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졸

조졸

다른 표기 언어 漕卒

요약 고려와 조선시대 조운선을 가지고 조운활동에 종사하던 선원.

조군이라고도 한다. 조졸에는 선장에 해당하는 사공과 선원에 해당하는 격군(고려시대에는 초공 또는 수수)이 있다. 특히 강에서 수운활동을 한 조졸을 수부라고 했다.

본래 이들은 양인신분에 속해 있었으나 천역에 종사했던 신량역천의 계층이며, 칠반천역의 하나로 그의 역이 세습되었다. 항상 '□□창 조졸'이라고 씌어진 호패를 가지고 다녔으며, 다른 직역에 동원되지 않았다. 이들이 맡은 임무는 세곡의 조운뿐만 아니라 파선의 개조, 소금의 제조, 선척의 간수 등이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각 조창의 조졸 총수가 5,960명이며, 해운의 각 조선에는 사공 1명, 격군 15명, 수운의 각 조선에는 사공 1명, 격군 32명이 배속되었다. 초기에는 각 조선에 30명이 배속되어 1년씩 교대근무하고, 비번인 조졸이 납부한 신포는 사공·격군의 급료 및 조운시 필요한 비용에 충당했다. 그런데 입번의 장기화, 보인 지급의 열악과 허구화, 조운시 발생하는 폐선사고와 이에 부수되는 경제적·사법적 고통, 조운과정에서 책임자였던 사지·천호 등으로부터 가해지는 수탈, 모미발생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 등으로 그 역이 무거워지고 고되자 도산하는 자가 많아졌다.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추쇄작업을 다각적으로 벌이고, 해안가 거주민 중 수로에 익숙한 자를 강제로 징발하기도 했다.

1442년(세종 24)에는 그 역의 세전화를 시도했으나 이에 대해 조군들은 도망하기도 하고 대역으로 맞섰다. 이후 조졸의 역기피현상은 가속화되었고 관장제의 붕괴로 인해 국가 주도로 선박을 건조하기는 더욱 힘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점차 조졸·관선을 통한 관조운의 기능이 약화되었고 대신 사운이 활성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