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플라스

라플라스

다른 표기 언어 Pierre-Simon, marquis de Laplace
요약 테이블
출생 1749. 3. 23, 프랑스의 노르망디 보몽탕오주
사망 1827. 3. 5, 파리
국적 프랑스

요약 뉴턴의 중력이론을 태양계에 성공적으로 적용시켜 관측된 행성들이 이론적인 궤도에서 벗어나는 현상들을 낱낱이 해명했다. 또한 과학적인 자료의 확률적인 해석이 유용하다는 것을 입증하기도 했다.
18세에 파리로 가 수학을 공부한 라플라스는 1773년 뉴턴의 중력이론을 전 태양계에 적용하여 평생에 걸친 대작업을 시작했다. 행성의 평균운동의 불변성을 발표하고, 이심률과 궤도경사각의 3제곱까지 증명했다. 1786년에는 행성궤도 사이의 이심률과 경사각이 작고 일정하며 자동으로 수정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1787년 달의 가속이 지구 궤도의 이심률에 따른다는 것을 밝혀내어 태양계의 이론적 설명에 관한 마지막 난제를 해결했다. 1796년 <세계의 체계에 대한 해설>을 발간했고, 1814년 <확률에 관한 철학적 시론>을 간행했다.

라플라스(Pierre-Simon)
라플라스(Pierre-Simon)

태양계의 안정성 연구로 가장 잘 알려졌다.

그는 뉴턴의 중력이론을 태양계에 성공적으로 적용시켜 관측된 행성들이 이론적인 궤도에서 벗어나는 현상들을 낱낱이 해명했으며, 우주진화에 관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또한 과학적인 자료의 확률적인 해석이 유용하다는 것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는 빈농의 아들이었으며, 보몽의 군사학교를 다닐 때 수학적 재능이 일찍 나타났다는 점 이외에는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8세에 궁핍한 환경에서 벗어나 파리로 갔으며, 그곳에서 수학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뒤 여러 역학 원리에 관한 편지를 수학자 장 달랑베르에게 보냈으며, 달랑베르는 그를 사관학교의 교수로 추천했다.

1773년 뉴턴의 중력이론을 전 태양계에 적용하여 평생에 걸친 대작업을 시작했으며 특히 어려운 문제, 즉 '왜 목성궤도는 계속 줄어드는 것으로 보이고 토성의 궤도는 자꾸만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는가'라는 문제부터 다루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태양계 안에서의 상호중력작용은 너무 복잡해서 수학적으로 풀 수 없다고 여겨졌었다. 사실 뉴턴조차도 태양계의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이 주기적으로 개입해서 조정해야 한다고 결론지을 정도였다. 그는 행성의 평균운동의 불변성을 발표했으며, 이심률과 궤도경사각의 3제곱까지 증명했다.

1773년의 이 발견은 태양계의 안정성을 최초로 증명한 가장 중대한 업적이며 천체역학에 있어서 뉴턴 이후의 가장 중요한 발전이었다. 그해 이 업적으로 과학 아카데미의 준(準)회원이 되었다.

1780년에는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와 함께 발명한 얼음 열량계를 사용하여 정량적 방법으로 생물계와 무생물계를 비교하여 호흡이 연소의 한 형태임을 밝혔다. 그뒤 그는 천문학 연구로 돌아와서 행성섭동(行星攝動)의 모든 문제, 즉 중력의 상호영향에 관한 문제를 조사하여 1786년에는 행성궤도 사이의 이심률과 경사각이 작고 일정하며 자동으로 수정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따라서 섭동영향은 누적되거나 분열되지 않고 보존되며 주기적이다. 예를 들어 목성과 토성의 상반되고 장기적인 불일치(즉 가속과 감속)는 929년 주기로 영향이 바뀌기 때문이며, 이 둘 사이의 불일치는 누적되는 것이 아니라 주기적인 것이다. 회전타원체(回轉楕圓體) 사이의 인력 문제로 바꾼 그는 1784~85년에 공전하는 회전타원체에 관한 자신의 정리(定理)가 공통 초점을 가진 모든 회전타원체에 대해 맞다는 것을 증명했으며, 표면이나 그 바깥의 입자에 회전타원체가 미치는 인력문제를 연구했다.

입자에 미치는 어떤 질량의 인력은 입자의 방향에 관계없이 하나의 함수를 미분하여 바로 구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이 발견을 통해 열·자기·전기 등 과학적 연구에 대한 수학적인 기초를 다졌다(중력).

1787년 그는 의 가속이 지구 궤도의 이심률에 따른다는 것을 밝혀내어 태양계의 이론적 설명에 관한 마지막 난제를 해결했다.

지구 주위를 도는 달의 평균운동(평균 각속도)은 주로 달과 지구 사이의 인력에 의존하지만, 그 값은 태양의 인력에 의해 약간 줄어든다. 그러나 태양의 작용은 다른 행성들의 섭동에 의한 지구궤도의 이심률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결국 지구 궤도가 자꾸만 원이 될수록 달의 평균운동은 가속되고,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나면 이러한 움직임은 늦어진다.

그러므로 그는 불일치는 결코 누적되는 것이 아니고, 그 지속 기간이 수백만 년일 뿐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리하여 태양계에 관한 이론적 설명에서 불안정성에 대한 마지막 난제가 영영 사라졌다.

1796년 그는 〈세계의 체계에 대한 해설 Exposition du système du monde〉이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이 책에서는 천체역학을 프랑스 산문을 본떠서 다소 대중적으로 다루었다. 이 책에는 태양계의 기원을 가스성운의 냉각 및 수축에 두는 '성운설'이 들어 있으며, 이 가설은 행성의 기원에 관해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의 〈천체역학 개론 Traité de mécanique céleste〉은 1798년부터 1827년까지 5권으로 발간되었으며, 중력법칙을 수학적으로 전개하고 적용한 것을 요약했다. 그는 행성과 그 위성의 운동 및 섭동을 계산하는 방법을 만들어 조석 문제의 설명을 포함한 태양계의 완전한 역학적 설명을 제시했으며 이 책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814년 일반 독자를 위해 〈확률에 관한 철학적 시론 Essai philosophique sur les probabilités〉을 간행했는데, 이 책은 특정 사건들이 자연계에서 일어날 확률을 수학적으로 예측하기 위해 고안한 많은 도구들에 대해 기술한 그의 포괄적 역작 〈확률해석론 Théorie analytique des probabilités〉(초판 1812) 2판의 서론이었다.

그는 그의 이론을 통상적인 확률문제뿐만 아니라 현상들의 원인과 인구동태 통계 및 미래사건 등의 연구에도 적용시켰으며, 동시에 물리학과 천문학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확률론). 그는 아마도 정치관이 강경하지 않았던 까닭에 프랑스 대혁명 동안에 투옥과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 경도국(Bureau des Longitudes)의 국장을 지냈으며, 미터법 제정과 과학학회인 아르쾨유 학회(Société d'Arcueil) 창설을 지원했으며, 후작(侯爵)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나폴레옹 치하에서 내무장관직을 6주 동안 맡았는데, 나폴레옹은 행정관으로서의 그의 능력을 별로 대단하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