를 현물로 조달했으며, 그중에서도 곡물이 주로 세납의 대상이었다. 조세로 징수되는 곡물은 물량이 많고 무거웠으므로 조운은 대규모의 운송 작업이었다. 당시 수레가 발달하지 않아 세곡의 운송은 대개 선박에 의존해야 했다.
세곡을 실어나르는 선박을 조선, 조선이 항해하는 뱃길을 조운로, 조선이 출발하는 강변이나 해안에 설치한 창고를 조창이라고 했다. 조운을 조전·조만이라고도 했으며, 운영주체에 따라 관선조운·사선조운, 운송화물의 성격에 따라 관조·사조, 운송경로에 따라 해운·수운으로 구분했다. 국가 재정을 거의 세곡에 의존했으므로 조운은 국가의 강력한 통제하에 집약적인 형태로 조직·운영되었다. 조운은 중국 한나라 때부터 비롯되었으며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제도화되었다.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였으므로 조세를 미곡·잡곡·면포·마포 등 현물로 조달했다.

조운도
조운도

그중에서도 주로 곡물이 세납의 대상이었다. 조세로 징수되는 곡물은 물량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무거웠으므로 조운은 대규모의 운송 작업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수레가 발달하지 않아 세곡의 운송은 대개 선박에 의존해야 했다. 즉 전국 각지의 고을 단위로 징수한 세곡을 그 인근의 강변이나 해안에 설치한 창고에 모아두었다가, 일정한 시기에 선박을 실어 서울로 운반했다. 이때 세곡을 실어나르는 선박을 조선(漕船), 조선이 항해하는 뱃길을 조운로(漕運路), 조선이 출발하는 강변이나 해안에 설치한 창고를 조창, 서울의 세곡을 수납하는 창고를 경창(京倉)이라고 했다.

조운을 조전(漕轉)·조만(漕輓)이라고도 했으며 운영 주체에 따라 관선조운(官船漕運)·사선조운(私船漕運)·운송 화물의 성격에 따라 관조(官漕)·사조(私漕), 운송경로에 따라 해운·수운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수운은 수참(水站) 또는 참운(站運)이라고도 했다. 국가 재정을 거의 세곡에 의존했으므로 조운을 매우 중요시 여겨 국가의 강력한 통제하에 집약적인 형태로 조직·운영했다.

조운은 중국 한나라 때부터 비롯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부터 제도화되었다.

국가가 직접 경영하는 관선조운제에서는 국가가 설치한 조창, 국가가 마련한 조선, 국가에 의해 동원되어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군(漕軍)이 필수적이었다. 고려는 지방 통치를 위해 군현제를 정비하면서 10세기초 정종 때 이를 토대로 강변 또는 해안에 조창을 설치했다. 이때 세워진 조창이 충주의 덕흥창(德興倉) 등 12조창이다. 그후 문종 때는 황해도 장연에 안란창(安瀾倉)을 설치했다.

각 조창은 판관(判官)이라는 감독 관리가 주재했는데, 이들은 외관(外官)으로서 중앙정부가 직접 파견한 관리였다. 조창은 일종의 행정 구획으로서 촌락을 기본 구조로 하여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했다. 그러나 행정기능을 보유하지는 않아 인근 군현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세곡의 수납·운송이라는 기능면에서만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다.

조창에는 판관 외에도 향리·초공(梢工)·수수(水手)·잡인(雜人) 등 조선에 승선하거나 세곡 수납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조창에서는 각기 부근 관할구역의 세곡을 추수가 끝난 뒤 징수하여 보관했다가 이듬해 2월부터 5월에 걸쳐 개성 부근의 경창으로 운송했다. 이를 위해 연해안의 조창에는 세곡 1,000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哨馬船)을 각기 6척씩, 그리고 한강 유역의 조창에는 세곡 200석을 실을 수 있는 평저선(平底船) 20척 또는 21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13세기말 이래 왜구의 노략질, 군현제의 개편 등으로 점차 그 운영이 부실해져가다가 마침내 1376년 우왕 때는 조운제를 폐지하고, 세곡을 육운(陸運)하게 했다. 그러나 육운은 수송이 어렵고, 도중에서 도적들의 약탈이 자주 자행되어 국가 재정이 약화되었다. 이같은 사태는 결과적으로 고려의 지배력을 약화시켜 그 쇠망을 촉진시켰다.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와 신진사대부계층은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과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위해 체제를 정비했다.

여기에 나타난 것이 토지제의 개혁과 조운제도의 복구였다. 우선 육로로 운송되던 세곡을 다시금 조운하게 하여 국가재정을 충실하게 했다. 1392년 조선왕조를 세운 뒤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할 때도 조운에 적합한가에 특히 유의했다. 아울러 운영 관리에도 세심히 배려하여 〈경국대전〉에서 정비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의 조창은 9개소로서 그중 3개소가 한강 연안에, 2개소가 예성강 연안에, 그리고 4개소가 해안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수로 연변에도 5개의 조창이 설치되었지만, 그들의 운송역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정부가 역점을 둔 것은 연해안에 설치한 조창에서의 해운이었다. 해운의 대상인 전라도·충청도 지역의 세곡이 국가재정의 태반을 지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운의 주요항로가 있던 서해안·남해안은 섬이 많은 다도해로서 항로의 사정이 좋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태안의 안흥량(安興梁), 임천의 남당진(南堂津), 강화의 손돌항(孫乭項) 등은 특히 안 좋아 조선이 좌초되고 난파되는 일이 흔했다.

안흥량은 난행량(難行梁)이라고 할 정도였는데, 태안반도의 돌출부에 위치하여 해안선의 굴곡이 심할 뿐 아니라 암초가 곳곳에 있어서 해난사고가 연례행사처럼 일어났다. 1403년(태종 3) 경상도 조선 34척, 1414년 전라도 조선 66척, 1455년(세조 1) 전라도 조선 54척의 침몰은 그중에서도 큰 사고였다. 이같은 조선의 침몰은 국가 재정상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조군의 확보 문제와 아울러 인명사고로 인한 사회적 문제도 컸다.

그리하여 1403년에는 경상도 세곡을 충주의 경원창(慶源倉)에 납부하게 했다가, 1465년에는 가흥창에 납부하게 하여 이를 한강의 수로를 통해 운송하게 했다. 그러나 전라도와 충청도 연해안 지역의 세곡은 수운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전라도 지방의 세곡은 다른 지방에 비해 그 양이 훨씬 많았는데, 15세기초에는 약 7만 석, 16세기 중엽에는 10만여 석, 기근이 심했던 17세기 중엽에는 4만여 석으로서 총세액의 절반을 넘고 있었다. 또한 세곡의 운반을 위해서는 법성포 앞바다의 칠산량, 안흥량 등지를 반드시 통과해야 했다.

이에 1512년(중종 7) 위험 부담을 다소라도 줄이기 위해 최남단의 영신창을 폐쇄하고, 그 수세구역의 일부를 법성창으로 이관시키고, 법성창의 수세구역 일부를 덕성창으로 이관시켰다. 그러다가 17세기 중엽부터 대동법의 실시로 운송물량이 늘어나면서 함열에 성당창을 새로 설치했다. 하지만 안흥량에서의 사고가 그치지 않자 조선 후기에는 사선에 의뢰하여 세곡을 운송하게 하는 방안이 제기되었다.

세곡의 운송은 국가재정과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항상 정부가 직영하는 관선조운체제를 따랐다.

따라서 집권력이 강했던 초기에는 관선조운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조선의 위정자들은 조창의 정비와 함께 조선·조군의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먼저 선박의 건조·관리를 위해 사수감 또는 전함사라는 관청을 두었다. 그리고 선박의 건조는 한강 연안, 선재가 풍부한 안면도, 완도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1401년에는 250여 척의 조선을 건조하여 충청도·전라도·경상도 등 3도에 분배해주기도 했다. 1413년에는 조운에 쓸 평저선 80척을 건조했고, 1460년에는 변산과 완도에서 조선 100여 척을 건조했다.

세조 때 건조된 조선은 매척에 큰 소나무 17~18조가 소요되는 대선으로서, 그 규모에 비해 매우 경쾌했고, 비상시에는 해전에 사용하게 했다. 이를 위해 선장(船匠)과 목공 등 300명이 동원되었다. 조선에 싣는 세곡의 양은 해운의 경우 매척마다 500~600석, 수운의 경우 200석 내외였다.

정부는 조군의 확보에도 큰 관심을 보였는데, 조군은 부역의 일종으로 조운업무에 동원되었다. 신분은 본래 양인이었으나, 업무가 고되고 천했으며 세습이어서 이른바 신량역천(身良役賤)에 속했다. 또 조군은 업무가 과다하고 위험부담이 컸으며, 온갖 잡역에 동원되기 일쑤여서 가급적 그 일을 피하려고 했다. 16세기에는 조군의 기피현상으로 관선조운제가 거의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16세기 이후에는 사선(私船)들이 세곡을 운송하는 경향이 많아졌다.

고려시대에도 민간선운업자들이 사선을 가지고 세곡운송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조선시대에도 그 업무를 계속 맡았다.

사선은 태종 때의 경우를 보면, 강화도 세곡 7만 석 가운데 2만 석을 차지했다. 그후 1414년 전라도 조선 66척이 침몰하는 것을 계기로 사선의 세곡 운송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15세기 중엽에는 조운의 주류를 이룬 때도 있었다. 세조 때 관선조운제가 강화되면서 사선의 활동은 위축되기도 했으나, 16세기에 왜구에 대한 해상전술이 바뀌어 큰 선박을 소형으로 개조하면서 다시 세곡운송을 주도하게 되었다.

사선은 관선에 비하여 조선술·항해술이 뛰어나 수로가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접근하여 농민들은 조창까지의 운송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사선의 활동은 대동법의 실시로 보다 활발해졌다. 관선이 전세곡의 운송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서 위정자들은 막대한 운송물량이 예상되는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이미 사선의 동원을 예상하고 있었다. 세곡 운반에 참여한 사선은 경강선(京江船)과 지토선(地土船)이었다.

경강선은 한강 유역에 근거지를 두고 어로·선상 활동에 종사하면서 세곡 운송에 참여했는데, 조선 후기에는 본격적으로 세곡 운송을 주도했다. 운송업을 하나의 영업분야로 개척한 경강선인들은 영리를 추구하기 위해 기술과 자본의 확대에 힘쓰는가 하면, 위정자들과도 결탁하여 그 이권(利權)의 확보에 노력했다. 그들은 선가(船價)라는 합법적 대가 외에도 화수(和水)·고패(故敗) 등 불법적 활동을 통해 영리를 꾀했다. 경강선은 대체로 매척에 1,000석의 세곡을 실었는데, 2,000석 이상을 적재하는 경우도 있었다.

각 고을에 있던 지토선은 주로 대동미 운송에 참여했는데, 18세기 이후에는 영업권을 경강선에 넘겨 주었다. 조선 후기 영조 때는 사선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해 관선조운을 다시 강화해보려고 시도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조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