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혁명

4월혁명

[ 四月革命 ]

시대명 현대
연도 1960년

1960년 4월 19일을 전후하여 일어난 정치혁명.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을 출범시키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의거로 규정되었으나 혁명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며, 4월 19일에 절정을 이루었다 하여 4·19혁명>이라 불리기도 한다.

원인

4월혁명의 근본적인 원인은 경제의 모순에서 찾을 수 있다. 50년대의 경제구조는 원료가공형 소비재공업의 비대화로 특징지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재벌은 권력과 원조를 등에 업고 온갖 특혜 속에 급성장 한 반면,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한 민족자본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또한 잉여농산물 도입에 따른 저곡가정책은 농촌을 황폐화시켜 광범한 을 유발했으며, 이렇게 도시로 흘러든 농민들은 도시빈민층을 형성, 과잉노동력을 창출함으로써 저임금구조를 정착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공업과 농업의 유기적 관련성을 상실한 채 원조에만 매달려 있던 취약한 경제구조는 57년 원조가 대폭 삭감된데다 세계적 불황의 여파가 겹쳐 일대 위기를 맞게 되었다. 여기에 의 장기독재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폭발함으로써 혁명의 불길이 댕겨졌던 것이다. 따라서 4월혁명은 원조경제의 모순이 정치적 측면에서 폭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4월혁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인독재와 자유당의 부정부패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었다. 집권 이후 숱한 정치파동으로 영구집권을 획책 하던 자유당 정권은 58년 12월 보안법 파동을 일으켜 국민과 야당 그리고 언론의 비판을 봉쇄했다. 그러나 민심의 이반으로 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관권을 총동원, 대규모 부정선거를 감행했다. 이렇게 치러진 3월 15일의 선거 결과, 의 지지표가 95~99%까지 나오는 등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지자 당황한 이승만은 내무부장관 최인규(崔仁圭)에게 득표율을 하향조정하라고 지시했고, 결국 이승만 88.7%, 이기붕 79%의 조작된 득표율로 당선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고 마산을 시발로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 규탄시위의 불길이 치솟았다.

전개과정

4월혁명의 발단은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야당의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에 등교조치한 데 반발하여 일어난 대구시내 고등학생들의 시위사건은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이미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불만을 폭발 시킨 도화선이 된 것은 였다.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마산을 비롯하여 서울·부산 등지로 확산되고, 학생을 주축으로 수많은 민중이 합세하면서 격렬하게 전개되자 경찰은 무차별 발포로 이에 대응했다. 이 와중에서 4월 11일 마산시위 도중 실종되었던 김주열(金朱烈)군의 시체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다 위로 떠오르자 전국민은 분노에 치를 떨었고, 마산시민의 2차시위를 계기로 시위는 다시 전국으로 번져갔다.

이어 4월 18일에는 고려대생 3천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한 후 귀교길에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아 한 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대생 시위대 피습사건). 이날의 고대생시위는 구호를 부정선거에서 독재타도로 바꾸어놓았고, 이튿날인 4월 19일을 기해 대학생들이 총궐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화요일인 4월 19일 고교·대학생을 비롯, 10만여 명의 서울시민이 시위에 참가, 시위대의 일부가 경무대로 향했다.

다급해진 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이 진주함으로써 피의 화요일은 막을 내렸으나, 이날 하루 동안 전국적으로 186명의 사망자와 6,02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계엄령하에서 점차 질서가 잡혀가는 듯하자 이승만과 자유당은 을 퇴진시키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4월 25일 가 일어나자 미국이 이를 명분으로 이승만의 하야를 권고하고, 4월 26일 다시 대규모의 민중데모가 일어나자, 이튿날 이승만의 하야성명과 함께 12년 독재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28일에는 이기붕 일가가 자살했음이 확인되었고, 29일 이승만은 몰래 하와이로 떠났다. 이승만 하야 후 허정 과도내각이 수립되고, 에 의한 결과 을 국무총리로 하는 민주당 정권이 성립함으로써 이 출범했다.

의의

우리나라 역사상 민중이 최초로 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한 4월혁명은 그러나 광범한 민중의 참여에 의한 전면적 사회혁명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학생의 주도에 의한 독재정권의 타도라는 표면적 성공에 그쳤다. 당시의 학생운동은 조직과 이론의 결여, 그로 인한 의식의 저급성으로 명백한 한계를 안고 있었다. 혁명주체세력이 안고 있는 이러한 한계는 4월혁명의 성과를 민주당이 독식케 하는 결과를 낳았고, 혁명 과정에서 제기된 반외세·민족통일·자립경제 등의 과제를 완수하지 못한 채 미완의 혁명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4월혁명은 이데올로기 속에 묻혀버렸던 이러한 혁명적 과제를 전면에 드러냄과 동시에 민중을 정치적으로 각성시켜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 현대사에서 한 분수령을 이루는 큰 의의를 가진다.

관련이미지

경무대 앞 경비헌병과 데모대의 배치.

경무대 앞 경비헌병과 데모대의 배치.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

동의어

4·19혁명

연관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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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승만 독재체제의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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