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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려와 조선시대에 공문을 전하는 사람이나 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역(驛)과 역의 중간에 설치했던 건물이나 제도.

〈고려사〉 병지 참역조에 역제에 관한 기사가 적혀 있듯이 참은 역과 같은 의미로도 쓰였다. 우리나라의 역제는 고구려나 신라의 경우에서 확인되듯이 삼국시대에 이미 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도 역 운영을 위한 관리부서가 설정되어 있었다. 고려초에 전국을 22개 역도로 나누고 거기에 525개소의 역을 소속시켰으며 6과로 등급을 매겼다. 원간섭기에는 원나라가 역참설치를 강요하기도 했고 그 영향으로 참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참에는 육참과 수참이 있었다. 육참은 말과 소나 수레를 이용했고, 도보로 가기도 했다. 수참은 배를 이용했다. 조선시대에도 이를 계승하여 운용했다. 각 참마다 아록전 5결씩을 지급하여 경비에 충당하도록 했다. 이렇게 역과 참이라는 이름은 혼용되었으며 대체로 역제를 그대로 참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 군사상 필요에 의해 종래의 제도를 고쳐 파발을 두게 되었으며, 또 변방의 소식을 중앙에 빨리 전달하기 위해 전국에 발참을 증설하여 역과 구별했다.

이 제도에 따라 기발의 경우는 25리마다 1참을 설치하고, 참마다 발장 1명, 군 5명, 기 5필을 두었다. 보발은 30리마다 1참을 두어 참마다 발장 1명, 군 2명씩을 두었다. 참과 참 사이의 거리는 역과 역 사이의 거리와 거의 같았다. 파발로는 서발, 남발, 북발의 3대로를 중심으로 정비되었다. 경성-모화관-금천-의주의 서발이 38참, 경성-양주-철원-경흥의 북발이 64참, 경성-광주-충주-동래의 남발이 34참이었다. 그러나 이 136개소의 발참이 모두 신설된 것은 아니고 상당수는 기존의 역이 그 임무를 대행했을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