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운동

광주학생운동

[ 光州學生運動 ]

시대명 근대/일제강점기
연도 1929년

1929년 11월 3일 전남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항일운동. 당시 광주에는 광주고보·광주농업학교·전남사범학교·광주여고보 등 대부분의 학교에 독서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독서회의 전신은 26년 조직되어 장재성(張裁性)·왕재일(王在一) 등이 이끌던 성진회(醒進會)로서, 성진회는 27년 10월 해산하고 각 학교에 독서회를 조직하는 한편, 독서회중앙본부를 두어 상호 긴밀한 연계를 맺어 활동하고 있었다.

광주학생운동의 발단은 통근열차에서의 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의 충돌사건이었다.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 광주를 떠난 통근열차가 나주에 도착했을 때, 일본인 남학생이 광주여고보 3년생 박기옥(朴己玉) 등 조선인 여학생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다 못한 박기옥의 사촌 박준채(朴準埰) 등이 일본인 학생들과 싸움을 벌인 것이다. 11월 3일, 광주중학의 일본인 학생과 광주고보의 조선인 학생간에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으며, 조선인 학생들은 이 사건을 편파보도한 일본어신문 <광주일보>를 습격, 윤전기에 모래를 끼얹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11월 12일, 광주의 학생들은 일제히 시위에 돌입했다. 그때 뿌려진 격문의 주요내용은 등이다. 학생들은 학생투쟁본부를 설치하고 · 등 주요단체들과 연계를 맺으며 광주의 투쟁을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전국 각지의 거의 모든 학교들이 이에 호응, 시위나 동맹휴학운동을 전개했다. 참가 학교수 194개교, 참가 학생수 5만 4천여 명, 그중 580여 명이 퇴학과 함께 최고 5년의 체형을 받았으며, 2,330여 명이 유기정학당했다. 광주학생운동은 3·1운동 이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전국적 규모의 격렬하고 힘찬 항일운동이었다. 이들의 항일 투쟁정신을 본받기 위해 53년부터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연관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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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국주의열강의 대립
4. 문화정치와 친일파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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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민족말살정책과 항일운동
6. 무장독립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