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죽막동 제사유적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

분류 교통/통신/지리 > 해양문화사전 > 해양민속 > 무속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에 있는 삼한시대에서 조선 후기에 걸친 제사 유적지이다. 수성당에 모셔진 신격은 수성당할머니[개양할미]라고 하며, 조기잡이의 가장 큰 어장이었던 칠산바다의 어로와 항해의 신이라고 한다. 개양할미는 칠산바다를 관장하는 해신(海神)이다. 아득한 옛날 적벽강의 대막골 뒤 여울굴에서 개양할미가 나와 바다를 열고 풍랑과 깊이를 조정하여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풍어를 관장하여 왔다고 한다. … 이 할미는 어떻게 키가 크던지 굽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걸어 다녀도 버선도 젖지 않았다고 한다. … 개양할미는 딸 여덟을 낳아 위도와 영광 고창 띠목 등 칠산바다의 요소에 배치하고 막내딸을 데리고 수성당에 머물며 서해바다를 총괄하고 있다고 한다. 유적은 해안 절벽 위에 형성되어 서해상에 흩어져 있는 고군산열도(古群山列島), 상왕등도(上旺登島), 위도(蝟島), 식도(食島), 비안도(飛雁島) 등의 섬들과 먼 바다까지도 바라보기에 유리한 지점이다. 유적 주변의 해양환경을 살펴보면, 북쪽에는 육지로 10m 정도 만입(彎入)해 들어온 해식동굴(海蝕洞窟)이 있다. 또한, 연안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연안반류(沿岸反流)가 흐르고, 조류가 급한데다가 주변에 섬들이 많아서 조류의 흐름에 장애가 되고 있다. 따라서 물의 흐름이 굉장히 복잡하며, 겨울에는 계절풍이 심하게 불어와 큰 파도를 형성해 항해에는 상당히 위험한 곳으로 평가된다. 한편, 이 곳은 서해상으로 돌출된 변산반도 중에서도 최선단(最先端)의 지점이다. 항해술의 제약때문에 연안항해나 근해항해가 일반적이었던 삼국시대에는 서해안 일대의 남북을 잇는 중요한 해상기점이 되어왔으며, 멀리 중국·왜 교류 때에도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지점이다. 유물은 현대의 해신당(海神堂)인 수성당(水城堂) 바로 뒤편의 평탄면(平坦面)에 8×13㎡의 범위에 약 30cm의 두께로 퇴적되어 있었다. 유물의 대부분은 삼국시대인 3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한편, 삼국시대 이후의 유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와 기와, 고려시대의 청자, 조선시대의 분청사기·백자가 소량 출토되었다. 이 곳은 예로부터 항해상의 위험한 장소이면서 항로의 중요한 기점이 되어왔고, 바다에서의 해상활동을 감시하기에도 유리한 지점이다. 따라서 항해상의 안전이나 어로와 같은 해상활동의 안전을 기원하기에 좋은 위치이다. 한편, 종류가 다양한 유물들이 섞인 채 절벽 위 평탄면에 퇴적되어 있었다. 이는 이 곳에서 제사와 같은 일정 목적에 유물을 사용하고 난 후 그대로 폐기하거나 의도적으로 파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 곳은 해상활동과 관련된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 분명하다. 이 곳에서 진행된 해신제사의 내용을 출토유물을 통해 검토해보면 시대별로 많은 차이가 있다. 먼저 삼국시대에는 전기간에 걸쳐 4단계로 제사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Ⅰ단계(3세기 후반)는 마한(馬韓)의 제사로 볼 수 있다. 제사에는 둥근 바닥 짧은 목 항아리〔圓底短頸壺〕만 사용하였다. Ⅱ단계(4세기)는 마한·백제의 제사로 볼 수 있다. 제사에는 역시 항아리〔壺〕 중심의 토기만 사용하였다. 그러나 토기의 기종과 수량이 증가해 제사의 규모가 Ⅰ단계보다는 확대되었다. Ⅳ단계(6세기 중·후반∼7세기 전반)는 백제의 제사로 Ⅰ·Ⅱ단계처럼 제사에는 항아리〔壺〕, 통형기대(筒形器臺), 곧은 입항아리(直口壺), 병 등의 토기만 사용하였다. 각 단계별로 진행된 제사의 목적은 근본적으로 국가의 제사에의 관여여부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Ⅲ단계의 백제와 가야의 제사는 해상교섭의 필요성이 증대하던 시점에 국가적 차원에서 해신(海神)에게 제사한 것으로 보인다. 해상교류의 길목이나 중요한 기점에서 원거리 항해의 안전이나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위해 제사에는 토기뿐만 아니라 금속유물, 토제모조품, 중국 청자와 같은 특수 공헌물품을 다량으로 사용하였다. 그 외의 제사는 재지세력(在地勢力)이 연안을 통한 이동이나 어로활동과 관련해 별도의 공헌물 없이 소량의 토기만을 사용해 제사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제사는 삼국시대의 Ⅳ단계처럼 소량의 토기나 청자, 백자 등을 제기(祭器)로 사용해 해상이동의 안전이나 풍어(豊漁)를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제사양상은 현재 우리 나라의 서해안 일대에 남아 있는 해양신앙과도 유사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기와가 출토되고, 19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수성당(水城堂)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부터는 노천제사(露天祭祀)를 벗어나 실내에서 제사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출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부안 적벽강 수성당

부안 적벽강 수성당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지방의 해안마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을의 공동 신앙소로, 건평 4평의 단칸 기와집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수성당에서 칠산(七山)바다를 수호하는 수성할머니라는 해신(海神)을 받들어 모셨는데, 이 여신은 키가 매우 커서 굽나무깨신을 신고 서해바다를 걸어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를 하여 어부들을 보호하고 풍랑을 다스려 고기가 잘 잡히게 해준다고 한다. 또 수성할머니는 딸 여덟을 낳아 각도에 딸을 한 명씩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의 수심(水深)을 재어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해 준다고 한다. 그래서 수성당을 구낭사(九娘祠)라고도 한다.

부안 적벽강 수성당

부안 적벽강 수성당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지방의 해안마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을의 공동 신앙소로, 건평 4평의 단칸 기와집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수성당에서 칠산(七山)바다를 수호하는 수성할머니라는 해신(海神)을 받들어 모셨는데, 이 여신은 키가 매우 커서 굽나무깨신을 신고 서해바다를 걸어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를 하여 어부들을 보호하고 풍랑을 다스려 고기가 잘 잡히게 해준다고 한다. 또 수성할머니는 딸 여덟을 낳아 각도에 딸을 한 명씩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의 수심(水深)을 재어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해 준다고 한다. 그래서 수성당을 구낭사(九娘祠)라고도 한다.

부안 적벽강 수성당

부안 적벽강 수성당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지방의 해안마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을의 공동 신앙소로, 건평 4평의 단칸 기와집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수성당에서 칠산(七山)바다를 수호하는 수성할머니라는 해신(海神)을 받들어 모셨는데, 이 여신은 키가 매우 커서 굽나무깨신을 신고 서해바다를 걸어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를 하여 어부들을 보호하고 풍랑을 다스려 고기가 잘 잡히게 해준다고 한다. 또 수성할머니는 딸 여덟을 낳아 각도에 딸을 한 명씩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의 수심(水深)을 재어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해 준다고 한다. 그래서 수성당을 구낭사(九娘祠)라고도 한다.

부안 적벽강 수성당

부안 적벽강 수성당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지방의 해안마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을의 공동 신앙소로, 건평 4평의 단칸 기와집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수성당에서 칠산(七山)바다를 수호하는 수성할머니라는 해신(海神)을 받들어 모셨는데, 이 여신은 키가 매우 커서 굽나무깨신을 신고 서해바다를 걸어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를 하여 어부들을 보호하고 풍랑을 다스려 고기가 잘 잡히게 해준다고 한다. 또 수성할머니는 딸 여덟을 낳아 각도에 딸을 한 명씩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의 수심(水深)을 재어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해 준다고 한다. 그래서 수성당을 구낭사(九娘祠)라고도 한다.

부안 적벽강 수성당

부안 적벽강 수성당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지방의 해안마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을의 공동 신앙소로, 건평 4평의 단칸 기와집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수성당에서 칠산(七山)바다를 수호하는 수성할머니라는 해신(海神)을 받들어 모셨는데, 이 여신은 키가 매우 커서 굽나무깨신을 신고 서해바다를 걸어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를 하여 어부들을 보호하고 풍랑을 다스려 고기가 잘 잡히게 해준다고 한다. 또 수성할머니는 딸 여덟을 낳아 각도에 딸을 한 명씩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의 수심(水深)을 재어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해 준다고 한다. 그래서 수성당을 구낭사(九娘祠)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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