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부아지에

라부아지에

다른 표기 언어 Antoine-Laurent Lavoisier
요약 테이블
출생 1743. 8. 26, 파리
사망 1794. 5. 8,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근대화학의 창시자로 과학의 여러 분야뿐만 아니라 공공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화학자로서의 그의 명성은 1770년 물이 반복적인 증류과정을 통해서 흙으로 변한다는 당시의 믿음을 깨면서 이루어졌다. 1783년 6월 25일 과학아카데미 모임에서 물이 수소와 산소의 결합으로 생긴 것이라고 발표했다.
1790년에는 전 프랑스 지역의 도량형을 통일하기 위한 위원회의 재무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징세청부조합에 들어가 일했었는데, 프랑스혁명 혁명공회는 1793년 전직 징세청부인들의 체포령을 내렸고, 이듬해 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위대한 과학자 라부아지에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목차

접기
  1. 개요
  2. 과학업적
  3. 공공활동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Lavoisier)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Lavoisier)

개요

근대화학의 창시자로 과학의 여러 분야뿐만 아니라 공공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의회 법률고문이었던 아버지의 뜻대로 마자랭 콜레주(Collége Mazarin)에 입학하여 언어·문학·철학 등의 고전교육뿐만 아니라 수학·천문학·화학·식물학 등 과학교육도 받았다. 가문의 전통에 따라 법률을 전공하여 1764년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지만, 과학연구에 더 큰 흥미를 느꼈다. 1766년 큰 규모의 마을을 밝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한 논문으로 과학 아카데미로부터 금메달을 받았다. 초기에는 북극의 오로라 현상, 천둥, 석고의 성분 등을 연구했고, 지질학자 J. E. 게타르와 함께 여행하며 프랑스 지역의 지질도(地質圖)를 만드는 데도 공헌했다.

1768년 물의 성분을 분석한 논문이 통과되어 과학 아카데미 화학 분야의 준회원이 되었다. 그는 아카데미의 여러 직책을 두루 거쳐서 1785년에는 집정관, 1791년에는 재무관이 되었다.

그는 가문 덕택에 20대초에 이미 상당히 부유했다. 1771년 마리 폴즈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후에 남편을 도와서 실험장치를 그리거나 실험결과를 기록하고 영어논문을 번역하는 등의 일을 했다. 당시 부유한 부르주아의 관습에 따라서 그의 아버지가 귀족작위를 매수해 주어서 1772년 귀족이 되었고, 몇 년 후에는 블루아 근처에 영지도 매입했다.

과학업적

그의 명성은 1770년 물이 반복적인 증류과정을 통해서 흙으로 변한다는 당시의 믿음을 깨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전통적인 4개의 기본 원소체계(흙·물·공기·불)를 의심하여, 연소에서 공기의 역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772년 11월 1일 황과 인이 탈 때에는 공기를 흡수하여 무게가 증가하고 산화납(Ⅱ)를 숯과 같이 가열하여 생긴 금속성 납은 공기를 잃어버려서 원래의 산화납보다도 무게가 감소한다는 사실을 과학 아카데미에 보고했다. 아직 이 과정에서 공기의 역할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연구를 계속해서 그 실험결과를 그의 첫 저서인 〈물리와 화학 소론 Opuscules Physiques et chimiques〉(1774)에 실어 출판했다.

그해에 영국의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적색 수은 침전물을 가열하여 발생하는 비(非)플로지스톤 공기를 발견했다. 그는 프리스틀리가 얻은 결과를 확인하고 실험을 확장했다. 그는 연소와 금속을 배소할 때에는 주어진 공기 중의 일부만이 사용되며,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새로운 공기가 바로 그 작용을 하며, 사용되지 않은 비활성 기체 혹은 질소기체가 뒤에 남는다고 추론했다.

그는 새들이 이 새로운 공기 속에서 더 오래 살며, 탄소와 결합하면 1754년 조세프 블랙이 발견한 고정된 공기(이산화탄소)가 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대기가 화학반응에 관여하는 여러 가지 다른 기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많은 물질, 특히 산의 조성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777년에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그는 새로운 플로지스톤이 제거된 기체를 산소 또는 산생성물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연소가 이제까지 믿어져왔던 것처럼 플로지스톤(가상의 불의 요소)이 빠져나간 결과가 아니라 연소물이 산소와 결합해서 생긴 결과라고 주장했다. 1783년 6월 25일 과학아카데미 모임에서 물이 수소와 산소의 결합으로 생긴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이는 이미 영국의 화학자 헨리 캐번디시가 예견한 사실이었다. 그는 이 이론에 근거해서 물을 분해하여 기구(氣球)를 채우기 위한 다량의 수소를 만드는 방법을 고안했다. 또 알코올과 다른 유기화합물을 산소가 있는 상태에서 태워서 그때 생긴 물과 이산화탄소의 무게를 잰 후에 이로부터 유기물의 조성을 계산했는데, 이는 정량적으로 유기물을 분석하는 시초가 되었다(정량분석). 그의 새로운 화학은 프리스틀리와 몇몇 과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확산되어갔다.

프랑스 화학자들이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명명법에 기초해서 당시까지 알려져 있는 모든 화합물을 다시 명명하고 분류한 〈화학명명법 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1787)이 출판되었다. 다음해 라부아지에를 중심으로 〈화학연보 Annales de chimie〉가 출판되기 시작했고, 이제 새로운 화학체계는 움직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라부아지에의 화학체계는 〈화학요론 Traité élémentaire de chimie〉(1789)의 출판으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책은 그의 화학적 업적을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화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서론부에서 적합한 과학적 탐구방법과 교수법을 열거하고, 새로운 명명법을 옹호했으며, 더이상 분해될 수 없는 물질을 단체(현대의 원소 개념)라고 정의하고, 이것들이 결합하여 다른 물질들을 만든다고 주장했다. 또한 화학반응의 전후에 있어서 물질은 보존되며, 따라서 생성되거나 소멸되는 것은 없고 단지 변형만이 있다고 믿었다(질량불변의 법칙).

화학연구 이외에도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와 함께 과 관련된 문제를 비롯한 물리학에 관한 연구도 했다.

그는 열을 특수한 형태의 불가량물(不可量物)이라고 생각했고, 고체·액체·기체의 3가지 상태는 열량에 따라서 변하는 물질의 상태라고 주장했다. 한편 발효, 호흡, 동물의 열을 본질적으로 화학작용이라고 생각하며 연구했다. 그는 호흡할 때 발생하는 동물의 열과 가스의 교환을 측정하며 호흡이란 탄소의 연소와 유사한 일종의 산화반응이라고 결론지었다.

공공활동

그는 과학활동과 함께 재정·경제·농업·교육·사회사업 등 공공분야에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1768년 징세청부조합에 들어간 지 얼마 후에 정식 직원이 되었고, 1775년에는 탄약국장으로 임명되어 무질서한 관료체계를 바로잡아 화약의 생산량을 크게 증대시켰다. 탄약국장으로 파리에 이주한 뒤 실험실을 마련하여 과학연구를 계속했는데 곧 파리 과학계의 중심이 되었다.

그의 영향력은 과학 아카데미 안에서도 커지기 시작했고, 공중보건·대포제작·학교교육을 위한 위원회 뿐만 아니라 심지어 병원·교도소 시설 개량을 위해 설치된 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또 블루아 근처의 영지에서 모범적인 농장을 운영하여 과학적 영농법의 우수성을 널리 홍보했고, 1785년 농업개선을 위한 정부 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어 여러 가지 영농법을 추천한 보고서를 주도적으로 입안(立案)했다. 한편 오를레앙 지방에서는 저축은행·보험협회·운하·창고제도·조세개혁 등의 새로운 방법을 통해서 경제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1790년에는 전 프랑스 지역의 도량형을 통일하기 위한 위원회의 재무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중에도 활발히 활동했다. 1789년 삼부회(三部會)가 재개되자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어 위원들의 강령을 초안했고, 파리 코뮌(자치사회)위원으로 온건파정당에 가입했다. 그후 국가재정을 담당하는 행정관으로 국가재정과 농업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직 징세청부인이었다는 사실은 권력으로부터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고, 감시와 함께 공격이 계속되었다. 특히 1787년 기아로 인한 유랑민의 유입을 막기 위해 그가 제시한 파리 장벽은 장 폴 마라와 같은 극단주의자의 공격을 유도했다. 1791년 징세청부조합이 해체되었고, 탄약국장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1793년 테러의 공포가 시작되자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학 아카데미도 다른 모든 유사한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폐쇄되었다.

그해 말 혁명공회는 전직 징세청부인들의 체포령을 내렸고, 그들은 1794년 5월 혁명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은 하루 만에 끝이 났고, 그는 장인을 비롯한 27명의 다른 징세청부인들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5월 8일 오후 지금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위대한 과학자 라부아지에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