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산사건

만보산사건

[ 萬寶山事件 ]

시대명 근대/일제강점기
연도 1931년

1931년 7월 2일 만주 길림성(吉林省) 장춘(長春) 부근 만보산에서 일어난 조선·중국 양국 농민들 사이의 충돌사건. 조선에서는 일제의 의 결과 수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만주로 이주했는데, 특히 1920년대 후반에는 집단이주가 급증했다. 1930년에 일어난 5·30사건 후, 그곳에서 쫓겨난 조선의 농민 약 3백여 명은 장춘 부근 만보산으로 이주, 황무지를 개간하기 위해 수로공사를 시작했다. 중국 측에서는 이를 의 만주침략 정책의 일환으로 보고 조선인 농민들의 퇴거를 강요, 31년 7월 1일 중국인 농민 약 5백 명이 올려와 관개시설을 파괴하자 일본은 경찰을 출동시켰고, 사건은 일·중 두 나라 무장경찰의 충돌로 발전되었다.

일본은 이 사건을 만주침략의 구실로 삼기 위해 대대적으로 선전했고, 그 결과 조선에서는 중국인에 대한 보복폭행사건이 발생, 서울·인천·평양·신의주 등지로 번져나가 마침내 전국적인 중국인 박해사건으로 확대되었다. 문제가 이처럼 심각하고 복잡해짐에 따라 <조선><동아> 양대신문사에서 진상조사에 나선 결과, 이 사건의 이면에 일본의 중국에 대한 침략음모가 숨어 있다는 점, 사건이 일본의 모략선전으로 과장되게 알려졌다는 점 등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반민중의 민족감정을 자극, 한·중 두 민족의 이간을 꾀해 일본에게는 만주침략에 유리한 정세가 형성되었다.

연관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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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화정치와 친일파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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