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슬리

헉슬리

다른 표기 언어 T(homas) H(enry) Huxley 동의어 토머스 헨리 헉슬리, Thomas Henry Huxley
요약 테이블
출생 1825. 5. 4, 잉글랜드 미들섹스 일링
사망 1895. 7. 29, 서식스 이스트번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생물학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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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영향력의 확대
  4. 평가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개요

철학과 종교에 관한 고찰과 진화론(→ 진화설)에 대한 지지로 불가지론을 옹호하기에 이르렀다.

초기생애

T. H. 헉슬리는 교사였던 조지 헉슬리와 레이첼 헉슬리 사이의 8명의 자녀 중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가난하지 않았지만 넉넉하지도 않았다. 1833년 토머스는 일링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수학을 가르치던 그의 아버지가 1835년 교직에서 물러나게 되어 헉슬리는 8~10세 동안의 2년밖에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나중에 그는 이 시절에 대해 "학교에서 부딪힌 사회는 내가 알았던 것 중 최악이었다. 우리를 감독하는 사람들은 마치 자기들이 탁아소 경영자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의 지적·도덕적 복지에 지나치게 관여했다"라고 기록했다.

신체적·기질적으로 헉슬리는 그의 어머니를 닮았으며 그의 훌륭한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가족 모두에게 그다지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8명의 자녀 중 헉슬리와 그가 제일 좋아했던 여동생인 엘리자만이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으나 엘리자조차도 유산을 둘러싼 이상한 사건에 말려들어 남편과 함께 미국 테네시 주로 이민을 갔다. 1835년 이후의 헉슬리의 생활에 대해서 기록으로 남은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는 독학으로 독일어를 공부했으며 12세 때 이미 지질학과 논리학에 관한 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초기 청년기 동안 그는 자신이 실시한 간단한 과학 실험의 결과를 기록해 두기도 했다.

헉슬리는 공학자가 되려 했으나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15세 때 런던의 빈민지대인 이스트엔드에서 어떤 의사의 견습생으로 일하다가 런던 중심부의 채링크로스병원의과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게 되었다. 규정 과목보다는 자신의 지적 성향을 쫓는 경향에도 불구하고 헉슬리는 의대에서 여러 가지 상을 휩쓸었고, 학생시절에 이미 자신의 최초 논문집을 출판했다.

21세가 되던 해 장학생 자격이 끝나자 비록 자격은 없었지만 그는 남부 해양탐사 장비를 갖춘 순양함 'HMS 레틀스네이크호'의 보조 의사직을 구할 수 있었다.

그후 4년 동안 배가 어디를 항해하든지 간에 헉슬리는 현미경과 저인망으로 개조한 철사로 된 파리장 같은 조악한 기구들로 해양 표본들을 연구했다. 배가 항구에 정박할 때마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것을 우편으로 영국에 보냈으며 이것은 왕립학회나 왕립연구소 등의 저널에 실리기도 했다. 1850년 10월 그가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 당시 영국의 유명한 생물학자들은 자신들의 무리에 새로 동참하게 된 이 뛰어난 젊은이를 알고 싶어했다.

헉슬리는 즉시 이것을 이용해 영국 해군으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는 데 성공해 항해시절 수집했던 표본을 연구하기 위한 3년간의 유급 휴가를 받았다. 언젠가는 학위를 얻기 위해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고국에 돌아온 지 1년도 안되어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자 더이상 학위에 신경쓰지 않게 되었고, 그의 학위는 브레슬라우대학교·에든버러대학교·더블린대학교·케임브리지대학교·비르츠부르크대학교·옥스퍼드대학교·볼로냐대학교·에를랑겐대학교 등에서 수여한 명예박사학위이다.

1850년대에 헉슬리는 동물의 개체성, 연체동물(예를 들어 오징어), 고생물학의 방법, 과학과 과학교육의 원칙과 방법, 신경의 구조와 기능, 척추동물의 뇌에 관한 이론 등에 관한 중요한 논문을 출판해 유명해졌다.

그러나 1854년 자신의 연구가 아직 다 출판되지 않았다고, 해군본부가 3번이나 계속해서 내린 군복무 명령을 거절하여 해군에서 쫓겨났다. 레틀스네이크호에서 근무할 때 시드니의 해변에서 헨리에타 앤 히손을 만나 금방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이무렵 그는 결혼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봉급을 주는 과학 연구직 자리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살 생각을 했다.

그곳에서 양조업에 종사하면 결혼비용이 마련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대신 정부가 운영하는 작은 런던 광산학교에서 시간 강사 자리를 얻을수 있었고(나중에 전임강사가 되었음) 거기서 그는 왕성한 집필활동을 통해 부수입을 얻었다. 1855년 약혼녀가 영국으로 왔고 곧 그들은 결혼했다.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에든버러대학교·옥스퍼드대학교·하버드대학교 등 유수의 대학교에서 많은 제의를 해왔지만 헉슬리는 자신이 맨 처음 시작했던 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차차 과학사범학교, 유명한 왕립과학협회로 옮겼다. 그의 결혼생활은 매우 행복했다. 그의 아내는 8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가족 생활은 매우 따뜻하고 편안했다. 첫아이인 노엘만 아기일 때 죽었고 나머지 7명은 잘 자라서 특히 문학·예술 방면에 놀라운 재능을 발휘했다.

영향력의 확대

1859년 찰스 다윈〈종의 기원 Origin of Species〉이 19세기 학계에 마치 폭탄처럼 투하되었다.

헉슬리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다윈은 자신의 책을 출판하기에 앞서 헉슬리의 의견을 구했다(다윈은 세 과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나머지 2명은 조지프 달턴 후커 경과 찰스 라이얼 경이었음). 이를 계기로 다윈과 헉슬리 사이에는 긴밀한 유대 관계가 형성되었고, 다윈이 가능한 한 논쟁에서 멀리하고 있는 동안 헉슬리가 다윈의 주요 대중적 지지자로 활약하면서, 그후 10년 동안 그의 주장을 옹호하는 역할을 했다.

다윈주의에 관한 논의 중 가장 놀라운 사건은 1860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있었던 영국고등과학협회의 모임에서 일어났다. 새뮤얼 윌버포스 주교는 이 모임이 위험스러운 새 진화론을 타파하는 데 적절한 기회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회의장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주교가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열정, 무의미함과 공정하지 못한 태도로 연설하고 있는 동안 헉슬리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윌버포스는 헉슬리에게 원숭이 조상이 누구냐고 물어, 모욕스러운 질문을 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고, 헉슬리는 자신의 옆에 앉은 참석자에게 "주가 내 손을 통해 그를 낳으셨도다" 라고 말했다.

곧 그 대답을 듣고자 하는 요청이 있었으며 헉슬리는 "저에게 주어진 질문이 제 할아버지가 미천한 원숭이이기를 바라느냐 아니면 천부의 재능을 부여받고 상당한 영향력을 지녔지만 이 많은 사람들과 자신의 영향력을 중대한 과학 토론이 웃음거리가 되게 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사람이기를 원하느냐 라는 것이라면 나는 주저 없이 원숭이가 내 할아버지이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단순히 다윈의 이론이 다소 공정하게 토론될 수 있게 한 것뿐만 아니라 신학으로부터 과학의 독립을 선언한 결과를 낳았다.

1860년대에 와서 헉슬리는 고생물학·분류학(특히 조류의 분류)·인류학 등에 귀중한 연구를 했다.

그는 지질학 학회의 간사로 일했으며 나중에는 회장이 되었다. 또한 왕립외과협회의 헌터 좌(座) 교수가 되었고 인류학 학회의 회장 등 몇몇 왕립위원회에서 봉사했다. 그는 사우스런던노동자대학의 명예학장이 되었다. 또한 형이상학 학회의 회원이었고 식민지 폭동을 잔혹하게 진압한 자메이카 주지사인 에드워드 존 에어를 살인 죄목으로 처형시키기 위한 자메이카 위원회에서 일하기도 했다(성공적이지는 못했음). 그는 또한 전국을 돌며 과학 학회뿐만 아니라 일반 청중들과 기술공들에게도 강연을 했는데 이들에게 헉슬리는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1870년대에 헉슬리는 교육 개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런던 학교위원회의 영향력 있는 회원이었으며 그로 인해 그뒤 75년 동안 영국의 초등학교 교육이 조직적으로 운영되게 하는 데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권력 있는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영향력을 이용해서, 글이나 대중 연설을 통해, 그는 영국의 많은 고등교육 기관의 재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의 과학기술 혁명을 보더라도 그의 교육에 대한 견해는 놀라울 정도의 타당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Encyclopædia Britannica〉의 제9판에 권위 있는 기사들을 기고했다.

그리고 몇몇 과학 교과서를 출판했고 과학교사들에 대한 실제 훈련의 시작을 주도했다. 그는 왕립학회의 간사(나중에는 회장)가 되었으며 런던 칼리지의 이사가 되었다.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홉킨스대학교의 개막 연설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고 스코틀랜드의 애버딘대학교의 개혁을 주도하는 총장으로 봉직했다. 그리고 노동자 클럽과 노조연구소 등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튼 고등학교의 이사로 있으면서 과학교육 발전의 주요원동력이 되었으며, 부유한 상인조합인 길드나 런던의 동업조합들이 그들의 풍부한 자금을 기술교육 발전에 기부하도록 설득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전임강사로 광산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여러 직임을 맡는 동안에도 연구를 계속 했다(교육사).

1878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공부하고자 그리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사용했으며 이탈리아어도 상당히 유창했고 라틴어도 잘했음). 비록 정확한 의미의 철학가는 아니었지만 데이비드 흄, 그레고리 버클리, 르네 데카르트 등에 관한 저서는 여전히 명저로 간주된다.

그는 또한 신학에도 상당한 관심을 나타냈으며 자신의 지적 입장을 나타내기 위해 불가지론(지금은 흔한 용어임)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1885년 과학사범학교의 교수직을 사임했으나 명예학장직은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활발한 활동을 하지 않았음). 그는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많은 흥미로운 토론을 계속할 정도의 건강은 유지했다. 신학자·정치가, 자신의 눈에 지적으로 정직하지 못하거나 지적 자유를 억압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보이면 누구와도 논쟁을 벌였고 이러한 대결에서 주로 그가 이겼다.

1889년 런던을 떠나 영국 남해안의 조용한 휴양지인 이스트본으로 갔다. 그곳에서 집필 활동을 통해 계속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죽음을 맞았는데 토론 도중에 독감과 기관지염으로 사망했던 것이다. 1895년 7월 4일 그의 장례식은 지금의 런던 북쪽에 있는 핀츨리에서 종교의식 없이 거행되었다.

평가

헉슬리의 뛰어남은 전세계적으로 공인된 것이다.

영국 내에서의 영향력 있는 지위는 그대로 두고라도 이집트·러시아·스웨덴·이탈리아·뉴질랜드·미국·오스트리아·프로이센·벨기에·네덜란드 등 최소한 53개의 해외 과학학회들로부터 많은 명예를 얻었다. 그보다 위대한 과학자들도 있었지만 헉슬리처럼 광범위한 과학분야뿐만 아니라 그 세대의 사상이나 행동을 완전히 움직였고, 그 후 세대까지 그 연구가 타당하다고 간주되는 과학자는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