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

정치학

다른 표기 언어 political science , 政治學

요약 과학적인 분석방법을 통해 제반 정치현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보다 협소하고 전통적인 의미에서 정치학은 국가 및 국가의 기능을 담당하는 제도와 장치에 대한 연구를 가리키기도 한다.

오늘날 정치학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하나의 독립된 학문 분야로 인정되고 있다. 예컨대 프랑스에는 1871년에 창설된 자유정치대학(지금의 파리대학교 정치학연구소) 외에도 프랑스 정치학회가 별도로 운영되는 등 다양한 연구기관이 있다. 정치적 주제에 관한 사고는 고대의 동양 사상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지만 대다수의 정치학도들은 서양철학의 초기 시도들, 특히 정치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속에서 정치학의 뿌리를 찾고 있다.

흔히 정치학과 구별되는 것으로 정치철학이 있지만, 이들 사이의 구별은 정언적인 엄밀성이 결여되어 있다. 통상적인 분류법에 의하면 정치철학은 1차적으로 정치적인 사상들을 그 시대적인 맥락 속에서 문제로 삼는다. 정치철학은 연구 주제 및 대상의 성향에 있어 규범성이 강하며 연구방법론에서는 이성 중심적이다. 그에 반해 정치학은 규범적인 평가를 가능한 한 유보한 채 사회공동체의 통치제도와 정치행태에 관심을 가지고 최대한의 수량화 작업을 통해 객관적인 사실 자료가 함축하고 있는 기본원칙들을 추출해내려고 한다.

가치의 체계 및 위상, 정치적 의무·권리·정의·자유의 본질을 규명하는 것이 정치철학의 역할이라면, 정치학은 관찰과 계량적인 방법론을 통해 정치적 행태에 내재된 공통분모를 드러내고, 이러한 자료들로부터 올바른 추론결과를 이끌어내려고 한다. 전적으로 가치 중립적인 정치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는 몇몇 이론가들은 그 정치학과 정치철학의 구별을 극히 자명한 것으로 주장한다.

논리의 엄밀성을 위해서는 정치학이 과학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기 이전에 과학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과학을 사실에 근거하여 실증적인 방법을 통해 확증되고 계량화된 자료로 설명되는 일단의 조직된 지식체계로 규정한다면 정치학은 여타 사회과학의 제분야처럼 과학의 영역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의 범주를 자료대상에 대한 연구자의 통제가 가능하고,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실험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고도의 예측 가능성을 요구하는 수준으로 축소시킨다면 정치학에 붙은 과학이라는 칭호는 부적절해 보인다.

예를 들어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정치학을 크레덴다(credenda :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지적 근거들)의 분류체계 이상으로 간주하는 입장을 단호히 배격했다. 또한 보다 최근에 영국의 저술가 버나드 크릭은 자연의 법칙에 기초하여 인위적인 정치과학을 창출하려는 희망은 미국 특유의 기질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지만 미국 문화의 2가지 측면으로부터 생성·유지되어왔다고 지적했다.

즉 첫번째 측면은 정치를 심각한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장이라기보다는 공통의 신념을 지닌 여러 사회세력들간의 이해 조정의 장으로서 파악하는 자유주의적 이념이며, 2번째 측면은 과학의 가치나 기술문명의 장래에 대한 공동체 일반의 보편적인 신뢰감이다.

역사

초기의 경향

현대 정치과학의 기초는 진정한 사회과학을 탄생시키기 위한 19세기인들의 열정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러한 열의의 배후에는 자연과학의 급속한 발전이라는 자극이 자리하고 있었다.

탁월한 공상적 사회주의자였던 앙리 드 생 시몽 백작을 현대 정치학의 개조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별다른 무리가 없다. 그는 도덕과 정치의 문제는 능히 실증과학으로 성립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며, 대중의 신념을 좌우하는 이념의 권위는 주관적인 선입견이 아니라 객관적인 증거자료들 위에 축조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1822년 생 시몽은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오귀스트 콩트와 협력하여 〈사회공동체의 재건을 위한 개혁 정책 Plan of the Scientific Operations Necessary for the Reorganization of Society〉을 발표했는데 그들은 여기에서 정치과학은 사회의 물리학이 되어야 하며 사회물리학 연구의 목적은 불변하는 '진보'의 법칙을 구명하는 것이라고 기술했다. 신학적·형이상학적·실증적 단계라는 이른바 '인식의 3단계 구조'는 이러한 공동연구의 결과로 제시된 것이었으며, 콩트는 이러한 구조의 법칙을 스스로 '사회학'이라고 이름 붙인 사회물리학의 테마로 정립시키려고 노력했다.

비록 그는 공동체 내 사회결사의 한 형태, 즉 '국가'에 국한해서 정치학의 범주를 이해했지만, 정치학과 사회학의 지적인 연관관계는 이미 정치적·사회적 재생과 개혁이라는 초기의 계획도식에서 찾을 수 있다. 콩트는 관찰·실험·추상화의 과정을 사회현상 연구의 주요한 방법론으로 채택했다. 정치가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콩트는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정치적 실험이란 국가의 운영에 변화가 생길 때마다 현실로 행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를 수용한다 하더라도 역사적인 정치의 실험이 모든 변수의 통제가 가능한 화학이나 물리학 분야의 실험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정치·사회 현상의 객관적 연구에 대한 19세기인들의 지향은 국가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새롭게 발전된 인접분야의 연구성과들을 응용하도록 만들었다. 정치학은 인간행동의 다양한 측면들을 연구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인간 행동에 초점을 맞춘 기타 사회과학 분야들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게 되었다.

19세기에 이른바 '과학적'인 제연구가 개화하기 훨씬 이전에도 국가 및 통치 구조에 대한 많은 이론들은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실재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1159년 솔즈베리의 존은 생리현상을 유추하여 국가제도를 조명한 〈여러 정치가들 Policraticus〉을 남겼으며, 플라톤은 〈국가〉에서 국가 내 통치구조를 인성의 기본요소들로 형상화했으며, 〈사회계약론〉에서 정치적 질서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장 자크 루소의 '일반의지'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근거로 한 개념이었다.

19세기의 실증주의는 이와 같은 전통 속에서 국가연구의 새로운 방법론들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실증가치의 신봉자들 가운데 폴란드의 루트비히 굼플로비치는 콩트 이론의 토대 위에 찰스 다윈의 진화론과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적 다윈주의와 근대 인류학의 성과들을 결집시켜 하나의 독자적인 사회학을 정립시켰다. 굼플로비치에게 인류집단생활의 최초의 양태는 혈연으로 맺어진 씨족공동체였으며, 이러한 씨족집단들은 모계사회를 거쳐 가부장제로 전환했다.

요컨대 물리력을 기반으로 하고 정치권력을 통해 유지되는 국가의 형태는 자치집단 상호간의 투쟁 및 이해관계를 둘러싼 집단 내부의 알력으로 특징지어지는 일련의 사회진화과정들로부터 역사 현실에 등장했다. 굼플로비치를 비롯한 19세기의 정치사회학자들은 사회집단, 이해관계의 본질, 이익집단으로서 정당이 수행하는 역할, 정치문제의 배경을 이루는 사회적 맥락의 중요성 등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현대 정치과학의 선구자가 되었다(사회계약).

이탈리아인 빌프레도 파레토는 현대 정치학의 발아에 영양분을 제공한 19세기의 사회학자 중 초기의 한 사람이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살았던 그는 관찰과 추론을 포함한 논리실험주의적 사회학 연구를 주장했던 점에서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파레토는 정치학의 발전에 직접적인 충격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회학 연구는 2가지 측면에서 새로 움트는 정치과학 분야에 암묵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첫째, 그의 심리주의 사회학은 공동체 생활의 형성에 작용하는 구성원들의 신념·태도·견해·정서 등에 주목했으며, 이는 곧 심리학을 정치학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는 20세기의 연구 경향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둘째, 파레토는 인간 사회를 끊임없이 균형을 지향하는 하나의 시스템(체계)으로 파악했는데, 정치나 통치구조를 체계로 간주하는 이러한 관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학 강의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스웨덴의 정치이론가 헬렌 (요한) 루돌프은 19세기 사회학을 언급하면서 빠뜨려서는 안 될 비중있는 학자이다(헬렌). 지리적 결정론을 바탕으로 국가를 유기체적 요소와 지적·도덕적 요소의 결합구조로 규명한 그의 체계이론은 스스로 지칭한 바 '정치학'이라는 이름 아래 현대 정치학이론의 중요한 구획을 점유했다.

법학으로부터의 영향

사회학 이외에 역사적으로 정치과학의 발전에 기여한 관련 학문으로는 법학을 들 수 있다.

국가와 법률의 상호 연관관계는 국가는 국법을 제정하기 위한 권한, 즉 주권을 필요로 한다는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장 보댕의 가설로부터 16세기에 이미 시작되었다. 보댕의 가설은 국가에 관한 다양한 법학이론, 특히 연방과 제국의 본질규명에 역점을 두고 있던 19세기 독일의 공법이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보댕의 주권론은 단일정부체제에서 국법을 제정하는 군주의 권한을 부각시키려는 것이었으나, 독일 공법학자들의 열의는 연방 및 제국의 현실을 주권이론으로 설명하려는 데 경주되어서 이론에 부합되지 않는 현상들은 일방적으로 무시되었다. 보댕은 국가주권에 단일성과 전능성을 부여하여 군주의 주권은 불가분의 절대적인 권위로서 승화되었지만, 1871년 독일의 게오르크 바이츠는 중앙과 지방으로 주권을 분할시키는 '연방이론'을 구상했다.

1871년 이후 주권은 그 성격상 본질적으로 분리가 불가능하므로 연방제의 구성단위에나 중앙정부에 하나의 귀착점을 가져야 할 것이라는 막스 폰 자이델의 주장이 바이츠의 연방이론을 압도하는 듯했다. 오스트리아의 게오르크 옐리네크교수는 이러한 이론상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이른바 '주권국가'는 헌법과 법률, 연방국가의 구성단위의 제약을 받으며, 이와 같은 한계는 여타 상위의 권한으로부터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내재적 속성에서 연유한다는 학설을 전개했다.

결국 옐리네크의 논리는 개념상 국가 이상의 권한이란 국가 자체로부터 연유한, 스스로 마련해놓은 한계라는 내용으로서 국가의 권한과 권위를 군주주권이 향유했던 전능성의 차원으로까지 정당화시키는 공법이론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정치학 강의가 '헌법학'이라는 제명으로 법과대학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국가에 관한 법률이론이 정치학의 주류를 형성했었다. 그러나 뒤늦게 법학적인 접근방식을 극복하려는 노력들이 결실을 맺게 되어 레옹 뒤기는 국가권력의 사법적 규제원칙에 실증주의 사회학을 도입했으며, 모리스 오리우는 통치제도의 이론화 작업에 공헌했다(오리우). 영국의 경우 정치학은 1895년 런던정치경제대학이 설립되고, 1912년 옥스퍼드에 정식 정치학 강좌가 개설된 이후 독립된 연구 분야로 인정되었다(법철학).

미국에서의 발전

자연과학의 진보에 자극된 19세기 사회과학자들의 열정은 미국에서 개화하여 탁월한 정치과학자군이 배출되었다.

미국의 학계가 정치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세기 훨씬 이전이지만, 정치학이 윤리학·역사학·정치경제학의 곁가지 차원을 벗어난 것은 프랑스 자유정치대학에서 수학한 존 W.버제스가 1880년 컬럼비아대학교에 정식으로 정치학 강좌를 개설한 이후였다. 미국 내 정치학 교수단의 규모는 1900년을 지나면서 양적으로 확장일로에 있었으나 몇몇 주요대학의 경우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독립적인 정치학 강의가 개설되는 등 균등한 성장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정치학은 1800년대 후반 독일에서 대학원 과정을 수료한 일단의 연구자들로부터 학문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는데, 당시의 독일 정치학은 '국가학'이라는 명칭 아래 개념과 비유와 추론들이 하나의 분석적인 체계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현대의 독자들에게 그 성향이나 강조점에 있어 얼마간 형식적이고 원론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 즈음의 연구성과들은 역사·윤리·정치·경제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독자적인 학문영역을 확립하려는 정치학자들의 열의를 반영한 것이었다. 미국 정치학의 기수들, 예컨대 이와 같은 지적 조류에 동참했던 우드로 윌슨이나 프랭크 굿나우는 18세기 시대 정신의 산물인 공동체 역학구조의 완전한 조화를 지향했던 연방헌법과 통치제도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뉴턴 이상으로 다윈적 세계관에 영감을 받고 있었던 윌슨은 제도분석적이고 정적인 연구방법에서 탈피하여 미국의 정치과학을 사회 내 제반현상들을 대상으로 삼는 보다 동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로 전환시킴으로써 '현실주의 정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전통을 수립했다.

1908년 〈통치의 과정 The Process of Government〉을 펴낸 아서 F. 벤틀리는 당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지만 1930년대와 195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 정치학계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군림했다.

출판 즉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통치의 과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학의 정설로서 부각된 일련의 새로운 주제들을 제시했다. 벤틀리는 첫째, 모든 형이상학적 추론과 규범적인 공식체계를 허상이나 무가치한 정신의 폐물로 단정하고 정치학의 연구대상은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관찰 가능한 '사실'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둘째, 정치학의 기본개념을 공동체를 형성하는 '내부 집단'으로 설정하고 '국가'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모든 가설체계들을 부인했다. 셋째, 정치현상의 실질적 구성요소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행태'와 이들을 유도하는 복잡한 '과정'들이며, 구성원들의 활동은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입법·사법·행정 기능으로 발현된다고 주장했다.

그가 남긴 유일한 정치이론서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세인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고, 1950년대 미국 정치학의 관심영역을 정치행태와 정치과정의 측면으로 돌려놓았다. 기술적인 제도분석 연구방법의 종말을 예견했던 점에서 벤틀리는 시대를 앞섰 던 인물이었다. 그는 집단과정의 본질 규명에 첫발을 내디뎠던 굼플로비치의 연구성과에 찬사를 보냈다.

벤틀리가 보는 굼플로비치는 '개인을 사회공동체의 출발점으로 간주하는 18세기적 미몽을 물리치고, 제반 사회현상을 잉태하는 집단간 상호작용의 중요성을 지각했던' 19세기의 선구적인 사회연구가였다.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정치분석을 위한 벤틀리의 시도가 단시일 내에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동안, 같은 목표를 지향하는 조금은 색다른 움직임들이 성공적인 반응을 얻게 되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시카고 학파'는 이들 새로운 경향에 추진력을 제공했으며, 이들을 지도했던 대표적인 이론가는 찰스 E. 메리엄 교수였다.

〈정치학의 새로운 국면 New Aspects of Politics〉(1925)에서 그는 정치학 분석방법론의 개선을 위해 관찰, 경험, 수량화 작업을 통한 보다 많은 통계자료의 활용이 요청되며, 정치학·내과의학·정신의학·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현실 상황을 미루어 조속한 시일 내에 지적인 사회관리기술이 탄생될 가능성이 적지 않음을 예견했다.

메리엄의 사고 토대를 형성했던 기초자료는 사회구성원들이 갖는 각양각색의 태도였으며, 이러한 점에서 정치학은 심리분석적인 통찰력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정치학에서 시카고 학파의 연구경향이 전적으로 충격적인 혁신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영국의 그레이엄 월러스가 〈정치에서의 인간본성 Human Nature in Politics〉(1908)에서 새로이 정립될 정치학은 계량적인 방법론에 기초하여 비정상적인 행태 및 무의식적인 단정과 같은 정치생활 내면의 심리적 요소(인간본성)에 유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월터 리프만 역시 〈여론 Public Opinion〉(1922)에서 이와 거의 유사한 견해를 피력했기 때문이다(월러스). 정치학과 심리학 사이의 상호연계성을 강조한 시카고 학파의 이론가로는 〈정신병리학과 정치학 Psychopathology and Politics〉(1930)을 저술한 해럴드 라스웰을 들 수 있다.

그의 역저 〈권력과 인성 Power and Personality〉(1948)은 초기의 프로이트적 심리연구와 추후의 권력이론을 이어주는 성격을 갖는다.

시카고 학파의 양대 지주인 메리엄과 라스웰은 거의 같은 시기에 권력현상을 경험주의 정치학 연구의 중심부에 가져다놓은 이론적 결실들을 발표했는데, 1934년 메리엄이 펴낸 〈정치권력 Political Power〉과 라스웰의 〈정치학 :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획득하는가 Politics : Who Gets What, When, How〉(1936)가 바로 그것이다.

메리엄이 권력의 생성과정, 권위의 크레덴다(credenda)·미란다(miranda)·어젠다(agenda), 권력담당자들의 통치기술, 권력의 남용과 상실 등의 규명에 노력했던 데 반해, 라스웰은 영향력과 권력자들의 행태를 자연주의에 입각하여 입문서를 저술했는데, 메리엄의 저서가 다소 추상적·수사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는 반면 라스웰의 설명이 보다 더 경험논리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정치연구의 발전에 기여한 시카고 경험주의의 결정체는 이들에 앞서 메리엄과 해럴드 F. 가즈널이 공동집필한 데이터 표본추출방법의 연구서인 〈기권의 문제, 통제의 목적과 수단 Non-Voting, Causes and Methods of Control〉(1924)이었다. 이후 실증주의 정치학의 투표행태 및 선거결과의 연구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가치중립적인 정치학을 모색하기 위한 이들 연구자들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학계에는 시카고 학파의 규범 편향성에 대해 2가지 지적이 제기되었는데, 하나는 시카고 학파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맹신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련의 이론작업을 통해 민주주의 제도를 개선시키려는 진지한 노력을 경주해왔다는 것이었다.

1945년에 미국의 정치학은 제도 및 법률, 통치구조, 절차 및 규칙 등에 대한 종래의 관심을 떨쳐버리게 되었다.

정치의 정적 구조뿐만 아니라 역학 과정에 대해서도 상당수준의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압력단체와 로비 활동, 공공행정 이면의 막후 정치공작, 공식 행정절차와 구분되는 관료주의의 실상, 정계의 유력 인사와 정당활동, 선거구민에 대한 소수민족집단의 영향력 등에 대해서도 다양한 연구들이 진행되었다. 미국 정치학의 관심대상은 이 모든 양상들이 극명하게 보여주듯이 규범 중심의 형식 구조로부터 정치행태의 실제 현상으로 옮아가고 있다.

유럽의 연구상황

미국을 떠난 정치학은 대개 계량적이고 행태적인 성향으로부터 멀어졌다.

프랑스의 정치학에서 통치제도 연구의 전통은 법학적인 색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헌법학이나 역사학이 대세를 좌우하는 가운데 전부는 아닐지라도 법률적인 시각에 준한 정치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었다. 1913년 앙드레 시그프리드가 〈제3공화국 치하의 프랑스 서부 정치표 Tableau politique de la France de l'Ouest sous la troisième République〉를 통해 지리적·역사적인 선거행태 연구를 소개한 바 있으며, 에밀 뒤르켐등의 사회학 이론이 정치학 분야에 응용되기도 했다.

영국에서도 계량적 분석방법론은 거의 빛을 발하지 못했으나 정치철학 분야에서만은 사회공동체의 집단행태에 초점을 맞춘 이론화 작업이 결실을 맺었는데, J.N. 피지스, G.D.H. 콜, 어니스트 바커, 해럴드 라스키등의 연구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그밖에도 스웨덴의 헤르베르트 팅스텐이 엮어낸 〈정치행태 : 선거통계학 연구 Political Behaviour : Studies in Election Statistics〉(1937)는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보편적인 연구 주제로서 폭넓은 각광을 받게 되었다.

현대 정치학의 연구방법론

행태주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정치학의 주류는 행태주의 정치학이었다. 미국 정치학회 회장을 지낸 한 원로연구가는 행태주의의 득세 원인을 6가지 조건, 즉 ① 시카고 학파의 왕성한 연구활동, ② 1930년대에 유럽, 특히 독일로부터 이주해온 정치학자들의 사회학 편중성, ③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이론가들이 정계와 행정부에 몸담았다는 점, ④ 재단의 행태연구 지원, ⑤ 투표행태 분야 등에서의 표본조사 기술의 발전, ⑥ 사회과학연구협의회의 호응의 상호작용으로 풀이했다.

'행태주의'라는 용어가 다양한 정치이론서에 거리낌없이 등장하고 있지만 그것이 연구분야에 관한 개념인지 아니면 방법론이나 접근방식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모호하다. 〈행태주의 정치과학 Behavioral Persuasion in Politics〉(1963)의 저자 하인스 율러는 행태주의가 갖는 설득력은 인간의 정치적 행동 및 그 행동에 부여된 의미들과 상관되어 있기 때문에 연구가들이 개념의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행동과학). 그러나 이에 대해 로버트 달과 같은 유력한 정치학자는 행태주의란 하나의 연구경향, 즉 하나의 과학적인 탐구자세를 가리킬 뿐이라고 설명한다.

행태주의 연구가 고전적인 접근방식과 비견될 만큼 내실을 갖춘 것도 사실이고, 이의 옹호자들이 자신들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과거의 방법론들은 더이상 실효성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자신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의 지적은 행태주의 운동이 무엇보다도 경험주의적 관심이 다시 고개를 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25년간을 상징하고 있는 점에서 한 시대를 특징 짓는 이론이었지만 그 이상 미화되면 곤란하다는 입장을 피력한 것이다.

체계이론

전통적 연구방식과 같은 일관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현대의 정치학은 개념이나 방법론에서 괄목할 만한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경험적인 증거자료를 추출해내기 위한 시도들이 연구분야와 연구과제를 필요 이상으로 분산시켰고, 지극히 자명한 결론을 힘들여 이끌어내는 어리석은 일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지만, 사반 세기에 걸친 행태주의 정치학은 그 분량에 있어 엄청난 연구결실일 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로 자극제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행태주의의 보편적인 가설 중의 하나는 정치의 본질이 공적 통치구조의 안팎에서 개인과 집단들이 펼쳐나가는 상호작용과 행태의 흐름, 즉 '일련의 과정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흐름의 과정에 형태를 부여한 가장 주목할 만한 발상이 바로 '시스템'(체계) 개념이다.

이른바 '체계이론'은 개별적인 인간에도, 다수의 대중에도, 공동체 내부의 집단들에도 연구의 초점을 두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은 실증주의 연구서인 〈정치체계론 The Political System〉(1953)에서 정치의 체계를 전사회체계의 일부로 한정지었다. 이스턴에게 정치체계란 사회공동체의 정책들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행태 및 활동들, 즉 '정책결정 과정들'로 이루어져 있다. 정치행태의 판단기준은 그것이 '사회 내 제반 가치들의 권위적인 배분'과 관련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이스턴 정치연구의 주제와 내용은 정치학은 사회 전반의 가치 양태와 그 분배에 결부된다고 하는 해럴드 라스웰의 주제의식과는 차이가 있었다.

물리학과 생물학 이론에 힘입은 큰 체계의 개념에서는 한 체계구조와 그 외계를 형성하는 환경의 상호관계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한 체계구조로 유입되는 요구의 인풋(input : 투입·입력)은 정책결정이나 시행조치와 같은 아웃풋(output : 산출·출력)으로 변환되며, 이들 아웃풋이 사회 내 제반 가치의 권위적인 배분, 즉 체계가 제공할 수 있는 부·권력·지위와 같은 보상가치의 분배를 구성하는 것이다.

모두 체계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고 다소간 인접 학문분야의 체계 모델을 바탕으로 존재의 형태를 상정하고 있기는 해도 체계분석의 영역 속에는 다양한 이론양식들이 개발되어왔다.

공학적 모델과 아이디어로부터 출발한 일단의 이론가들은 정치체계의 일반이론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이스턴의 입장을 부인하고 있으며, 인공두뇌학(cybernetics)에 의존한 또다른 이론가들은 정치 체계를 하나의 정보망으로 조명하고 있다. 체계개념의 해설자들이 스스로의 연구를 과학적인 이론으로 자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역시 하나의 새로운 분류체계일 뿐이라는 비평의 목소리 또한 고조되어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체계분석이론이 정치현상의 예측 가능성을 제고시키려는 바람에서 다수의 정치학 용어들을 잉태시켜왔으며, 국가나 주권과 같은 전통적인 언어표현들을 대신하여 인접 과학과 통계학의 영향으로 체계, 인풋과 아웃풋, 피드백(feedback : 되먹임·귀환), 순환고리, 네트워크(망상조직), 정통성의 상징, 정보의 저장과 회수, 정치사회화, 클러스터 블록(cluster bloc), 여론의 수렴과 표출, 제로섬 게임(zero-sum game), 거시정치학과 미시정치학 등의 신조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의사결정이론'은 인풋이 아웃풋으로 변환되는 체계과정에 대한 연구로서 널리 인식되어왔지만 그 이전에 체계이론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결정이론). 민간전승과 고대의 문서자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의사결정연구를 고무했던 변수요소는 현대 정치학의 '게임 이론'이었다.

의사결정이론의 주요 분석대상은 이성적인 의사결정행위자이며, 그 연구과제는 주어진 목표가 합리적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달성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과 수단을 선택하는 일이다. 의사결정이론의 연구가들은 전반적인 체계구조보다는 그 이면의 핵심부위에 해당하는 의사결정행태 및 행태과정들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른바 '계량법학'(jurimetrics)이란 재판관의 의사결정행태를 다룬 의사결정이론의 하부구조이다.

정당·이익집단·엘리트 연구

체계구조의 윤곽 속에 있는 이익집단·정당·엘리트의 주제들 역시 나름대로 독자적인 기원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사회 내부의 제반 이해관계를 집적·표출시키는 이익집단과 정당은 환경으로부터 정치체계로 이익의 요구라는 인풋을 제공하며, 이러한 투입요소들은 의사결정과정을 통해 아웃풋, 즉 가치의 권위적인 배분으로 구현되어 나온다. 사실 이익집단에 대한 근대적인 분석은 행태주의의 탄생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미 1920년대에 금주법 지지론자들과 기타 압력단체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고개를 들었으며, 1930, 1950년대에는 벤틀리 정치이론의 가치가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보다 일반적이고 이론적인 접근방식들이 성행했다.

'엘리트 이론'은 적어도 1936년을 전후하여 라스웰의 권력심리연구로부터 출발하고 있었으며, 1950년대에는 애틀랜타·시카고·뉴욕·뉴헤이번 등의 대학교를 중심으로 지역사회연구의 서두를 장식하게 되었다. 사회학상 오랜 역사를 지닌 엘리트 이론이 정치학 영역에서 특별한 의미를 함축하게 된 까닭은 민주주의적 평등가치의 측면에서 볼 때 엘리트의 존재라는 것이 하나의 구조적인 해악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정치학도들은 가치중립적인 정치과학을 정립하겠다는 공공연한 다짐에도 불구하고 엘리트 연구가 설 자리를 빼앗는 전통 민주주의의 윤리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적 태도 및 투표행태 분석시론

학계 일각에서 '행태주의의 혁명'으로 일컬었던 정치과학 방법론상의 진보는 여론, 정치적 태도, 선거행태 등의 분야에서 대대적인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여론조사에의 통계학 도입과 투표행태분석방식의 개선, 새로운 조사연구 개념의 발전은 여론 및 정치적 태도의 분석 수준을 1920년대 메리엄의 출발로부터 과학적 실증연구의 지향 목표로 대폭 근접시켰다. 미시간대학교 부설 표본조사연구 센터는 미국 내 선거·투표 데이터 수집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해왔다.

최근의 연구동향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정치과학을 창출해내려는 미국 정치학계의 열의가 과학적인 실증분석의 척도에 있어 빛 바래지 않은 공헌을 남겼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지만 비판의 목소리 또한 이에 동반하여 강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 이른바 '과학주의'의 반대자들은 사회 생활 전반에서 인간의 자발성과 가치들을 묵살하고 있는 기계적인 결정론의 폐해를 고발하고, 현대의 정치학은 본질적으로 기술 우선주의 문명의 부산물일 뿐이며 비합리적이고 일괄통제가 불가능한 사회복합체 속에서, 이성과 논리를 추출해내려는 일련의 시도들은 영구히 응답을 얻지 못할 몸부림에 불과한 것이라는 비판을 전개했다. 정치적 데이터 자료의 계량화에 숙련도와 완성도를 부여한 현대의 정치과학은 학문의 범주나 하부 연구영역의 구분에 있어 실제로 어떠한 규준도 마련한 바가 없었으며, 기본적인 연구의 초점에 대해서도 그것이 권력이 되어야 할지, 정부나 체계과정, 의사결정 또는 정책수립행태가 되어야 할지, 다양한 견해들이 난무하고 있을 뿐 좀처럼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주체성의 문제'가 규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가지 새롭고 창조적인 연구방법론들이 개발되어왔지만 폭넓은 합의에 바탕을 둔 정치행태의 일반이론이란 시기가 요원한 미래의 과제로서 그 해결을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미국 이외의 지역에 규범성을 탈피한 경험주의 정치과학이 알려지기는 했으나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여타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정치연구가들은 정치이론 및 법률학의 역사와 관련하여 독창적인 결실을 얻었으며 '정치과학'으로 지칭될 수 있는 실증적이고 비규범적인 연구 또한 모습을 드러냈다.

예컨대 R.T. 메켄지와 D.E. 버틀러는 정당과 투표행태, 압력단체의 관찰·분석에 힘을 기울였고, 이익집단에 대한 S.E. 파이너의 이론과 독일 선거행태에 관한 U.W. 키칭거의 연구 또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프랑스의 경우 모리스 뒤베르지에와 프랑수아 비용 그랑이 교육기관을 통한 아동들의 정치사회화 과정에 각각 주목하고 있었으며, 덴마크에서는 1959년 오루스대학교에 정치연구소가 설치되면서 정치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1956년 핀란드에서는 투표행태를 대상으로 한 최초의 포괄적인 실증분석이 진행되었다.

일본의 사회과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개화기를 맞이했지만 정치과학은 그 주제대상과 방법론을 둘러싼 이견대립으로 다른 사회과학 분야에서와 같은 발전 속도를 보이지는 못했다. 이러한 초기의 어려움은 일본 정치학계의 시조 오노즈카 키헤이지[小野塚喜平次]의 〈정치학의 제원리 政治學の諸原理〉(1903) 속에서도 충분히 언급되고 있으나, 공무원과 통치기구의 행태 및 기능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가 가능해지면서 체계분석과 정치문화·정치발전·정치과정 이론들을 포함하는 실증적인 정치연구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과거 공산진영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더라도 정치적 주제에 대한 객관적인 조사연구에 적지 않은 장애가 수반되게 마련이었지만 몇몇 정부당국의 자유방임적 입장 전환에 힘입어 전문적·과학적인 정치분석이 촉발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던 곳은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에서였으며, 뒤이어 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정치과학을 하나의 독립적인 학문영역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소련에서 정치학은 공식적인 당국의 인가를 받은 적은 없었으나 1962년 '구체적인 사회과학적 조사연구'를 표방한 과학 아카데미의 성명서 발표는 경험분석을 지향한 그간의 암묵적인 시도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이에 따라 서구적인 표본추출방식을 이용한 여론조사들이 활성화되었으며, 1969년에는 V.G. 칼렌스키가 〈미국의 정치과학 : 부르주아 권력개념의 비판 Politicheskaya nauka v SShA : Kritika burzhuaznykh Kontseptsy vlasti〉을 펴냄으로써 정치학 분야에 대한 소련 학계의 관심이 명백하게 표출되었다.

정치학 연구에 대한 당국의 정식인가가 내려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정치학회의 연례회의에 꾸준히 대표단을 파견하고 있는 소련 정치학회는 통치구조와 국가법률에 정치연구의 핵심을 두고 있으며, 부르주아 정치과학의 소위 '반마르크스주의적 편향성'을 지적하면서 규범적인 단언과 비판을 계속하고 있다. 특기할 만한 일은 정치학회 회원인 F.M. 부를라츠키는 1965년 관영 〈프라우다 Pravda〉의 논설을 통해 사실 자료분석을 통한 실증정치학의 정립을 호소한 바 있었다.

1951년 유고슬라비아에 정치학회가 창설되었고 1962년 자그레브대학교에 정치학 강좌가 개설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65년 정치학회를 발족시킨 이후 곧바로 세계정치학회에 가입했으며, 1968년에는 루마니아에도 정치학회가 설립되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정치학계가 정치이론·비교정치·국제관계론 등의 전통적인 연구분야에 주력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폴란드에서는 정치행태 및 정치과정, 지역사회의 권력구조, 투표행태, 여론동향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으며 상당 수준의 세련된 분석방법론들이 채택되고 있다.

국제정치 이론의 역사적 발전

20세기의 정치학

20세기에 국제관계와 외교정책에 관한 학내 연구가 눈부신 성장을 이루게 된 배경으로 대략 3가지의 영향력을 생각해볼 수 있다.

지리학·역사학·법학·사회학·심리학·일반정치이론·철학 등과 연관되어 있으나 이들 영역에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학문분야가 대두되었다는 것이 그 첫번째 추진력인데, 국민·사회·정부·경제 체제 사이의 제반관계를 이끌어나갈 보다 바람직하고 효과적이며 덜 위험한 수단과 방법을 기대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2번째 유인요소는 체계적인 관찰과 조사야말로 인간의 미몽을 깨게 하고 사회공동체의 진보를 앞당길 수 있다는 신념에 근거한 전례 없는 현대의 지적 분위기에서 연유한다. "모든 것은 예외 없이 검토되어야 하며 거리낌없이 의심받아야 한다"는 드니 디드로의 18세기적인 언명은 계몽주의·과학주의의 경구로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다.

3번째 영향력은 외교 부문을 포함한 '정치문제 전반의 대중화 현상'으로부터 자극받는 것이다. 외교 및 군사 문제가 통치자나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국민의 중요한 관심사이자 책임이 되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19세기 말엽의 일이었지만, 이로써 교과과정 속에 외교연구가 포함되어야 하며 그 연구의 초점은 국제정치와 군사문제에 대한 공공의 이해에 맞추어져야 한다는 발상이 논거를 얻게 되었다.

민주주의에 승리를 안겨준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이후로 국제관계 연구에 보다 많은 노력이 경주되어야 하고, 상아탑은 조사연구와 강의를 통해 이 분야에 대한 종래의 무관심을 떨쳐버려야 한다는 인류 공통의 확신을 강화시켜 주었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여명기

상아탑 내에서 국제정치학 연구가 활성화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였다.

강의와 조사분석을 위한 다수의 연구소, 연구 센터, 전문학부들이 신설되었고, 교과과정이 마련되고 개론서와 교과서들이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개인 연구소의 설립 또한 붐을 이루었으며, 자선사업기금의 상당 부분이 학술지의 발행과 세계문제 전문가의 양성을 위한 특별교육원, 국제회의, 세미나 대학 내의 연구보조를 목적으로 할당되었다.

학계의 주목을 끌었던 연구 주제는 크게 세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발아한 것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혁명적 격변기를 거치면서 러시아 및 독일 제국의 기록보관소가 개방되었고, 다량의 기밀공문서들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줄지어 간행되었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던 열강들의 동맹구도·비밀외교·군사전략의 전모를 밝혀내려는 흥미로운 연구성과들이 발표되었고, 이렇게 짜맞추어진 증거자료들에 힘입어 제1차 세계대전의 제반 원인들이 해명될 수 있었다.

'외교사'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20년 동안에 바야흐로 그 절정을 맞이했으며, 국제관계이론의 주류를 형성했던 인물들은 다름 아닌 당대의 탁월한 역사가들이었다. 이들은 창조적인 열정을 가지고 최고의 외교사학 연구성과들을 창출해냈다.

국제연맹의 출범과정이 말해주듯이 학계의 관심을 집중시킨 2번째 주제의 배후에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지향한 희망과 기대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1920년대를 전후하여 설립된 국제관계의 전문학부들은 일차적으로 세계정부의 여명을 대비한 전문 행정관료의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국제연맹의 탄생과 조직구조, 세계연합체 결성을 위한 초기의 시도들, 국제기구 및 국제법의 문제와 절차분석 등을 중심으로 일련의 심도 있는 연구분석들을 진척시켰다(행정공무).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초기시대를 대표했던 3번째 연구분야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주의 운동으로부터 파생되었으며, 전쟁의 원인과 비용, 그리고 전쟁의 사회심리학적 측면에 주목하는 학계의 연구동향과 관련되어 있었다.

전쟁 연구로 발굴된 다양한 증거자료나 해석론들과 함께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에 대한 궁극적인 문제의식은 경제학·사회학·심리학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처음으로 국제정치 영역에 끌어들였다. 가까운 미래에 국제관계론은 바로 이들로 인해 행태주의 접근방식과 조우하게 될 것이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제연맹의 입지가 약화되고 파시즘의 대외팽창정책이 또다른 세계대전을 예고하면서 세계정부와 평화주의의 대의를 향한 학계의 반발이 야기되었다.

이상주의와 도덕론에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고 이른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된 것이다(현실 정책). 국제정치연구의 발생단계가 현실정치의 가혹함을 도외시한 관념적 이상주의자와 평화를 꿈꾸는 몽상가들의 낡아빠진 수작업으로 점철되었다는 비판의식은 올바른 지적이라고 평가하기가 어렵다.

1920, 1930년대의 국제관계연구는 실제로 광범위한 자료에 기초할 뿐만 아니라 기본개념의 설정에 있어서도 건전한 발전과정을 밟아가고 있었다.

오늘날 최근에 이루어진 참신한 시도로 여겨지고 있는 논제들 가운데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20년 동안에 뿌리를 내린 것들이 적지 않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촉발될 무렵에는 상당 분량의 연구성과들을 보유하게 되었다. 특히 도덕주의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려는 목적에서 출발한 당시의 몇 가지 논제들을 예시한다면, 소수민족집단과 국제문제의 연관관계, 인구의 증가가 외교정책에 미치는 영향, 천연자원과 생명유지장치 및 국제정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지정학적 위치와 영역이라는 변수가 갖는 국제관계의 군사전략적 측면, 즉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가 각 국가주권에 미치는 영향, 국가간의 경제적인 불평등 구조, 여론의 역할, 국제문제에서의 민족적·문화적 다양성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이러한 독창적인 시론들은 이론적 깊이가 결여된 채 얼마간 사실의 기술에 치우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유감없이 그 진가가 발휘되고 있다.

1930년대의 여러 이론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정치학 발전에 선구적인 공헌을 했기 때문에 주목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라스웰은 국제정치와 상징·인지·이미지와 같은 심리학 요소들의 상관관계에 초점을 맞추었고, A. 카디너와 동료 연구가들은 국가의 행태 및 문화의 분석에 심리인류학적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인기를 누렸지만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F.L.슈만은 현실 국제문제에 대한 다양한 논평들을 연구 검토하는 외교정책 분석기법을 소개했으며, 이러한 분석방법은 정부의 외교정책담당 보좌관이나 매스미디어의 국제문제 해설위원들을 통해 지금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처음으로 공동연구계획을 추진했던 퀸시 라이트는 폭넓은 접근방식을 동원해 전쟁관계이론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국제정치행태의 다양한 국면들을 연구·조사했으며, 그밖에도 카를 J. 프리드리히, 해럴드 스파우트, 니콜라스 스파이크먼, E.H. 카, 부룩스 에머니 등을 포함하는 저명한 이론가들이 이후 권력정치이론으로 알려지게 되는 국제관계연구의 주요방법론들을 발전시켰다.

그로부터 30년 뒤 사람들은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 이루어진 국제관계이론의 개념과 광범위한 연구범주의 진가를 깨닫게 되었다.

1930년대의 연구성과들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정부의 관심대상이 되어 정보·선전·정치분석의 영역에서 십분 활용되었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제1·2차 세계대전은 국제문제의 체계적·과학적인 분석에 하나의 자극제가 되었다. 한편 전쟁은 국제관계연구의 분수령으로 작용했다. 국제정치학은 그 분석 주제에 있어 극적인 전환을 이루게 되었으며, 전쟁 이후의 학문적 토양은 초기에 관심을 끌어오던 문제들이나 강조점으로부터 크게 이탈되어 있었다.

정치학계는 잡다한 주제의 세심하고 산만한 조사 분석을 종단하는 국제정치의 본질적인 구조를 모색해야만 했다. 이론화 작업에 대한 학계 저변의 목마름이 있었던 것이다.

전후의 연구동향 :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득세

1948년 초판이 간행된 한스 J. 모겐소의 〈국제관계론 Politics Among Nations〉은 체계적인 이론형성을 원하던 전후 학계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1959년 스탠리 호프먼 교수는 정치학도 대다수의 생각을 반영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미국 국제관계 논의의 중심이 되었던 이론은 한스 J. 모겐소 교수의 권력정치이론이었다." 모겐소의 역저는 호프먼의 이러한 평가가 내려질 무렵 국제관계이론의 대표적인 교과서로서 공산권을 제외한 서방진영 전체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평이한 언어구사로 탁월한 논증에 도달한 〈국제관계론〉은 정치학도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입문서이자 국제관계연구의 위대한 결실로서 지금까지도 그 명성을 잃지 않고 있다.

현실주의 정치이론의 핵심은 '이해관계'의 개념에 있었다. 정치란 국내외의 배경을 불문하고 하나의 '권력투쟁과정'으로서 정의된다. 인간의 본성에 기인하는 권력투쟁은 '경쟁'이나 '이해관계의 결합'이라는 형태로 사회공동체 속에 발현된다. 사회 내 제세력들이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판단하고 있을 때 상호협력은 이루어지지만 이해관계가 상충하게 되면 대립·경쟁, 나아가 투쟁과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일련의 정치적 수완은 세력간 '이해관계의 상호조정'을 가능하게 만든다.

주권국가들로 구성되는 국제체제 속에서 개별 국가나 체계 자체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국가이익의 추구와 현실에 입각한 국력의 산출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국가주권의 체계가 엄존하는 한 국제정치의 장에 참여하는 건설적인 유일한 길은 세련된 외교수완을 발휘하는 데 있다.

이념적이고 종교적인 개혁운동은 개별 국가와 세계 질서에 파멸을 몰고올 뿐이며, 정치적인 재앙은 국가주권의 인류 보편적인 신뢰와 협력의 지향으로 근접시키려는 일단의 개혁 시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1940년대 후반에 대두된 현실주의 권력이론은 도덕론과 법률 만능주의에 기초하여 국제문제를 해결하려는 관념적 이상주의에 대한 방호벽의 역할을 담당했지만 현실주의의 비판에 도전하는 이상주의 진영의 반론은 더이상 제기되지 않았고, '대논란'에 쏠린 학계 일반의 관심 또한 시간과 더불어 소멸되어갔다(관념론).

대다수의 국제정치학자들은 이른바 '권력정치의 이론'을 수긍하거나 거부하지도 않았다.

학계의 일부에서는 오히려 색다른 국제관계이론과 연구에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1950년대에 막대한 연구자금이 외교연구분야에 투입되었으나 일반이론의 구명을 위한 집요한 노력들은 국제정치학의 자기 정체성 확립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론이나 연구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본성과 역사적 과정들에 착안해야만 한다"라는 모겐소의 입장에 공감하던 이론가들조차도 현실주의적 개념화 작업이 국제관계의 실제 행태들을 설명하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함을 절감하고 있었다.

행태주의의 10년간(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확실한 체계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참신한 아이디어, 개념, 분석 모델, 패러다임 등으로 구성된 행태주의 이론은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제정치 연구의 중요한 경향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현실주의 대 이상주의 논쟁에 쏠린 학계의 관심을 희석시켜갔다.

1950년대 중반기에 자료편성에 관한 다양한 기법들과 새로운 연구방법론들이 도입되면서 연구자들의 의사소통 기반은 상당한 동요를 겪게 되었다. 권력정치이론을 비롯해 의사결정이론·체계이론·갈등이론·억지이론·가능성이론·현장이론·의사소통이론·통합이론·발전이론·환경이론·인지이론 및 게임 이론 등 각양각색의 꼬리표가 붙은 개념적 혁신물들의 출현은 국제관계 연구가 일관성의 상실을 겪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학계 일반의 불안과 우려감을 충분히 설명해준다.

학계의 노력은 행태주의의 10년 동안에 이들 잡다한 이론의 상호이해·비교·해석·통합을 위해 경주되었으며, 하나의 체계적인 이론적 기틀을 마련하려는, 즉 하나의 관념적인 이론도식을 작성해내려는 데 그 지향점이 있었다.

이론적 통합에 집중된 1950년대의 관심과 그 과정에서 드러난 많은 문제점들을 서술하려면 책 1권의 분량을 요구하는 방대한 작업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론들의 상호비교와 일단의 통합 노력들이 지극히 어려운 작업으로 판명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번거로운 설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일련의 연구들이 깊이를 더해가면 갈수록 이론가들은 포괄적인 이론구조 확립에 대한 필요성 자체에 의구심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국제관계의 실체가 복잡다단한 양상을 띠고 있는 상황에서 국제문제의 해명에 잡다한 여러 가지 이론들이 소용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관계의 추진력을 하나의 원인요소 속에서 발견하려는 이론들은 점차적으로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국가간 권력투쟁의 원리가 과거와 현재의 국제정치 현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가설체계로 받아들여질 수는 있지만 기타 모든 관계 요소들이 권력이론에 종속되고 권력이론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은 국제관계의 중요한 현상들을 상당부분 도외시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별 국가의 특성에 따라 국제관계에 참여하는 국가행태의 특성이 아동들의 사회화 양태에 의해 규정된다는 견해는 매우 단순할 뿐만 아니라 설득력을 담보할 수도 있는 이론이지만, 이로 인해 기타 유력한 가설체계들이 배제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론이 갖추어야 할 보편타당성이 결여된 것이다.

국제정치를 계급간 투쟁의 역사적인 발현으로 간주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 또한 단일요인에 의한 본질 해명이라는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계급투쟁).

10년 동안 행태주의가 일으킨 국제관계의 연구 경향은 사회공동체가 갖는 다원적 구조와 이에 근거한 다원적 인과관계 및 이론설명들을 수용하도록 만들었다. 이와 같은 시각을 바탕으로 이론가들은 국가간 권력투쟁이라는 모겐소의 관념과, 국제정치는 사회 내 제계급 사이의 범세계적인 투쟁 양태라는 공산주의적 발상이 모두 투쟁과 갈등이라는 인간의 본성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이들과 다른 가설들을 포괄하는 일반 이론은 이른바 '갈등이론'이 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국제관계이론의 통합화를 지향한 학계의 열망이 1960년대에 갈등이론이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와 더불어 국제정치의 갈등현상을 얼마간 상이한 관점에서 해부하는 통합이론 및 게임 이론이 갈등이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행태주의가 끝나갈 무렵 다원주의적 연구경향은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에서 대다수의 국제정치 연구가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서구의 연구성과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러시아 연방의 이론가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자본주의 진영의 이론은 절충주의적 속성을 면하기 어려우며, 과학적인 마르크스주의에 근거를 둔 자신들의 이론에 비하면 난삽하기 그지없는 것일 뿐이라는 평가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단언은 서구의 국제관계이론들이 이미 사회주의에 소개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방법론과 행태주의 이론 사이에 내밀한 경합들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주는 것이었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강의실이나 연단에서 쉽고 명쾌하게 제시될 수 있는 일반이론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국제문제를 보는 학계의 관념이 다원주의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을 때, 현실주의 권력정치이론은 국제정치현상을 설명하는 비교적 단순하고 포괄적인 이론으로서 독보적인 위상을 점유하게 되었다.

학계 전체를 통틀어 '생물학의 일원적 이론구조와 비견될 수 있는 단일 이론이 국제정치 분야에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하는 회의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외교정책적 시각과 국제체계적 시각

다양한 이론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유기적인 연관구조를 형성하려는 행태주의의 단계별 시도를 통해 중요한 이론상의 분류체계가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국제관계이론이 2개의 하부 영역으로 나누어진다는 학계 일반의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편의상 국제관계를 조명하는 '시각'으로 불린 이들 하부구조는 크게 외교정책적 분석시각과 국제체계적 분석시각으로 대별할 수 있다.

다수의 이론군과 관심 대상들을 포함하고 있는 외교정책적 분석시각은 일반적인 정의에 따르면 대외적인(국제적인) 현상들과 관련되는 국내의 제반 요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따라서 국제관계에의 참여 행태를 결정하거나 그 행태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사회 및 통치체제 내부의 모든 특질과 구조·과정 등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예를 들어 '의사결정이론'은 이러한 시각이 가지는 속성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데, 한 국가의 의사결정권자가 활용하는 정보의 종류, 의사결정권자의 인식과 내적인 동기, 여론이 의사결정권자에 미치는 영향, 의사결정권자들이 활동하는 조직적 배경 등에 대한 분석이 행해지고 있는 까닭이다. 개별 국가의 부와 권력을 국제적인 위상이나 역할에 결부시키고 있는 일단의 연구방법론들 또한 외교정책적 분석시각의 한 구획을 점유하고 있다.

이른바 '비교외교정책분석이론'은 1960년대 중반에 태동한 연구방법론이다.

비교외교정책분석의 목표는 자료의 선택 및 분석을 위한 규준들을 설정하여 국가별로 대외적 행태를 좌우하는 대내적 자료들을 면밀히 조사한 뒤 이들 결과의 상호 비교를 통해 외교정책 수행의 공통분모들을 추출해내려는 데 있다. 일단 개별 국가들의 대내적 세부요소들과 대외적 행태들이 비교되면 대내외의 상호연계성과 그 상호연계성의 유형에 준거한 국가군의 분류가 가능해진다. 이상에서 언급한 비교외교정책 접근방식은 귀납논리에 의거하여 이론을 도출해내는 국제정치 연구의 전형적인 본보기가 된다.

현대 국제정치학의 또다른 시각은 국제체계적 분석방식으로 외교정책적 분석시각이 외교정책 담당자에 주목되는 반면, 국제체계적 분석시각은 체계와 외부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여기서 상호간의 작용은 도전과 응전, 작용과 반작용 등을 가리킨다. 외교사의 연구는 국제문제를 둘러싼 행위와 반응의 양태 및 그 상호작용이 함축하고 있는 실질적 의미에 관한 일련의 서술로서 인식될 수 있으며, 유서 깊은 '세력균형이론' 또한 국제체계 개념의 대표적인 반영 형태의 하나로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국제체계적 분석이론 속에는 그밖에도 국가간 협상에서의 교섭과정 및 군비경쟁과 기타 확대·증강 과정들을 분석하는 다수의 연구분야들이 포함되어 있다. 국제무역의 체계 모델이 국제체계의 구조적인 접근방식을 대변한다면, 국가간의 동맹관계가 해체되는 원인과 방식에 대한 연구사는 과정적인 접근방식의 실례라고 말할 수 있다.

국제관계의 이론가들은 체계적인 시각에 의지하여 포괄적인 통찰력을 얻을 수 있지만 이론적 탐구의 대상인 체계의 구성단위와 상호작용, 환경 등을 설정함에 있어서 충분한 분량의 세부 자료들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체계이론을 하나의 정형화된 공식이라고 평가하는 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르며, 오히려 그 본질에서는 가지각색의 이론과 공식들을 한곳에 묶어두는 정박지와 같은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신의 체계구성단위를 통치권력과 권력구조를 가지는 지정학적 국민국가로 규정하는 이론가가 있는 반면, 또다른 학자군은 부분적으로만 국가주권의 영향을 받는 비영역적 거래단위를 체계의 구성요소로 한정짓는다.

일반체계이론

체계 개념의 이론적인 발전이 지나치게 다원적인 결과들을 야기했지만 '개방적 적응체계'라는 보다 일반적인 이론개념은 국제관계의 역학구조를 이해하는 데 가장 전도유망한 관점을 제공해주었다.

국제정치학도들은 이러한 보편개념 덕분에 특정한 이론경향이나 국제문제의 해석방식에 의존하지 않고 확고하지는 않지만 통일성을 담보해주는 연구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일반체계이론'은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대륙의 지도에 비유될 수 있다. 전체지형의 윤곽과 지세의 대강, 내륙의 경계들은 다소 알려졌지만 그외의 세부사항들은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 논란이 계속되고 있으며, 보다 심도 있는 탐사를 요구하고 있는 대륙의 지도라 할 수 있다. 아나톨 라퍼포트를 비롯한 체계이론의 비평가들은 "일반체계이론은 정립된 이론이기보다는 현대 과학철학의 프로그램 또는 하나의 동향이나 추세에 가깝다"라는 논평을 내리고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여러 이론의 통합을 지향한 행태주의는 외교정책분석과 국제체계분석이라는 2가지 국제관계 연구시각을 잉태했다.

그런데 여기서 개방적인 적응체계의 일반개념은 이들 2가지 시각을 연결해주는 교량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비록 정교하고 치밀하지는 못하지만 국제관계 연구의 잡다한 이론들을 결합시키는 신경계와 같은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교량을 축조하고 신경계를 형성하는 관념의 대요를 살펴보는 일은 의심할 나위 없이 확실한 효용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살아 있는 체계인 인간을 포함하는 일단의 개방된 적응체계들을 상상해볼 수 있다.

체계를 살아 숨쉬는 유기체로 가정했을 때 체계가 가지는 통상적인 특성은 그 활동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행동하는 구성단위들은 이들에 대한 인식이나 규정양태에 관계없이 활동을 지속하고 사건들에 참여하며, 어떤 작용을 추진하고 기대하는 효과들을 창출해간다. 활동에 의해 생성되는 효과들은 그 행위자가 수용하게 되는 진보적인 영향력군의 일부를 형성한다. 다시 말해서 행위의 요소단위들은 스스로가 창출해낸 효과뿐만 아니라 다른 요소들에 기인하는 참여효과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떠한 체계의 '개방성'이란 바로 이와 같은 존재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활동과 이들이 형성하는 과정의 영향력은 2종류로 대별될 수 있다. 첫번째는 정형화되어 반복적인 속성을 갖는 규칙적인 영향력이고, 2번째는 예측하기 어려운 불규칙적이고 가변적인 영향력들이다.

체계에 변화를 초래하고 '적응'으로 일컬어지는 독특한 내부과정을 이끌어내는 외계의 영향력은 2번째 유형에 해당한다.

살아 있는 유기체, 즉 체계는 자신과 외부환경을 연결시키는 사건이나 문제에 관한 정보를 획득하고 자신의 행태를 조절·변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 개방적이고 적응력이 있는 체계로 구체화된다. 일반체계적 시각에는 개방과 적응이라는 본질개념과 더불어 의사소통과 행태수정 또는 보다 일반적으로 '정보'와 '통제'라고 하는 2차개념들이 부수된다.

또한 체계분석의 시각은 사회현상과 관련하여 개인·집단·조직구조·국가들을 각각 독자적인 특성을 지닌 별개의 존재형식으로 받아들일 경우 중대한 개념상의 오류가 생길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올바른 체계의 인식이란 이들 요소단위 모두가 얼마간 정형화된 양식을 따라 오랜 역사를 진화해온 유기체들로서 상호 밀접하게 맞물려 있는 제반 행태의 흐름에 불과하다는 이해인 것이다. 예를 들면 '홍길동'이라는 어떤 사람은 외부환경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정보와 자기 통제를 통하여 적응·생존해가는 활동의 조직체로서 규정되며, '일본'이라는 국가도 영토와 국민·명칭이 가지는 특수성의 한계를 넘어서 믿기 어려울 만큼 복잡다단한 상호작용의 망상조직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체계 내의 개별 행위자들을 행태적 구성체로서 지각하고 있는 일반체계의 분석시각은 구성체 그 자체가 대부분의 경우 하나의 계층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 인식론 또한 유발하고 있다.

사실 체계라고 하는 개념과 용어는 통례적으로 어떠한 행태조직의 하부에는 상부의 조직체를 위해 봉사하는 보다 작은 행태과정들이 존재하며, 전체체계와 하부조직 사이의 기능적 연계구조에 착안하여 실질적인 행위주체(행위자)가 규명된다는 의미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모든 인식 가능한 유기체들은 긴밀하게 상호연관된 일단의 구성분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 구성분자들은 그 자체의 수준에서 검토해볼 때 기타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기능하는 하나의 체계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 상투적인 '하부체계'의 해설이 가능해진다.

그러면 상술한 체계의 기본개념들이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국제관계이론에 적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지구상에는 독립적이고 비교적 유리된 많은 사회체계들이 번성해왔다. 각각의 체계들은 상호작용의 주체로서 특정한 시기에 독특한 방식으로 외부환경들과 교류하며, 일단의 정보 및 통제능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적응에 성공하여 살아 남는 체계들도 있지만 실패하는 경우에는 비극적인 파국을 맞기도 한다.

국제관계라고 일컬어지는 영역은 하나의 사회체계와 그 외부환경과의 복잡다단한 상호행태를 의미하며, 이것은 곧 기타 사회체계에로의 또는 기타 사회체계로부터의 작용·반작용의 흐름과 결부되어 있다(행태주의). 국제관계에 대한 연구 또한 사회체계가 주고받는 행태 흐름의 시말을 이해하고 기술하며 설명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나의 사회체계는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하부체계와 단위요소들이 일단의 복합구조를 형성하고 있지만 내부의 상호작용과 대외적인 행태의 흐름을 연결시켜주는 하부요소들은 전체 중의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국가간 행태의 근본인자는 다만 아래와 같은 2가지 양태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개별 사회체계 내부의 복합과정들 속에서 발원하는 인자이며, 또다른 하나는 국제체계를 형성하는 각 사회체계 상호의 연계행태와 그 효과들로부터 생겨난다. 전술한 국제관계 연구의 2가지 기본시각은 일차적인 관심이 한 사회체계의 내부적 행태요인에 주어져 있는가 아니면 체계들간 교류과정의 결과, 즉 상호작용의 효과로서 발생하는 행태요소들에 주어져 있는가의 차이에 따라 규정된다.

이 2가지 연구시각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데 하나의 시각이 모든 작용과 반작용의 현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나의 국제관계 연구가 타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론가들 각자가 역점을 두고 있는 기본시각뿐만 아니라 특정 체계개념에 따른 행태의 요소단위나 행태과정의 종류, 과정과 효과의 연계구조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다원적 세계에서 국제관계 연구의 초점은 광범위한 선택의 범위를 가지게 된다. 일반체계의 개념이 국제정치 연구에 도입될 때 다양한 형태의 이론들이 배태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논리의 귀결인 것이다.

계량적 분석과 컴퓨터의 활용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이론정립과 통합에 대한 관심이 1930년대의 역사적·제도적 방법론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고 말한다면 행태주의 시기 이후에 경험주의적인 연구경향이 되살아난 것은 그동안의 지나친 이론 편중성에 대한 일종의 저항으로 풀이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설명은 자료 수집과 분석에 대한 관심의 고조를 완전하게 뒷받침해주지 못하는데, 사실 1960년대 중반 이후 계량적 자료 분석 시도가 현저한 증가 추세를 보인 것은 직접적으로 컴퓨터의 영향력을 입은 것이었다.

국제정치 분야에서의 비교적 늦은 컴퓨터화는 국제관계에 대한 관찰경험이 대부분 문어체나 구어체의 서술형식을 띠고 있어 효율적인 컴퓨터의 이용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정보처리).

컴퓨터의 사용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처음 부각되었던 것은 컴퓨터가 도서관의 사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인식되면서부터였다. 선별된 자료들을 컴퓨터에 입력시킴으로써 방대한 분량의 자료수집이 가능해졌고, 이른바 저장·검색 체계의 개발에 힘입어 계량화가 곤란한 서술적인 자료들이 수치 자료와 다름없는 가치를 보유하게 되었다.

또다른 중요한 혁신은 체계적인 부호화, 계산의 발전으로 다양한 비계량적인 자료들이 계량적인 지시정보들로 변환되었고, 수학적·통계적 절차를 거쳐 자료의 집적과 평가가 가능해졌다. 그리하여 국제정치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었으며, 다방면의 실지조사연구들이 성행하게 되었다. 컴퓨터를 이용한 계량분석의 발달은 역사 사실에 대한 수고스러운 조사·검토의 필요성을 제고시키는 한편, 학계의 이론적인 연구와 정부 당국의 실제 행태가 조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정치학계와 실질 외교의 상호관계

국제관계 연구가와 정부의 외교문제 담당자들의 관점 사이에는 유사성 이전에 상이성이 보다 두드러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국가의 공식 외교정책에 대한 대변인이라고 하는 불명예스러운 평판을 피하려는 것이 학계의 일관성 있는 태도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여명기에 이상주의 국제정치학이 제시했던 목표들은 국제질서의 미래지향적인 개혁에 놓여 있었다. 현실의 체계와 구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애초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과학적인 객관성의 유지라는 사회과학 연구의 일반 원칙 또한 개별 국가의 정책 시각에서 탈피하여 전세계적 시야에서 국제 상황을 평가하려는 연구자세를 강조했었다.

국제문제 전문가들은 이에 반해 상아탑의 연구내용들을 적대감에서는 아닐지라도 무관심한 태도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흔히 상아탑의 이론과 연구성과가 나날의 실무집행에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했으며, 따라서 학계와 실무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행태를 발견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접적으로는 미묘한 영향력들이 있었는데, 특별히 외교정책의 방향설정에 있어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고등교육).

국가 정부의 새로운 국제관계 프로그램과 외교정책의 방향은 상아탑의 관심을 유도해내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다양한 연구계획과 하부 연구영역들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들 하부 영역 가운데에는 ① 개발도상국에 대한 대외 원조 프로그램에 자극받은 국가발전연구, ②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언어·역사·문화·지리·정치 전문가들을 배출해내기 위한 지역연구, ③ 외교정책에 대한 군사적 요인의 막대한 영향력과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핵무기 통제문제로 인한 국가안보 연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반대로 상아탑의 연구가 국가정책 수행에 미친 간접적인 영향력은 과거 20년 동안에 주목할 만한 다수의 실례들로 표출되었다. 첫째, 현실주의 권력정치이론이 미국 정부의 외교정책 담당부서의 눈길을 끌기 시작해 대부분의 정책 결정들이 국가이익과 구체적인 권력 계산에 근거를 두고 옹호되었으며, 상반되는 견해들은 현실 정치의 비정함을 인식하지 못한 몰지각한 사고로 간주되었다.

둘째, 흥미로운 실례로는 존 F. 케네디 행정부가 일련의 위기상황에서 외교정책 결정과정의 세부적인 상황에 주목했다는 사실인데, 이전 10년 동안에 이른바 의사결정이론은 상아탑 내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셋째, 소련 정부가 핵확산방지 및 핵방위이론에 맞추어 기존의 외교정책 기조에 수정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소련 내의 군사정책연구서에는 미국 학자들의 방위전략 개념들의 윤곽이 잡혀 있다.

비교적 소원하고 간접적이었던 종래의 학계-실무 관계는 가까운 미래에 있어 적지 않은 변화의 양상을 띠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체계이론의 개념이 공직자와 사회 일반 모두에 서서히 그러나 깊숙이 전파될 전망이며, 동시에 국제문제의 복잡성과 파급 효과에 대한 이해의 폭도 그만큼 넓어지게 될 것이다.

생존과 적응의 문제가 새롭게 조명되고 공동운명체로서의 현대 국가체계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인식은 충분한 연구과정을 거친 보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외교정책 결정으로 이어질 것이다. 국제관계 연구의 사명이라 할 국제문제 및 상황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실무자와 연구가 모두에게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불가결한 사항이다.

학계 실무 관계의 또다른 국면으로 컴퓨터를 활용한 계량적인 분석 시도는 다원적인 국제관계에 대한 보다 신속하고 정확한 정세보고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세계 어느 선진국가의 정치학계도 자료정보에 대한 점증하는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자료공급원이나 훈련된 인력들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지만, 유례없이 강렬한 학계의 요구는 점진적으로 책임 있는 정부의 반응을 얻어낼 것이며, 비밀외교를 타파하고 국가간 정보교환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제재와 간섭을 줄여나갈 것이다. 국제문제의 진전에 관한 각종 정보자료의 차단은 귀족주의 외교관행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의 악습이며, 그결과 오늘날에 와서는 세계 인류의 생존에 하나의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사회체계들의 제반조건과 상호관계에 관한 자료정보들이 완전하고 자유롭게 유통될 수만 있다면(컴퓨터 시스템의 발전으로 접근이 용이해졌음) 상아탑의 이론연구와 정부 부처의 국제정세 분석은 보다 큰 관심의 교집합을 공유하게 될 것이며, 이 모든 결과로부터 외교정책의 수립·집행에 있어 보다 현실적이고 만족스러운 접근방식이 개발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