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다윈

찰스 다윈

다른 표기 언어 Charles (Robert) Dar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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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09년 2월 12일, 영국 슈롭셔
사망 1882년 4월 19일, 영국 켄트 다운
국적 영국

요약 19세기 영국의 생물학자‧박물학자. 대표 저서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와 <인간의 유래 및 성에 관한 선택>을 통해 자연선택을 통해 생물이 진화한다는 진화설을 발표했다. 1831년 남아메리카와 남태평양 등을 항해하며 조사하는 임무를 받은 비글호에 박물학자로 탑승했다. 이 시기에 갈라파고스 제도의 생태계를 조사하면서 자연선택설에 대한 영감과 단서를 얻었고, 이후 이 이론을 체계화하여 발표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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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윈의 청소년기
  2. 다윈의 비글호 항해
  3. 다윈의 초기 연구활동
  4. 다윈과 종의 기원
  5. 다윈의 연구 방법
  6. 다윈의 건강과 가정
다윈설
다윈설

19세기 영국의 생물학자·박물학자. 생물의 진화를 주장하고, 자연선택에 의해 새로운 종이 기원한다는 자연선택설을 발표했다. 찰스 다윈의 진화설은 주로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1859)와 〈인간의 유래 및 성에 관한 선택 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1871)에서 제의된 것인데, 당시의 과학 및 종교의 진로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인간의 생각에 혁신을 가져왔다.

아버지 로버트 워링 다윈은 의사였고, 어머니 수재나는 유명한 도예가인 조시아 웨지우드 1세의 딸이었다.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은 박식한 의사·시인·철학자·박물학자·발명가였으며, 우생학의 창시자 프랜시스 골튼의 할아버지이기도 했다.

다윈의 청소년기

다윈의 어머니는 그가 8세 때 죽었으며, 큰누나 캐롤라인이 그를 키웠다. 다윈은 그녀가 자기에게 인도주의 정신을 가르친 데 대해 늘 감사했다.

소년 다윈은 다른 사람에 비해 성장이 느렸으며 어릴 때 이유 없이 거짓말을 꾸며내고 공상하기를 좋아했고, 실·우표·조약돌·광물 따위의 수집을 즐겼다. 1817년 슈루즈베리에 있던 주간학교에 다니다가 1818년 그곳의 버틀러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1825년까지 다녔으나 우수하지 못한 학생이었다. 그는 후에 이 학교에서는 고전만 배웠을 뿐 자신의 장래를 위한 건전한 기초는 얻지 못했다고 불평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너는 총사냥·개경주·쥐잡기 이외에는 좋아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구나.

너는 장차 네 자신과 너의 가족의 명예를 손상시킬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를 꾸짖기도 했다. 그후 그의 아버지는 의학 공부를 시키기 위해 그를 에든버러대학으로 보냈으나 실패했다. 그는 강의를 들으면 과학이 싫어지고, 수술하는 것을 보면 싫증을 느꼈다. 그는 바다나 물웅덩이에서 해양 동물을 채집하고, 굴잡이를 하는 어부를 따라다니며, 박물학자를 따라 남아메리카에 갔던 흑인에게서 새 박제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만 좋아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누나로부터 다윈이 의사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실망하여 이번에는 다윈을 영국교회의 목사를 만들 목적으로 1827년 에든버러에서 케임브리지로 보냈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교 크리스츠 칼리지에서 정식 교육과정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사격·승마·사냥에 열심이며 운동을 좋아하는 한 무리의 젊은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때 몇 사람의 유명한 과학자들도 알게 되었는데, 특히 식물학교수인 존 스티븐스 헨즐로 교수와 친하게 되었다.

헨즐로 교수는 다윈이 박물학에 흥미를 갖도록 자극하고, 자신감을 갖게 하는 등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다윈의 비글호 항해

1831년 영국 해군은 비글호 항해 때 로버트 피츠로이 함장과 동행할 박물학자를 구하고 있었다. 항해 목적은 파타고니아, 푸에고 섬, 칠레, 페루 등 남아메리카의 해안과 태평양의 섬들을 조사하여 일련의 크로노미터(chronometer : 바다에서 특히 경도[經度]를 측정할 때 이용되는 매우 정확한 시간측정장치) 측점(測點)을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헨슬로 교수가 다윈을 추천했는데 본인은 원했지만 그의 아버지가 반대하면서 "만약 누군가 상식 있는 사람이 너에게 가라고 권유한다면 승낙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상식 있는 사람의 구실을 한 사람이 바로 다윈의 외삼촌인 조시아 웨주우드 2세였고, 그의 설득으로 다윈은 1831년 12월 27일 비글호를 타고 데이번포트를 떠나 5년간 항해할 수 있었다.

케이프베르데 제도에서 처음으로 화산에 관한 실물교육을 받았는데, 그는 화산에 관한 찰스 라이엘의 저서 〈지질학 원리 Principles of Geology〉의 유효성을 스스로 시험할 수 있었다. 이 책은 헨슬로 교수가 다윈에게 가져가라고 권하면서도 믿지는 말라고 했던 것이었는데, 다윈은 자신의 현지 관찰을 통해 라이엘의 동일과정설의 원리를 확실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장차 과학자가 될 기초를 다졌다. 브라질에서는 처음으로 열대림을 보았고, 아르헨티나에서는 처음으로 나무늘보·마스토돈· 등의 화석을 발견했다.

푸에고 섬에서는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미개한 인종도 보았다.

칠레에서는 지진을 목격하고 육지의 융기에 대한 지진의 영향, 화산 폭발과 지진과의 관계 등을 관찰했다. 항해중 상륙하면, 말을 타고서 길고 위험한 탐험을 나가 채집하며 사냥하는 것을 되풀이했는데, 후에 이러한 탐험에 열중했던 것이 헛된 일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어디에서나 산을 보면 등산했으며, 칠레에서 안데스 고원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가는 여행 도중에는 벌레들에게 많이 물리기도 했다.

비글호는 갈라파고스 제도로부터 타히티,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코코스 제도, 모리셔스 제도, 남아프리카, 세인트헬레나 섬 등을 항해한 다음 크로노미터를 점검하기 위해 다시 브라질에 갔다가 귀국했다. 1836년 10월 2일 플리머스 항에 상륙하여 10월 5일에 고향인 슈루즈베리에 돌아왔다. 비글호 항해 중에 예리한 통찰력으로 자연을 관찰하면서 얻은 식견, 사고, 채집품 등은 그의 진화설과 자연선택설의 수립은 물론 기타 연구 업적의 모태가 되었다. 그는 특히 자연선택에 관한 견해들 중 상당 부분은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관찰한 동물들의 생태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고 밝혔다.

다윈의 초기 연구활동

다윈의 저서 〈H.M.S. 비글호가 방문한 여러 나라의 지질학과 자연사에 관한 저널 Journal of Researches into the Geology and Natural History of the Various Countries Visited by H.M.S. Beagle, 1832~36〉(1839)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의 주된 관심사들은 지질학에 관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의 관찰들은 〈산호초의 구조와 분포 Structure and Distribution of Coral Reefs〉(1842)·〈화산도(火山島)에 관한 지질학적 관찰 Geological Observations on Volcanic Islands〉(1844)·〈남아메리카에 관한 지질학적 관찰 Geological Observations on South America〉(1846) 등 3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후세 사람들에게는 이 저작들이 다윈의 진화에 관한 폭발적 인기 때문에 빛을 잃어서 경시되어왔으나, 이 저서들은 그가 후에 이룩한 업적의 기본이 되는 것이었다.

한 예로서 환초(環礁)와 보초(堡礁)의 생성원인에 대한 그의 견해를 보면, 산호의 폴립이 깊이가 37m 미만이고 수온이 20℃ 이상의 맑은 바닷물에서만 살고, 환초와 보초는 모두 해수면 근처에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환초와 보초는 바다 바닥이 내려앉은 결과로써만 생길 수 있고 산호는 그 기부가 밑으로 내려감에 따라 위로 자라 올라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152m 깊이 가까이에서 한 때 표층의 3.7m 이내에서 살았던 죽은 산호를 찾아냄으로써 확인되었다.

채집한 동물 표본들은 한 팀의 전문가들에 의해 기재되어 〈H.M.S. 비글호 항해의 동물학 The Zoology of the Voyage of the Beagle〉(1840~43)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러나 그의 생물학적 공헌은 이런 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항해를 떠날 당시에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의 불변성을 의심하지 않았으나 그 후 몇 가지 의문이 생겨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비슷한 동물들이 많이 살고 있을까? 예로 남아메리카의 레아류는 왜 아프리카의 타조와 그렇게 많이 닮았을까? 왜 같은 종은 아니지만 이웃 지역에는 비슷한 종이 살고 있을까? 갈라파고스 제도의 섬들은 자연조건이 서로 같아 보이는데, 왜 각 섬들의 새들과 육상 거북들은 서로 다를까?"

귀국 후(1837) 그는 이런 의문들과 비교해부학, 발생학, 분류, 지리적 분포 및 고생물 등에서 제기된 더 많은 의문들은 만약 종이 진화하여 다른 종으로 된다면, 즉 많은 종들이 공동조상을 가지고 있다면 만족스럽게 설명되리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곧 조상종으로부터 변화된 후손종이 생겨날 수 있다는 진화의 견해인데, 오늘날에는 이 견해를 지지하는 생물학상의 증거가 많이 제시되어 있다(종분화).

다윈은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진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 한 사람들을 납득시키려고 시도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진화의 원인을 탐구하던 중에 그는 재배식물과 가축에서 사람들이 변화를 일으키는 데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은 희망하는 특질을 지닌 어버이를 주의 깊게 선택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선택이 자연계에서의 종의 창조에도 틀림없이 어떤 방식으로든 작용했으리라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한 종의 모든 개체들은 서로 같지 않고, 변이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어떤 개체들은 살고 있는 곳에 잘 적응하여 번성하지만 어떤 개체들은 적응이 잘 안 되어 멸망하리라는 것도 실감했다. 이것은 다윈이 일찍이 1837년에 파악했던 자연선택의 원리였으며, 그는 더 나아가서 어떻게 자연이 이런 자연선택을 진행시키는가를 알아내려고 했는데 이는 그가 자연선택의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838년 9월 28일 다윈은 맬서스〈인구의 원리에 관한 시론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흔히 인구론이라 번역함)을 읽었는데, 여기서 맬서스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하는데도 사람의 식량 공급은 겨우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 지나지 않으므로 인구의 증가가 억제되지 않으면 그 결과는 비참하고 빈곤한 사람들의 죽음을 가져오리라고 했다.

다윈은 바로 이 논리가 인위적으로 먹이의 공급을 증가시킬 수 없는 식물과 동물에도 적용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또한 이와 같은 생물에서는 사망률이 매우 높을 것이며 따라서 성공적인 세대들의 어버이를 선택하는 메커니즘은 자동적으로 진행되리라고 생각했다. 다윈은 적응의 기원과 개량문제를 선택압(選擇壓)의 결과로 풀었으며, 세대를 이어가는 사이의 변화 즉 진화는 진공 중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종이 점유하고 있는 생태적 지위와 매우 깊은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생태학의 창시자로 보고 있다.

생물의 진화설은 다윈 이전에도 프랑스의 몽테스키외·모페르튀·디드로 등의 사상가들과 박물학자인 뷔퐁, 다윈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다윈, 프랑스의 라마르크 등에 의해 제창되었었다.

박물학자이며 진화론자였던 라마르크(1744~1829)는 처음으로 단세포생물로부터 인류에 이르는 진화의 계통수(系統樹)를 그려냈으나 진화의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고, 진화의 원인을 "생물은 완성을 향하는 경향이 있다"는 가상적인 느낌과 생물의 욕구 총족에 대한 공상적 믿음에 호소하여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에 다른 과학자들로부터 그의 진화설은 배척을 당했다.

이런 면에서 다윈은 진화에 대한 적절한 증거를 제시하고, 자연선택의 과정이 어떻게 적응을 일으키는가를 최초로 설명한 사람이었다.

다윈은 생물학사상 최대의 일반원리를 발견한 후, 그것을 간직해두었다가 1842년 대략적인 개요로 잡아놓았고(스케치) 1844년 이것을 좀더 보충하여(에세이) 친구인 식물학자 조지프 돌턴 후커에게만 보여 주었다. 1846~54년 다윈은 관심과 에너지를 만각류(蔓脚類:따개비류)의 현생 및 화석종(種) 연구에 쏟았는데, 이러한 연구의 목적은 이들을 분류하는 것이었다.

이 지루한 연구에 의해 다윈은 한 종 내에서 발견되는 많은 변이와 분류상의 문제점들에 관해 직접적인 경험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종이 어디로부터 기원하는지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으며 이 연구는 1851~54년에 4개의 모노그래프로 출판되었다.

다윈과 종의 기원

다윈과 종의 기원
다윈과 종의 기원

1856년 다윈은 진화와 자연선택에 관한 그의 발견들을 논문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줄곧 분기문제(즉 많은 종들을 포함하는 널리 퍼져 있는 속에 속하는 종들의 커다란 변이성)에 관한 연구와 지리적 분포, 그리고 대양도(大洋島)의 생물을 퍼뜨리는 데 있어서의 바다와 바람의 역할에 관한 연구로 진화에 관한 증거를 수집했으며, 그의 친구들인 라이엘, 후커, 토머스 헨리 헉슬리와도 계속해서 토론을 했다. 그가 하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중 1858년 6월 18일 뜻밖에도 당시 말레이 열도(列島)에 가 있던 박물학자 앨프레드 러셀 월리스로부터 진화와 자연선택에 관한 〈변종(變種)이 원종(原種)으로부터 무한히 멀어져가는 경향에 관하여 On the Tendency of Varieties to Depart Indefinitly from the Original Type〉라는 간결한 논문을 받게 되었다.

다윈은 이 논문이 20년 간이나 자신이 계속해온 연구 업적을 앞지를 위험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큰 충격을 받았으나, 라이엘과 후커의 주선으로 1858년 7월 1일 런던의 린네 학회에서 다윈과 월리스의 논문을 공동으로 발표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이때 〈종이 변종을 형성하는 경향에 관하여:자연선택 방법에 의한 변종과 종의 영속화에 관하여 On the Tendency of Species to Form Varieties:on the Perpetuation of Varieties and Species by Natural Means of Selection〉라는 제목하에 다윈이 1844년에 쓴 '에세이'의 일부와 1857년 다윈이 그레이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월리스의 논문이 소개되었다.

그후 다윈은 그때까지의 모든 연구 업적을 간추려서 쓰기 시작했다. 그는 이것을 '적요'(摘要)라고 불렀는데 이 적요가 바로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 즉 생존경쟁에 있어서 유리한 종족의 존속에 관하여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줄여서 〈종의 기원 Origin of Species〉이라고 함)라는 책으로 1859년 11월 24일에 초판 1,250부가 출간되어 당일에 매진되고, 1872년까지 6판을 거듭했다.

이 〈종의 기원〉으로 다윈은 2종류의 적(敵)을 만들게 되었는데 첫째는 애담 세지윅이나 리처드 오언 같은 구식풍의 과학자들이고, 둘째는 정통파의 종교적 신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그리스도교). 싸움은 1860년 6월 30일 영국과학진흥협회의 옥스퍼드 대회에서 벌어졌는데, 오윈의 주의깊은 지도를 받은 옥스퍼드의 주교 새무얼 윌버포스는 경멸하는 태도로 다윈의 견해에 대해 헉슬리를 공격했으나 헉슬리는 재치있는 응답으로 주교의 공격을 막았고 영국교회는 그후 다시는 공식적으로 과학과 교전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저술한 여러 원리들을 보충하고 부연하여 〈사육(飼育)에 의한 동식물의 변이 The Variation of Animals and Plants under Domestication〉(1868)·〈인간의 유래 및 성에 관한 선택 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1871)·〈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1872) 등 3권의 책을 썼는데 3번째 책은 심리학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행동학의 창시이기도 했다.

다윈의 그밖의 저작들은 주로 식물을 다룬 것들이지만, 모두 적응을 주제로 하여 그 기원·발전·적응 등이 주는 생존의 가치를 담고 있다(식물학). 이는 〈곤충에 의해 수정되는 영국과 외국의 난(蘭)의 여러 가지 고안에 관하여 On the Various Contrivances by Which British and Foreign Orchids Are Fertilized by Insects〉(1862)에서 확실하게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다윈은 꽃이 곤충이 내려앉기에 알맞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식물계에서 타가수정과 자가수정의 효과 The Effects of Cross and Self Fertilization in the Vegetable Kingdom〉(1876)에서는 식물계와 동물계에 2가지 성(性)이 있는 것은 동식물들이 타가수정을 확실히 하도록 적응되었기 때문이라 했다.

〈덩굴식물의 운동과 습성 The Movements and Habits of Climbing Plants〉(1875)에서는 감기의 메커니즘과 감아 올라가는 기능의 의의를 관찰과 실험을 통해 연구했고 〈식충식물 Insectivorous Plants〉(1875)에서는 식물의 가장 놀랄 만한 적응을 기술했다. 〈지렁이의 활동에 의한 식물재배 토양의 형성 The Formation of Vegetable Mould Through the Action of Worms〉(1881)은 수량생태학의 선구적 연구로 땅속 지렁이들의 여러 가지 역할을 연구했으며, 지렁이들이 땅속 흙을 위로 옮기는 양이 404.8㎡의 토양에서 연간 약 18t이 된다고 계산했다.

다윈의 연구 방법

다윈의 업적은 영국의 자본주의의 성장, 식민정책과 관계가 깊다. 그 이유는 그가 영국 식민정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해군의 군함 비글호에 편승했고, 산업혁명의 시작이었던 농업혁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품종개량의 수단인 인위선택에서 자연선택의 암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윈은 연구과정에서 영국의 경험주의적 방법 즉 베이컨주의를 충실하게 따랐는데, 그는 비글호 항해중에 이것을 터득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관찰로부터 성서의 창조 설명은 명백한 거짓이라는 신념을 얻게 되었고, 비판적인 판단을 적용하는 것을 배웠다.

다윈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과학은 귀납적인 방법만으로 발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는 베이컨적 원리에 따라 연구했고 아무런 가설없이 대규모로 사실들을 모았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라이엘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론의 형성없이는 관찰이 있을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고 썼는데, 이처럼 그는 순수한 귀납적 관찰이라는 것은 없다고 인식했다. 다윈은 자기의 주의를 끄는 것에 대해 가설을 세운 다음 논박 또는 논증이 될 수 있는 결론을 연역하는 식의 가설연역법을 사용하여 그의 이론을 폈다.

다윈의 건강과 가정

다윈은 원래 건장한 청년이었으나 비글호 항해에서 돌아온 뒤로는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심한 권태감과 장의 불편함을 느꼈고 구토증과 불면증 때문에 자주 고생했다. 그 원인에 관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은 1835년에 다윈이 침노린재과 트리아토마속에 속하는 곤충에 물렸기 때문이라 했다. 트리파노소마속에 속하는 샤가스 병원체를 매개하는 이 곤충의 발견은 1909년이지만 다윈의 증세가 샤가스병의 증세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다윈은 1839년에 엠마와 결혼하여 10명의 자식을 얻었지만 세 아이를 잃었으며, 나중에 아들 2명은 과학자, 또 다른 아들 1명은 경제학자가 되었다.

일생 동안 정식 직업을 갖지 않았던 다윈은 1882년 4월 19일에 다운의 자기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은 지 2일 뒤 20명의 국회의원이 서명한 청원서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영국의 수상들과 왕들 옆에 나란히 묻혔다. 장례는 4월 26일에 치러졌으며, 이때 관을 따라가는 사람들 중에는 후커와 헉슬리 그리고 수많은 외국 고관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