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

조창

다른 표기 언어 漕倉

요약 전근대사회에 국가가 징수한 곡물을 모아 보관하고, 이를 다시 경창(京倉)으로 운송하기 위해 해안이나 강변에 설치했던 창고.

우리나라에 조창이 처음 설치된 것은 고려시대였다.

10세기말 지방제도를 확립하면서 이를 토대로 바닷가 또는 강변에 조창을 설치하고 세곡을 수납했다. 해안에 설치되어 해로를 이용해 세곡을 운송하던 조창은 해운창(海運倉), 강변에 설치되어 수로를 이용하던 조창은 수운창(水運倉) 또는 수참(水站)·강창이라고 했다.

해운창은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에 설치되었는데, 서해안에는 하양창·영풍창·안흥창·진성창·부용창·해릉창·안란창이, 남해안에는 장흥창·해룡창·통양창·석두창이 있었다.

이들 해운창은 1,000석을 실을 수 있는 선박을 각기 6,000척씩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를 초마선(哨馬船)이라고 했다. 한편 수운창은 한강 유역에 설치되었는데, 원주 부근에 흥원창이, 충주 부근에 덕흥창이 있었다. 수운창에는 세곡 200석을 실을 수 있는 작은 선박을 두어 세곡을 운송했는데, 이를 평저선(平底船)이라고 했다.

흥원창에 20척, 덕흥창에 21척이 있었다. 각 조창에는 판관이 배치되어 조운 업무를 주관했다. 이들은 감무·진장 등과 같은 지방관의 대우로 매년 쌀 20석의 녹봉을 받았다. 판관 밑에서 실무를 맡고 있던 사람은 색전(色典)이라고 불리는 향리였다. 색전은 세곡을 조창에 거두어 들여 정해진 시기에 세곡을 다시 조선에 실어 운송하여 경창에 납입시키는 임무를 갖고 있었다. 그밖에 조창에는 조창을 경비하는 사람, 초공(梢工:선장)·수수(水手:사공) 등 조선을 부리는 사람 등이 거주했다.

조창의 기능은 세곡의 수납·보관·운송의 3가지였다.

세곡을 쉽게 거두기 위해 각 조창에는 수세관할구역이 정해져 있었다. 가을에 추수가 끝난 직후부터 수납한 세곡은 조운할 때까지 일정기간 조창에 보관되었다. 선박의 운항은 풍랑 때문에 시간적 제약을 받았는데, 운항하기 좋은 때는 봄철이었다. 그래서 세곡은 이듬해 2월부터 가까운 곳은 4월까지, 먼 곳은 5월까지 조운을 마치도록 법으로 규정했다. 조운에 쓰는 경비는 국가가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고려는 조창을 세우고 조선을 마련하면서 그 일부를 농민에게 전가시켰는데 모미(耗米)가 그것이다.

고려 말기 사회가 혼란해지고, 왜구들의 약탈로 조창은 부실해져갔다. 왜구의 노략질을 피해 해안의 조창을 내륙으로 옮겨 운영해보았으나 그 기능은 점차 약해졌다. 그리하여 1376년(우왕 2)에는 조운을 완전히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조창의 기능이 부활된 것은 조선 건국부터였다.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국가의 재정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조운제도를 복구하고자 했다. 조선의 조창은 대체로 고려의 것을 복구하면서 시작되었다.

먼저 서해안지역에서는 하양창의 옛 터에 경양포를 설치하여 인근의 세곡을 수납하게 했고, 해릉창의 옛 터에는 영산창을 복구시켰다. 그리고 진성창이 있던 부근에는 새로 덕성창을 설치했다. 남해안에는 고려의 통양창·석두창을 그대로 복구시키고, 김해지방에는 새로 불암창을 증설했다. 수운창의 경우에도 덕흥창·흥원창을 그대로 복구하면서 명칭을 바꾸었다. 조선의 조운제도는 〈경국대전〉의 반포를 계기로 정비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이 설치한 조창은 9개소로서, 그중 4개소가 해안에, 5개소가 강변에 위치했다. 충청도 해안에서는 처음에 경양포에서 세곡을 모아 운송하다가 관선조운이 잘 운영되지 않아 공세관 등 10곳에서 세곡을 수납했었는데, 세조 때 공세관에 조창이 설치되어 인근 지역의 세곡을 조운했다(공진창). 전라도지역에서는 당초 덕성창과 영산창에서 인근 각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조운했으며, 세조 때에는 영광에 법성창을 더 설치했다.

그리고 용안에 있는 덕성창을 함열의 피포로 옮겼는데, 이는 토사가 퇴적하면서 물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열의 피포 역시 포구로서 적합하지 않아 1487년(성종 18) 다시 용안으로 옮기고 이름을 득성창이라 했다. 17세기 중엽에는 함열에 성당창을 새로 설치했다. 강변에 위치한 수운창은 한강 유역에 3개소, 예성강 유역에 2개소였다. 한강 유역에는 고려시대부터 덕흥창·흥원창이 있었는데, 15세기 중엽 세곡을 임운(賃運)하는 분위기 속에 이포·추호포 등 여러 곳에서 임의로 세곡을 운송하다가 세조 때 관선조운을 강화하면서, 충주에 덕흥창을 보강하여 새로 가흥창을 설치하여, 충청도 내륙지방뿐만 아니라 경상도지역의 세곡까지도 수납하여 조운하게 했다.

강원도지역에는 본래의 흥원창 외에 춘천에 소양강창을 세워 지역을 나눠 세곡을 수납하고 조운하도록 했다. 그리고 예성강 유역에 조읍포창·금곡포창을 새로 설치하여 황해도지역의 세곡을 운송하도록 했다.

이들 9개 조창은 조선 전기에는 비교적 무난하게 운영되었다. 다만 전라도 조선이 자주 침몰사고를 일으키자 16세기초 나주의 영산창이 폐쇄되고, 득성창에 대신하여 옥구에 군산창(群山倉)이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영산창은 수세구역이 법성창 관할로, 법성창의 수세구역 일부는 군산창의 관할로 변경되었다. 그밖에 평안도·함경도·제주도 지역의 세곡은 현지의 경비로 쓰였기 때문에 조운되지 않았으므로, 이들 지역에는 조창이 설치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도 각 조창에는 판관이 있어 조운 업무를 주관했는데, 조운의 중요성을 인식해 각 고을을 관장하기 위해 해운판관·수참판관 등을 두었다. 또 실제 세곡을 수납할 때는 판관을 수행하여 서기·사령·읍창·통인 등의 요원들이 창고행정을 맡았고, 평시에는 이와 별도로 고직(庫直)이 있어 세곡을 지켰다. 3년 또는 5년마다 각 조창을 주관하는 감독관이 물품을 조사하여 현품과 장부를 대조해 부정여부를 감사하기도 했다.

조선 초기의 조창은 창고라고는 하지만 창고의 시설을 완비한 것이 아니었고 대체로 강변이나 해안 언덕에 노적했다.

이들 곡식을 깔고 덮는 비용조달과 거기에 동원된 백성들은 매우 심하게 시달렸다. 또 도둑맞기가 쉬워 밤낮으로 간수해도 손실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창의 설비가 갖추어진 것은 16세기에 이르러서이며, 충주 가흥창의 경우 1521년(중종 16)에 약 70칸의 창고가 지어졌다. 조선시대에도 각 조창에 소정의 조선을 비치했는데, 아산의 공세관창에는 60척의 조선이 있었다. 각 조선에는 대략 500~600석씩 세곡을 실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이후 사선으로 세곡을 운반하기 시작하면서 관선조운제가 부실해졌고, 이에 따라 조창의 기능도 약화되었다. 17세기에 운영되던 조창은 6개 조창으로서 충청도 지역에는 공세관창의 후신인 공진창과 가흥창, 전라도 지역에서는 성당창·군산창·법성창, 황해도지역에는 금곡포창의 후신인 금곡창이 명맥을 유지했으나 수세관할구역은 줄어들었다.

조선 후기에는 많은 고을이 사선을 세내어 세곡을 운반했기 때문에 조창에서는 사선의 뱃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의 세곡을 운반했으나, 조군들이 일을 회피하고 조선이 부족하여 조운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18세기 영조 때 관선조운을 복구하기 위해 경상도 남해안에 마산창·가산창·삼랑창을 설치하여 운영했지만 성과가 좋지 못했다.

18세기말 이후 세곡운송은 경강선 등 사선이 주로 담당했다. 명목상으로는 조창이 존재했으나 실제로는 유명무실했고 조창의 세곡을 운반하는 선박도 조선이 아니라 운송용역을 청부받던 주교사(舟橋司)의 집주선(執籌船)이었는데, 그 실체는 사선인 경강선(京江船)이었다.→ 조운

시기구분 조선 전기 조선 후기
조창 조선수 각주1) 수세관할구역 조창 조선수 각주2) 수세관할구역
해운 공세관창
(貢稅串倉)
60 아산 각주3) ·서산·한산·연산·신창·결성·
임천·정산·공주·홍주·보령·전의·
청양·이산·대흥·석성·해미·태인·
천안·비인·은진·목천·면천·연기·
덕산·서천·직산·홍산·부여·남포·
예산·당진·평택·온양·청주·문의·
회덕·진잠·옥천·회인
공진창
(貢津倉)
15 아산 각주4) >·온양·목천·연기·전의·천안
덕성창
(德城倉)
63 용안 각주5) ·전주·임실·남원·임피·김제·
장수·금구·운봉·익산·만경·여산·
금산·진산·태인·옥구·진안·고산·
무주·함열
성당창
(聖堂倉)
군산창
(群山倉)
11
(13)
17
(22)
함열 각주6) ·익산·진산·고산·운봉·금산·
용담·남원
옥구 각주7) ·전주·진안·장수·금구·태인·
임실
법성창
(法聖倉)
39 영광 각주8) ·순창·옥과·고창·곡성·창평·
장성·정읍·담양·흥덕·부안·고부·
함평·진원·무장
법성창 28
(31)
영광 각주9) ·순창·옥과·고창·곡성·창평·
장성·정읍·담양·광주·화순·동복
영산창
(榮山倉)
53 나주 각주10) ·순천·강진·진도·낙안·광양·
남평·흥양·부안·능성·영암·보성·
장흥·해남·광산·화순·동복
     
      마산창
(馬山倉)
(20) 창원 각주11) ·함안·김해·칠원·웅천·진해·
의령·거제
      가산창
(駕山倉)
(20) 진주 각주12) ·곤양·하동·남해·단성·사천·고성
      삼랑창
(三浪倉)
(15) 밀양 각주13) ·현풍·영산·창녕·양산
수운 가흥창
(可興倉)
51 충주 각주14) ·음성·괴산·청안·진천·제천·
단양·영춘·청풍·연풍·청산·보은·
황간·영동·안동·비안·용궁·상주·
함양·문경·예안·봉화·풍기·영주·
예천·진보·군위·의성·청송·청도·
영천·경산·자인·하양·인동·의흥·
신평·선산·금산·개령·지례·합천·
안음·함양·거창·영해·영덕·영양
가흥창   충주 각주15) ·음성·괴산·청안·진천(연풍·
안동·비안·용궁·상주·함창·문경·
예안·봉화·순흥)
흥원창
(興原倉)
- 원주 각주16) ·횡성·영월·평창·정선      
소양강창
(昭陽江倉)
- 춘천 각주17) ·홍천·낭천·양구·인제      
금곡포창
(金谷浦倉)
20 배천 각주18) ·해주·연안·강령·옹진·풍천·
신천·장연·문화·송화·장련·은율
금곡창 - 풍천·신천·장연·문화·송화·장련·은율
조읍포창
(助邑浦倉)
- 강음 각주19) ·평산·우봉·토산·황주·서흥·
봉산·곡산·신계·수안·안악·재령
    황주·서흥·봉산·곡산·신계·수안·
안악·재령
조선시대의 조창 수세관할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