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감은사

경주 감은사

분류 교통/통신/지리 > 해양문화사전 > 해양민속 > 종교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현 문무대왕면) 용당리에 있었던 절이다. 이 절은682년(신문왕 2) 신문왕이 부왕 문무왕의 뜻을 이어 창건하였으며, 사지의 부근인 동해바다에는 문무왕의 해중릉(海中陵)인 대왕암(大王巖)이 있다. 문무왕은 해변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하였으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었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智義)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자,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하였다. 그 때 금당(金堂) 아래에 용혈을 파서 화룡(化龍)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682년 신문왕은 동해의 호국룡이 된 문무왕과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아들로 태어난 김유신(金庾信)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보물인 신비스러운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었다. 그 뒤 이 절은 황룡사(皇龍寺)·사천왕사(四天王寺) 등과 함께 호국의 사찰로서 명맥을 이어왔으나,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절터에는 국보인 삼층석탑 2기가 있다. 제일 윗부분인 찰주(擦柱)의 높이까지를 합하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석탑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이 탑은 고선사(高仙寺)의 삼층석탑, 나원리의 오층석탑 등과 함께 신라통일기의 전형적인 탑파양식을 따르고 있다. 1966년 동서로 나란히 있는 쌍탑 중 서삼층석탑에서 임금이 타는 수레의 형태인 보련형(寶輦形)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1996년 동삼층석탑이 해체수리되면서 서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것과 형태가 유사한 사리함이 발견되었고, 사리 10여과가 나왔다. 동탑의 사리함은 지붕인 천개(天蓋)의 양식이 서역의 영향을 받았음을 6세기에 조영된 중국 당대(唐代)의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 벽화 및 구조 등과 비교하여 알 수 있었으며, 1966년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가 진신사리(眞身舍利)임에 비해 동탑에서 나온 사리는 문무왕의 사리가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출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경주 감포 감은사지의 금당석재유구

경주 감포 감은사지의 금당석재유구 금당의 바닥구조가 H자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위에 직사각형의 석재유구(石材遺構)를 동서방향으로 깔아 마치 우물마루 모양으로 보인다.

경주 감포 감은사지 석탑(서탑)

경주 감포 감은사지 석탑(서탑) 우뚝 솟은 두 삼층석탑은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한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으로서 수십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만들어 조립식으로 세운 것으로 전체 높이 13.4m에 이르는 신라 삼층석탑 중 최대의 것이다.

경주 감포 감은사지 석탑(동탑)

경주 감포 감은사지 석탑(동탑) 우뚝 솟은 두 삼층석탑은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한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으로서 수십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만들어 조립식으로 세운 것으로 전체 높이 13.4m에 이르는 신라 삼층석탑 중 최대의 것이다.

경주 감포 감은사지 석탑

경주 감포 감은사지 석탑 우뚝 솟은 두 삼층석탑은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한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으로서 수십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만들어 조립식으로 세운 것으로 전체 높이 13.4m에 이르는 신라 삼층석탑 중 최대의 것이다.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국보)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국보)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용당리의 감은사터에 나란히 위치하고 있는 두 개의 통일신라 시대 탑으로서 국보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국보)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국보)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용당리의 감은사터에 나란히 위치하고 있는 두 개의 통일신라 시대 탑으로서 국보

경주 감은사지

경주 감은사지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용당리에 있으며 사적으로서 삼국의 통일 직후 문무왕이 짓기 시작하여 아들인 신문왕이 완공한 감은사가 위치했던 자리

경주 감은사 탑

경주 감은사 탑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용당리의 감은사터에 나란히 위치하고 있는 두 개의 통일신라 시대 탑으로서 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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