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철옹성

조선향토대백과 유물유적정보관 : 유적

영변철옹성

[ 寧邊鐵甕城 ]

분류 유물유적정보관>유적>성곽 · 봉수>성터
유물유적시대 삼국
행정구역 평안북도>영변군
등급 국보급
지정번호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63호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에 있는 옛 성터. 고구려 때인 1265년에 처음 쌓고 그 후 1416년, 1684년, 1733년, 1753년 등 여러 차례의 개축을 비롯하여 계속 보강하면서 이용되던 성이다. 철옹성은 본성, 약산성, 신성, 북성 등 4개의 부분성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 약산성과 본성은 고구려시기에 쌓은 성이고 신성은 조선시대인 1683년에 본성 안의 서남부에, 북성은 1684년에 본성 안의 서북부에 쌓은 성이다. 약산성은 1725년과 1976년에 개축하였다. 성벽의 둘레는 대략 본성이 14km, 약산성이 1km, 신성이 3km, 북성이 2km이다.

약산성은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된 약산 위에 평평하게 생긴 대지를 둘러막은 산봉식의 성이며 본성은 약산성 동쪽 성벽밖에 잇대어 영변읍을 싸고돌면서 남쪽에 남산, 동쪽에 모란봉, 북쪽에 진망산 등 봉우리들과 능선을 따라 쌓은 고로봉식의 성이다. 철옹성에서 성벽을 쌓는 방법은 지형조건에 따라 서로 틀리다. 약산성의 동, 서, 북 삼면은 절벽을 그대로 성벽으로 삼고 남쪽 일부 구간에만 성벽을 쌓았다. 본성은 산봉우리와 능선부분 바깥면에는 외면축조방법을, 골짜기를 건너서는데와 성문좌우부분에는 양면축조방법을 적용하였다. 약산성과 본성의 성벽은 4각추형태로 다듬은 성돌을 벽돌 쌓듯 정연하게 쌓아올렸다.

신성은 남산에서 영변읍을 향하여 내려온 능선을 타고 북으로 뻗어나가다가 다시 서쪽으로 올라 약산성에 닿게 하였으며 북성은 본성의 서북쪽 안으로 둘러막았다. 신성과 북성의 성벽은 양면축조방법으로 크기가 고르지 않은 돌들을 아래에 자갈을 고여가면서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6~7m이다.

약산성과 본성의 성벽 윗부분은 전투행동에 편리하게 그리고 성 안의 지면에 맞추어 평평하게 만들고 성벽을 따라가면서 성가퀴를 돌렸다. 성가퀴에는 활이나 총을 자유롭게 쏠 수 있도록 여러가지 형태의 구멍을 냈다. 약산성의 성문은 본성에 드나들기 편리한 동남쪽에 홍예문길을 낸 큰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문루를 세웠다. 약산성 안에 있는 봉수대에는 5개의 화돌이 본래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본성에는 동, 서, 남, 북 네 면에 문을 냈다.

현재는 남문만 남았는데 2층으로 된 아름답고 웅장한 문루가 옛 모습을 자랑하듯 서 있다. 이 문은 1789년에 고쳐 세운 것이다. 이 성의 북문 밑에는 4개의 홍예문길을 나란히 내서 성 안의 물이 이곳으로 흘러내리게 하였다. 신성에서 본성으로 드나들던 성문의 아치 부분은 6톤의 쇳물을 부어 만들었던 것인데 일제가 파괴하였다. 그밖에 매개 부분성들에는 서로 통하는 작은 문들과 성밖으로 나드는 암문들이 있었다.

성문 밖에는 고구려시기의 무덤들이 분포되어 있다. 남산에는 남장대, 약산성에는 서장대(약산동대), 진망산에는 북장대, 모란봉에는 동장대 등 4개의 장대를 두고 망루를 세워 적을 감시하였다. 성 안에는 3개의 골짜기로 흐르는 깨끗한 물과 50개나 되는 우물이 있어 수원이 충족하였다.

철옹성에는 북방에서 쳐들어온 외적들을 물리친 투쟁이야기가 수없이 깃들어 있다. 11세기 초에 거란이 여러 차례 쳐들어왔지만 그때마다 철옹성을 지키던 고려군들과 백성들에 의하여 격퇴되었고, 1236년에 몽골군과 고려 말 홍두적, 1636년에는 청나라군을 물리쳤다. 영변철옹성은 또한 북한 성곽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로 된다.

마지막 수정일

  • 2010.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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