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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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표기 언어 漕船

요약 조전선이라고도 하며, 해로와 수로의 수운에 따라 규모가 다르다. 고려시대의 규정은 알 수 없으며, 조선시대의 조선은 관선과 사선을 겸용했다. 조선 초기부터 관선은 병선과 조선의 분리·건조법을 두고 논란이 있었으며, 중국의 갑조법을 도입하는 등 선박개조를 위해 노력했다. 1461년 단조법을 채택하면서, 1465년 병선과 조선을 겸용하는 병조선제를 채택했다. 이때 확정된 선형이 맹선으로 이전의 병선에 비해 규모가 커졌으며, 상장을 철거하면 조선으로 전용할 수 있었다. 적재규모는 약 500~800석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병선과 조선이 분리되면서 규모가 약간 줄어들었다. 그러나 기본 구조는 비슷해서 병선을 쉽게 조선으로 개조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기한이 다된 병선을 개조하여 사선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전선이라고도 한다. 그 규모는 해로와 수로의 수운에 따라 차이가 있다.

각선도본
각선도본

고려시대의 규정은 알 수 없으며, 조선시대의 조선은 관선과 사선을 겸용했는데, 후기로 갈수록 사선의 비중이 커졌다. 사선의 구조는 알 수 없으나 관선과 유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관선의 경우 조선 초기부터 병선과 조선의 분리, 건조법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으며, 중국의 갑조법을 도입하는 등 선박개조를 위한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몇 차례 시험과 번복 끝에 1461년(세조 7) 전통적인 단조법을 채택하면서, 1465년 신숙주(申叔舟)의 건의로 병선과 조선을 겸용하는 병조선제를 채택했다. 이때 확정된 선형이 맹선으로 이전의 병선에 비해 규모가 커졌으며, 상장을 철거하면 조선으로 전용할 수 있었다. 적재규모는 약 500~800석이었다. 이와 같은 구조는 효율성과 경제성을 높이는 데 효과가 있었으나, 화물의 하중을 견디기 위해 평저형을 고수하게 되어 조선 후기까지도 유선형과 첨저형 선체가 도입되지 못하는 폐단을 낳았다.

임진왜란을 겪은 후에는 전선과 조선이 분리되면서 규모가 약간 줄어들고 경쾌해졌다. 그러나 기본적인 구조는 큰 차이가 없어 병선을 쉽게 조선으로 개조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기한이 다된 병선을 개조하여 사선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문에 비용절감을 위해 전선과 조선을 겸용하자는 논의가 계속되었다. 승무원은 선장격인 사공과 격군이 있었으며, 인원수는 시대에 따라 변동이 있었다.

1475년(성종 6) 1,000석 이상 적재하는 배에는 조군 22명, 700석 이상이면 20명, 600석 이상이면 18명을 배정했다.→ 조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