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상인

개성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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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자료

• 명 칭 : 개성상인
• 시 대 : 조선 후기(19세기 말~20세기 초)
• 설 명 : 송도(松都)상인.
송상(松商)으로도 불린다. 고려 개국 후 개성 근처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碧瀾渡)는 국제무역항의 구실을 하였는데, 근처의 개성 역시 고려의 수도로서, 외국사신의 빈번한 왕래에 의한 공무역(公貿易)과 외국상인에 의한 사무역(私貿易)이 번창하여 상업도시로서도 발달했다.

또한 개국 초부터 설치한 시전(市廛)은 국내 상거래는 물론 송나라 등 외국과의 교역도 활발하였는데, 이러한 무역과 국내 각지와의 상업활동은 주로 규모가 크고 상술이 앞선 개성상인이 담당했다. 개성상인에는 조선 창업과 함께 소외된 고려의 사대부 계층과 많은 지식인이 있었는데, 이들의 지식은 상업의 합리적 경영과 상술을 개발하여 나가는 데 큰 힘이 되어, 이미 서양보다 2세기나 앞서서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置簿法)이라는 독특한 복식부기를 고안하여 사용했다.

조선시대에 사무역 금지로 인해 큰 타격을 받은 개성상인들은 4대 시전과 문외(門外) 백목전 등 16종에 이르는 시전이 가지고 있던 전국 상업계를 연결하는 행상(行商)을 조직화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고 확고한 기반을 다져나갔다. 여기에 근면 성실과 높은 지식수준에 의한 상술의 개발로 서울 상인군과 쌍벽을 이루었다.

조선 중기 이후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에 따라 개성상인들은 지방의 객주(客主), 여각(旅閣)을 통해 상권을 전국적으로 확대, 조직화하여 송방(松房)이라는 지점(支店)을 전국 주요 상업중심지에 설치하였으며, 지점장격인 차인(差人)을 파견하여 지방 생산품의 수집과 매매를 하였다. 이들은 도고상업(都賈商業 : 매점 또는 독점상업)으로 상업자본을 축적하였다.

18세기에 이르러 개성상인은 중국, 일본 사이에서 인삼과 은을 중개무역하여 자본을 축적하였으며 이렇게 축적된 자본은 다시 인삼의 재배와 가공, 광산 개발 등에 투자하였다.

개항 후 외국자본의 침입에 대항하는 가장 강한 민간자본이었던 개성상인들은 외국자본에 의하여 철저히 봉쇄당하게 되었다. 특히 인삼의 수출권을 일본인에게 빼앗기면서 붕괴되어 갔다.

※ 자료참조 : 『민족의 사진첩 I - 민족의 심장』 / 최석로 해설 / 서문당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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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원형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