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 집자리

오동 집자리

[ 會寧 五洞 住居址 ]

지역 회령
회령 오동 집자리 출토 석제조각품

회령 오동 집자리 출토 석제조각품

함경북도 회령시 회령읍 오동에 위치한다. 두만강 남쪽 지류인 회령천과 팔을천 사이의 강안단구 대지에서 1910년에 처음 발견하였으며, 1950년 봄에 두만강 주변 유적 조사에서 유적 범위를 확인하고 예비조사를 거쳐 1954∼1955년 2차례에 걸쳐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조사결과 집자리〔住居址〕 9기와 작업장(作業場) 및 5,000여 점의 유물 등과 돌널무덤〔石棺墓〕 1기를 확인하였다. 발굴 당시에는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보았으나, 보고서를 쓰는 과정에서 청동기시대로 해석하였고, 그 뒤의 연구 결과에서는 유적을 청동기시대 문화층 세 시기로 나누어 1문화층(1, 2호), 2문화층(4, 8호), 3문화층(5호)으로 구분하고, 3문화층 위에 철기시대 문화층(6호)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1, 2문화층에서 나온 집자리는 평면 장방형의 반움집으로 움바닥에 진흙을 깔거나 다지고 일부에 널판자를 깐 흔적도 있다. 채색토기〔丹塗磨硏土器〕 등은 보이나 젖꼭지모양손잡이토기〔乳狀把手附土器〕등은 출토되지 않는다. 1호 크기는 길이 550㎝, 깊이 75㎝로 잔존면적 30㎡이며, 내부에 2열의 기둥자리〔柱穴〕와 동남쪽에 구덩〔竪穴〕을 파고 돌을 두른 돌두름식〔圍石式〕 화덕자리〔爐址〕가 있다. 2호는 크기 915×610×85∼91㎝로 내부에는 4열의 기둥구멍이 있고 구덩식〔竪穴式〕 화덕이 있다. 8호는 840×650×75㎝로 동북벽에는 장방형의 작은 구덩 2기가 딸리는데, 모서리에서 120㎝ 거리에 크기 180×130㎝, 그곳에서 70㎝ 거리에 135×70㎝이다. 기둥구멍은 벽면을 따라 촘촘히 세우고 동북쪽 돌출부에는 양쪽에 1개씩만 있다. 내부에는 2열의 기둥구멍을 세웠는데, 그 안에 보강석(補强石)이 있는 것도 있다. 돌두름식 화덕이 있고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3문화층의 5호는 크기가 520×450×79㎝로, 바닥에 4줄로 기둥구멍이 있고 가운데에 주춧돌〔礎石〕이 2줄로 놓여 있다. 간토기〔褐色磨硏土器〕가 유물 출토량의 2/3를 차지한다.

집자리에서 나온 유물은 풍부하고 다양하며, 유물의 종류는 문화층별로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른 시기에는 흑요석(黑曜石) 석기와 차돌, 현무암(玄武岩)을 써서 만든 뗀석기〔打製石器〕들이 많고, 3문화층에는 무른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들이 많다. 농사나 공구용의 연장으로는 곰배괭이, 빗모양〔櫛形〕 반달돌칼〔半月形石刀〕 갈돌〔耉石〕, 돌끌〔石鑿〕, 대팻날도끼〔扁平偏刃石斧〕, 부리형석기, 숫돌〔砥石〕 등이 있고 흙이나 돌로 만든 가락바퀴〔紡錘車〕, 물고기잡이용의 돌로 만든 그물추〔石製 漁網錘〕 1점과 찔개살이 드물게 보인다.

무기와 사냥용 연장으로는 여러 유형의 간돌화살촉〔磨製石鏃〕, 돌창끝〔石槍 鋒部〕편, 돌도끼〔石斧〕, 뼈단검 등 돌이나 뼈로 만든 것들이 있다. 질그릇 갖춤새는 화분형토기(花盆形土器)로 구멍무늬〔孔列文〕, 주름진 무늬 또는 두 문양을 복합시킨 것 등이 있다. 간토기는 갈색 민무늬토기에 마연이 되고, 덧띠 위에 주름무늬를 새긴 것과 없는 것, 꼭지형 손잡이가 달린 것이 있다. 이른 시기에는 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가 많고 늦은 시기로 가면서 간토기가 증가한다. 그 밖에 돌단추〔土泡〕, 비취구슬〔翡翠玉〕, 옥반지〔玉指環〕, 흙팔찌〔土製腕飾〕, 뼈빗 등 치레걸이〔裝身具〕들이 나왔다.

돌널무덤은 점판암(粘板岩) 판돌〔板石〕로 만든 것이며 무덤의 껴묻거리〔副葬品〕로는 민무늬토기, 흑요석 편, 대롱구슬〔管玉〕 등이 출토되었다. (장호수)

참고문헌

  • 회령 오동 원시유적 발굴보고(도유호, 유적발굴보고 7집, 1960년)
  • 회령 오동 원시유적의 포유동물상(김신규, 고고민속 3, 1963년)
  • 우리나라 원시집자리에 관한 연구(김용남,·김용간·황기덕, 사회과학출판사, 197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