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르크

라마르크

다른 표기 언어 Jean-Baptiste de Monet, chevalier de Lamarck
요약 테이블
출생 1744. 8. 1, 프랑스 피카르디
사망 1829. 12. 18,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획득형질의 유전을 주장한 학설을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라고 하는데, 기관들은 계속 쓰면 더 나아지고 쓰지 않으면 약해지며, 환경에 의해 결정된 획득과 손실은 생식에 의해 새로 생겨나는 후대에 전달된다는 내용이다. 이 설은 다윈에 의해서 반박되었다.
군대 제대 후 왕립식물원에 들어가 식물학 연구에 몰두했다. 9년에 걸친 현지조사와 채집을 통해 1778년 <프랑스 식물상>을 쓰고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800년부터 그는 린네 이후로 혼란된 상태로 남아 있던 하등동물의 분류체계를 개정했다. 박물관 안의 방대한 수집품을 3년간 관찰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쓴 <무척추동물의 자연사>는 1822년에야 완성했다. <동물철학>에서 라마르크는 용불용설을 제시했으나, 50년 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면서 반박의 대상이 되었다. 말년에 실명과 가난의 이중고를 겪다가 생을 마쳤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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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박물관 소장품의 현대화
  4. 무척추동물의 계통생물학
라마르크(chevalier de Lamarck)
라마르크(chevalier de Lamarck)

개요

획득형질의 유전을 주장한 그의 학설을 라마르크설이라고 하는데, 이 설은 다윈에 의해서 반박되었다(유전학, 진화, 적응).

초기생애

남작인 한 보병 중위의 11명의 아이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라마르크를 성직자로 만들 목적으로 아미앵에 있는 예수회 신학교로 보냈다.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보병연대에서 복무했다(1761~68). 그는 리비에라에 주둔하고 있을 때 식물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으며 군대를 제대한 후 처음에는 의학에 몰두했다가 곧 식물학으로 방향을 바꿔 파리에 있는 왕립식물원의 식물학자인 베르나르 드 쥐시외 밑에서 연구에 전념했다. 9년에 걸친 현지조사와 채집을 통해 1778년 프랑스 식물상(植物相)에 관한 3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의 저술인 〈프랑스 식물상 Flore fran이미지aise〉은 식물학이 일반인에게 친숙하던 사회 분위기에 따라 식물을 동정(同定)하기 위한 필독서로 인식되었다. 그는 이 저술에서 스웨덴의 식물학자인 린네의 분류체계에 맹목적으로 집착하지 않고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식물을 다루었다. 이런 공로로 그는 당시 42명의 회원으로만 구성되어 있던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 그당시 정상의 박물학자였던 뷔퐁은 중부 유럽의 식물원과 다른 학술기관을 방문하는 2년간의 여행 동안 라마르크를 아들의 개인교수로 채용했다(뷔퐁). 그뒤 몇 년 간 라마르크는 디드로가 편집한 〈백과전서〉의 후신인 〈앙시클로페디 메토디크 Encyclopédie méthodique〉의 방대한 식물학 분야를 집필했고 왕립식물표본실의 관리자로 일했다.

박물관 소장품의 현대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행정기관뿐 아니라 학술기관도 개편되었는데, 이때 왕립자연사관의 소장품 수집이 중단되었다.

그는 국민의회에 자신의 의견을 담은 서신을 보냈는데, 이 서신에서 비전문가에 의해 만들어진 무질서한 전시방법을 비판하고 그보다는 대형 자연사박물관을 설립하여 소장품들을 과학 발전에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런 소장품들을 무작위로 전시할 것이 아니라 '조직적 또는 특정한 계통적 질서'에 따라 배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자연을 동물·식물·광물과 같은 문(門 phylum)으로 나누고 각각은 다시 하위의 강으로, 강은 목(目 order)으로, 목은 속(屬 genus)으로 나누어야 하고 계통적 지식을 기초로 한 목록을 첨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라마르크는 저명한 전문가에 의해 유지되어온 연구기관의 지원 아래 분류체계에 따라 전시물을 배열하는 현대적인 박물관 전시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다. 1793년 프랑스 국립 자연사박물관이 설립되었을 당시 그는 무척추동물의 책임자였으며 이미 중요한 수집은 다 해놓은 상태였다. 그는 처음으로 화석과 계통 유연관계가 가장 밀접한 현생 생물을 연관시켰다.

18세기말에는 화학과 생리학의 발전으로 근본적인 상호관계에 대한 증거를 면밀히 연구함으로써 궁극적인 인과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견해가 싹트게 되었다.

라마르크는 18세기 작가들이 제시했던 느슨하고 덜 결정적인 자연적 리듬과 우주적 통일성의 개념에 동조하고 이로부터 자극을 받았다. 그에게 있어서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화학은 전체적인 사실을 지나치게 세분화하는 것같이 보였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세상과 그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이해함으로써 과학이 더 이상 하나의 긴밀히 연결된 조직체가 아니라 몇몇 전문가의 제한된 분야가 되는 것에 대해 매우 염려했다.

그래서 그는 물리현상·화학·지질학·기후·생명에 관한 통일적인 견해를 밝히는 일련의 논문을 기획하기로 했다. 이것들 중 첫번째는 물질과 에너지에 대해 다룬 2권의 〈주요한 물리적 사실들의 원인에 대한 연구, 특히 연소의 원인에 관하여 Recherches sur les causes des principaux faits physiques, et particulièrement sur celles de la combustion〉로 1794년에 출간되었고, 1796년에 〈기체이론과 현대 화학자들의 새로운 신조에 대한 반박 Réfutation de la théorie pneumatique, ou de la nouvelle doctrine des chimistes modernes〉이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라마르크는 라부아지에와 푸르크루아의 연소에 관한 이론을 반박했다. 그러나 이런 라마르크의 저술은 전혀 관심을 끌지 못해 과학적 업적으로 인정받지도 못했으며, 그 자신도 일반 대중에게 자신의 견해를 적절히 표현하는 방법에 서툴렀다. 1802년의 그의 저술인 〈수문지질학 Hydrogéologie〉에서 지구의 역사를 바다의 범람과 유기퇴적층에 의한 대륙의 생성으로 설명했다.

그당시 그의 견해 중에서 가장 진보적이었던 것은 퇴적층에서 나오는 화석의 형태를 통해 그 퇴적층이 심해성인지 연안퇴적층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이 책에서 그는 지질학상의 시간이 방대함을 기발한 발상으로 설명했는데, "자연에게 시간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어떠한 장애도 되지 않는다.

시간은 항상 자연의 처분에 달려 있으며 그것이 이루어놓은 모든 일들에 의해 그 무한한 능력이 나타난다"는 말을 남겼다(지질시대). 이 저술은 무시되었으며 라마르크는 깊은 시름에 빠지게 되었다. 과학은 학설로 인정받기 전에, 기본적인 사실에 대한 폭넓은 지지를 받기 위해서 증거와 자료에 의한 상호비판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이런 과정이 무시됨으로써 라마르크는 과학적으로 비판받는 사람이 되었고 점점 고립되었다.

무척추동물의 계통생물학

1880년에 그는 린네 이후로 혼란된 상태로 남아 있던 하등동물의 분류체계를 개정했다.

또 그는 필수적인 기관의 기능과 복잡성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 연충류와 연체동물에서와 같은 형태상의 피상적 유사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연구는 박물관 안의 방대한 수집품을 거의 3년간 관찰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의 무척추동물에 대한 최초의 저술인 〈무척추동물의 체계 또는 강(綱)의 일반 일람표 Système des animaux sans vertèbres, ou table général des classes〉(1801)는 그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퀴비에의 해부학적 연구를 반영한 것이었는데, 라마르크는 이 책에서 19세기와 지금까지도 인정받는 무척추동물의 배열체계를 확립시켰다.

라마르크의 무척추동물에 대한 계통 연구는 평생의 역작인 〈무척추동물의 자연사 Histoire naturelle des animaux sans vertèbres〉(1815~22)에서 절정을 이루었는데, 여기에는 분류체계의 개정을 위한 박물관의 설립을 제안하는 그의 주장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

그는 단순한 것에서 가장 복잡한 것으로 이어진 일련의 계단과 같은 생명체의 배열을 상상했다.

'흥분'과 '미묘하고 계속 움직이는 유체'에 의해서 동물의 기관들은 더 복잡해지고 계속 좀더 높은 수준으로 위치가 상승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물리적 에너지와 생명의 전체 구조와의 상호관계에 관한 그의 견해를 요약한 것으로 〈생명체의 구조 연구 Recherches sur l'organisation des corps vivants〉(1802)와 〈동물철학 Philosophie zoologique〉(1809)에서 밝혀졌다.

또 〈동물철학〉에서는 생명체의 위치 상승을 결정하는 2가지 법칙을 제시했다. 첫째, 기관들은 계속 쓰면 더 나아지고 쓰지 않으면 약해진다. 둘째, 환경에 의해 결정된 획득과 손실은 생식에 의해 새로 생겨나는 후대에 전달된다. 예를 들어 기린의 앞다리와 목은 이들이 풀을 먹는 습관에 의해 늘어났다는 것이다. 50년 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면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은 관심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라마르크설은 1930년대 이후에 대부분의 유전학자에 의해 거부되었는데, 예외적으로 소련에서는 리센코설(Lysenkoism)이라는 형태로 1960년대까지 소련 유전학계를 계속 지배했다. 그러나 처음에 제창된 라마르크설은 생명 과정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라마르크 자신의 추측일 뿐이었다. 일생 동안 그는 동식물을 직접 관찰하면서 생명의 역동성, 즉 현대 생물학이 기초를 두고 있는 물리적 과정과 생명과정과의 밀접한 상호의존성에 관한 직관적인 개념을 얻었다.

실제로 그는 1802년에 생물학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지만, 무척추동물의 계통생물학을 제외하고는 생물학의 창시자라기보다는 선구자라고 여겨지는데, 이는 가장 훌륭한 탐구절차 방식뿐 아니라 이 탐구절차가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연구기관을 설립했기 때문이다. 그는 말년에 실명과 가난의 이중고를 겪다가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