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엘

라이엘

다른 표기 언어 Sir Charles Lyell, Bar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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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97. 11. 14, 스코틀랜드 포퍼셔 킨노디
사망 1875. 2. 22, 런던
국적 영국, 스코틀랜드

요약 모든 지표의 모양은 지질시대의 오랜 기간에 걸친 물리적·화학적·생물학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개념을 널리 받아들이게 하는 데 공헌했다. 이 개념은 '동일과정설'(제임스 허턴이 처음으로 제기함)로 알려져 있다. 라이엘은 지구발달의 해석뿐만 아니라 생물진화의 기초를 확립한 업적을 남겼다.
19세 때 라이엘은 옥스퍼드대학교에 입학했으며 고전·수학·지질학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지질학에 대한 관심은 윌리엄 버클런드의 열성적인 강의를 들은 후에 고취되었는데, 버클런드는 후에 동굴퇴적물의 화석연구를 통해 노아의 홍수를 증명하기 위한 시도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828년 5월부터 1829년 2월까지 계속된 이탈리아 여행의 결과로 〈지질학 원리〉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지질학 원리〉 출판으로 지질학 분야에서 유명한 지도자가 되었고 이것은 그를 과학 분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다윈과 천문학자인 존 허셸 같은 친구를 얻었다. 1838년에는 〈지질학 원론〉을 출간했는데, 그는 이 책에 유럽에 분포하는 암석과 가장 최근의 화석으로부터 당시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화석들까지 기재하였다. 1875년 라이엘은 12번째 〈지질학 원리〉 개정판을 교정보다가 사망하여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묻혔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생애
  3. 약력
  4. 지질학으로의 새로운 접근
  5. 과학적 명성
  6. 라이엘에 대한 평가

개요

모든 지표의 모양은 지질시대의 오랜 기간에 걸친 물리적·화학적·생물학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개념을 널리 받아들이게 하는 데 공헌했다.

이 개념은 '동일과정설'(제임스 허턴이 처음으로 제기함)로 알려져 있다. 라이엘은 지구발달의 해석뿐만 아니라 생물진화의 기초를 확립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1848년 기사작위를 받았고 1864년 준남작이 되었다.

초기생애

라이엘은 동부 스코틀랜드 그램피언 산기슭에 있는 킨노디에서 태어났다.

그는 2세가 되기 전에 잉글랜드 사우샘프턴 근처의 뉴포리스트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어린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박물학자이며 학문 저술활동에 전념한 부친은 지질학을 포함한 여러 분야의 책을 잘 보관하고 있었다. 10명의 아이들 중 맏이인 라이엘은 사립학교에 다녔는데 학교에서 특별한 성실성을 보이는 학생은 아니었다. 그는 학교 친구들의 장난과 자신이 결코 동감할 수 없는 계층구조 등의 사회관습에서 벗어나, 뉴포리스트 숲에서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첫번째 과학적 취미는 나비와 수생 곤충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비록 마을 사람들에게 남자답지 못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는 몇 해 동안 열심히 수집활동을 했다. 그의 관찰력은 다른 어떤 소년보다 뛰어났으며, 수집하고 비교하는 재능은 후에 중요한 발견을 하게 했다.

19세 때 라이엘은 옥스퍼드대학교에 입학했으며 고전·수학·지질학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지질학에 대한 관심은 윌리엄 버클런드의 열성적인 강의를 들은 후에 고취되었는데, 버클런드는 후에 동굴퇴적물의 화석연구를 통해 노아의 홍수를 증명하기 위한 시도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라이엘은 긴 방학을 여행과 지질 연구활동으로 보냈다. 1817년 야머스 저지대의 기원에 대한 언급은 이후의 연구 방향을 명확히 예시한 것이었다. 1818년 가족과 함께 대륙을 여행하는 동안의 예리한 지질학적·문화적 통찰은 그가 하루에 걸었던 거리만큼이나 뛰어난 것이었다.

1819년 12월 그는 우등으로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런던으로 이사했다.

약력

법학을 너무 열심히 공부한 탓에 시력이 약화된 라이엘은 야외 지질연구에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휴식을 취하던 중 1822년 서식스를 방문하여 지각의 수직이동에 대한 증거를 찾아냈다.

1823년 파리를 방문하여 유명한 박물학자인 알렉산더 폰 홈볼트와 조르주 퀴비에를 만났고 프랑스 지질학자 루이콘스탕 프레보와 함께 파리 분지를 조사했다. 1824년에는 킨노디 가까이에 있는 호수의 담수성 퇴적물에 대해 연구했다. 런던에 있는 동안에는 월터 스콧 같은 문학가를 만나고 몇몇의 과학학회에 참가하는 등 왕성하게 지적 활동에 참여했다.

지질학으로의 새로운 접근

법학 공부를 마친 후 라이엘은 1825년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재정적 도움으로 법학보다는 지질학에 더 열심이었고, 그해 첫번째 과학논문을 발표했다. 라이엘은 지질학을 논리화하는 새로운 원리를 급속도로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는 모든 지질학적 현상은 초자연적인 것에 반한 자연적인 설명이 있고, 현재의 일상적인 자연적 과정과 그로 인한 생성물은 그 종류와 규모가 과거의 것과 다르지 않으며, 매일 일어나는 변화는 매우 느린 속도로 진행되기 때문에 지구는 충분히 오랜 역사를 지녀야 한다는 내용의 책을 쓸 계획에 착수했다.

그는 야심에 찬 젊은 지질학자 로드릭 머치슨과 함께 그의 생각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을 수 있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지역을 탐사했다. 라이엘은 북부 이탈리아로부터 남쪽의 시칠리아 섬까지 혼자 여행했다. 열악한 도로조건과 수송수단의 미비로 여행은 힘들었으나 에트나 산 근처에서 그는 지구 모양을 설명할 자연적 요인들이 충분하고 에트나 산처럼 새로운 산체도 대단히 오래된 것이라는 놀랄 만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1828년 5월부터 1829년 2월까지 계속된 이 여행의 결과는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런던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즉시 〈지질학 원리 Principles of Geology〉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으며, 1830년 7월 제1권이 출판되었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사실로 채워져 있는 이 책이 왜 원리를 취급한 책이라고 불리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1830년 라이엘의 과학적 탐구방법은 진기하고 약간은 이단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의 원리를 많은 사실과 실례를 통해 가르쳐야 만 했던 것이다. 찰스 다윈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라이엘이 얼마나 훌륭하게 성공했는지를 보여준다.

"내가 읽은 맨 첫부분에서……라이엘이 지질학을 다룬 방법이 다른 어떤 저자와 비교해도, 내가 저술한 책 또는 그 후에 읽은 어떤 책에 비해도 놀랄 만큼 탁월함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1830년 여름 라이엘은 지질학적으로 복잡한 스페인의 피레네 지방을 여행하였는데 그곳은 폐쇄적이고 억압된 사회였으나 그를 황홀하게도 하고 또 그에게 반발하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 프랑스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그는 샤를 10세가 폐위되고 어디서나 삼색기가 나부끼며 지질학자들이 오로지 정치만을 이야기한다는 데 놀랐다.

런던으로 돌아와 〈지질학 원리〉를 다시 집필하기 시작하여 1831년 12월 제2권을, 1833년 4월에는 마지막 권을 끝냈다. 연구중에 그는 때때로 사교모임이나 과학모임에 참석했고, 독일 본에 있는 그의 연인 마리 호르너의 집에 인접한 화산지역을 여행하기도 했다. 1832년 7월 그는 그녀와 결혼했으며 스위스와 이탈리아로 지질조사를 겸한 오랫동안의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아버지가 지질학에 관심을 갖고 있던 마리는 라이엘과 흥미를 같이 하여 40년간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가 되었다.

라이엘의 연구에 동참한 그녀의 능력 때문에 그들의 결혼생활은 더욱 행복했다.

그후의 8년 동안 라이엘가는 평온한 생활을 보냈다. 겨울에는 연구와 과학적·사회적 활동에 참여하고 〈지질학 원리〉 개정에 전념하였는데 이 책이 잘 팔려 판을 거듭해 출판했다. 새 개정판을 위한 자료수집은 1834, 1837년 2번의 스칸디나비아 지방을 포함한 여름철 여행중에 이루어졌다.

1832, 1833년에 라이엘은 런던의 킹스 칼리지에서 강의를 하여 높은 평을 받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뺏기게 되어 후에 교수직을 사임했다.

과학적 명성

〈지질학 원리〉 출판으로 지질학 분야에서 유명한 지도자가 되었고 이것은 그를 과학 분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다윈과 천문학자인 존 허셸 같은 친구를 얻었다. 1838년에는 〈지질학 원론 Elements of Geology〉을 출간했는데, 그는 이 책에 유럽에 분포하는 암석과 가장 최근의 화석으로부터 당시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화석들까지 기재하였다. 이 책에는 특히 삽화를 많이 넣었는데 〈지질학 원리〉처럼 주기적으로 증보되고 개정되었다.

1841년 라이엘은 북아메리카에서 1년 동안 강의와 탐사여행을 해주도록 초청을 받아 이에 응했으며 돌아온 후에도 1845~46년의 9개월 동안과 1850년대에 잠깐씩 2번 방문했다.

이동안 라이엘 가족은 나이애가라 폭포를 포함한 대부분의 중요한 지질학적 명소들을 둘러보면서, 미시시피 강 동쪽의 미국 각 지역과 캐나다 동부의 많은 곳을 여행했다. 라이엘은 황무지에서 새로 개척된 많은 지역을 다니면서 편리한 교통수단에 놀랐다. 마차와 배로 여행하는 데 전문가인 라이엘은 신설된 철도와 기선이 빠르고 편리한 데 찬사를 보내곤 했다.

보스턴의 로얼 연구소에서 행한 라이엘의 강의는 사회 각계의 남녀 수천 명을 매혹시켰다. 라이엘은 1845, 1849년 2번에 걸친 긴 신세계 여행에 대하여 열성적이고 유익한 책들을 썼다. 대부분 부유한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과는 달리 라이엘은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연방주의에 성원을 보냈다. 미국의 남과 북 모두를 잘 아는 라이엘은 남부인의 용기와 군사기술에 감탄했지만 북군의 승리가 필연적이며 피할 수 없다고 믿었다.

1840년대에 라이엘은 과학계 외에서 더 널리 알려 지게 되어 휘그당 지도자 존 러셸, 스코틀랜드 야드의 창설자 로버트 필, 잉글랜드 사학자 토머스 머콜리 같은 사람과 사귀게 되었다.

1848년 라이엘은 그의 과학적 업적으로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왕실과 오랜 친교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1844년 영국 물리학자 마이클 패러데이와 함께 광산 재해의 예방에 대해 연구했으며, 1851~52년에는 런던 세계박람회의 위원을 역임했고 같은 해에 옥스퍼드대학교의 교육개혁을 도왔다. 그는 오랫동안 교회가 대학 위에 군림하는 것을 반대해왔다.

전문가로서의 라이엘의 명성은 계속 커져만 갔다. 라이엘은 일생을 통하여 1858년 영국 왕립학회의 최고 상인 커플리 메달을 받은 것을 비롯해 많은 상과 명예학위를 받았다. 그는 또한 여러 과학학회나 행사의 회장을 여러 번 지냈다. 그러나 이렇게 커져가는 명성과 의무들도 그의 지질학 탐구에 대한 열의를 감소시키지는 못했다. 부인 마리와 함께 매해 여름 유럽이나 영국을 여행했고 1854년 겨울에는 마데이라를 방문하여 그 섬의 기원과 그곳의 진기한 동·식물군에 대해 연구했다. 라이엘은 특히 젊은 지질학자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는 그들로부터 '노련한 경험자'에게는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1858년 노새를 타고 다니면서 철저한 재연구를 한 후 그는 몇몇 지질학자들이 여전히 주장해온 것처럼 에트나 산은 갑작스럽게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반복된 작은 분출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증명했다. 그는 마리에게 "좋은 노새는 늙은 지질학자에게 젊은 다리를 선물하는 것과 같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 Origin of Species〉 출판은 라이엘의 연구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비록 다윈이 형식과 내용 모두를 라이엘의 〈지질학 원리〉에 의존했지만 라이엘은 진화에 대해 결코 다윈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종의 기원을 읽고 1863년 〈원시 인류의 지질학적 증거 The Geological Evidence of the Antiquity of Man〉라는 책의 출간에서 절정에 달한 연구를 시작했다.

여기서 라이엘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잠정적으로 받아들였다. 1865년 〈지질학 원리〉 주 개정판을 완성하고서야 라이엘은 전적으로 다윈의 결론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는 여기에 새롭고 강력한 그 자신의 주장을 첨가하여, 다윈 이론의 추종자들이 많이 생기게 하였다. 왜 라이엘이 다윈 이론을 받아들이기를 망설였는가 하는 것은 다윈이 잘 설명하고 있다. 다윈은 "라이엘의 나이와 그의 젊었을 때의 생각 및 그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할 때 그의 행동은 영웅적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865년 이후 라이엘은 건강이 나빠져 비록 야외 지질조사를 전적으로 그만둔 것은 아니지만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1873년 그보다 12살 아래인 그의 아내는 잠시 앓아 누웠다가 그에게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루어진 무서운 변화를 가능한 한 잊어버리려고 내가 좋아하는 과학을 일과로 삼아 노력했다"라는 글을 남기고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1875년 라이엘은 12번째 〈지질학 원리〉 개정판을 교정보다가 사망하여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묻혔다.

라이엘에 대한 평가

라이엘은 아마추어 지질학자로 출발하여 연구와 경험으로 전문가가 된 그 시대의 전형적 인물이다. 그러나 당시나 현재의 대부분의 지질학자들과는 달리 결코 관찰과 수집을 최종단계로 여기지 않고 그러한 것들을 이론을 검증하고 확립하는 데 이용했다.

〈지질학 원리〉는 다윈 주변의 젊은 과학자들에게 시간과 변화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었다. 그들이 사라지자 비평가들은 다윈만큼 〈지질학 원리〉를 세심하게 읽지 않고 다윈이 라이엘에게서 배운 것을 다윈에게 돌리면서 라이엘의 명성을 절하시키기 시작했다. 라이엘은 아직도 몇몇 지질학자들에 의하여 과소평가되고 있는데 그들은 그들이 늘 쓰는 방법과 원리가 실제로 라이엘에게서 나온 것이고 라이엘의 시대에는 혁명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라이엘의 업적은 불후의 가치가 있으며 현대 독자들에게 중요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다윈의 평가를 보더라도 명백하다.

"〈지질학 원리〉의 진가는 우리 정신의 풍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고, 따라서 라이엘이 보지 못한 것을 우리가 보았다면 그것의 일부는 여전히 그의 눈을 통해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