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지론

불가지론

다른 표기 언어 agnosticism , 不可知論

요약 경험현상을 넘어서는 어떤 것의 존재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설.

목차

접기
  1. 성격과 종류
  2. 역사적 배경
  3. 신앙주의와 불가지론의 양립 불가능
  4. 불가지론 원리에 대한 반박
T. H.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T. H.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성격과 종류

불가지론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처음 쓴 사람은 T. H. 헉슬리이다. 그는 이 말을 주로 영지주의파(靈智主義派)에 반대하는 자신의 관점을 가리켜 사용했지만, 지금의 용어는 더 포괄적이다. 예컨대 W. I.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에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양 극단 사이에 있는 데이비드 흄과 이마누엘 칸트(물자체의 본성을 알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를 '불가지론자'라고 규정한 바 있다.

헉슬리에 따르면, 불가지론의 본질은 어떤 분야에 관해 전혀 모른다는 고백이 아니다. 불가지론이란 "교의가 아니라 방법"이며, 그 본질은 이성이 이끌 수 있을 때까지 이성에 따라 최선의 지식을 얻고 그뒤에는 솔직하고 정직하게 자기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헉슬리는 불가지론과 무신론을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데 비해 불가지론자는 모른다고 주장할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논쟁가들과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 구분에 따르면 불가지론이 실천적 목적에서 무신론과 똑같은 것이 된다고 비판했다. 특히 엥겔스는 헉슬리와 그 동료들을 "수줍어하는 무신론자들"로 규정했는데, 이 규정은 오늘날에도 많은 불가지론자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한편 불가지론은 회의론과 다르다. 회의론은 경험을 넘어설 것을 요구하는 모든 지식에 도전하고, 따라서 과학의 성과와 가능성을 강조하는 실증주의 접근법과 양립할 수 없지만, 불가지론은 양립할 수 있다.

또 종교적 불가지론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이 모순적이지 않으려면 종교적 불가지론은 불가지론의 원리를 받아들이되 최소한 몇 가지 교리는 확실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헉슬리 자신은 종교적 불가지론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불가지론과 그리스도교 Agnosticism and Christianity〉(1889)에서 그는 불가지론과 양립할 수 없는 '과학적 신학'과 '교권주의'를 대비한다. 그가 교권주의자에게 갖는 불만은 그들이 "어떤 명제의 증거에 대한 엄격한 과학적 연구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 명제를 믿지 않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역사적 배경

세속적·무신론적 불가지론의 선구자는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원천은 데이비드 과 이마누엘 칸트이다.

사상가들에게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 헉슬리가 인식의 한계 속에는 일반적인 긍정적 자연신학이나 특별한 계시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한 것은 흄의 비판을 받아들인 셈이다. 흄의 비판은 〈인간 오성론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초판 1748)·〈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1779)에서 이루어졌다. 흄은 경험주의의 기본 주장에서 출발한다. 그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사실과 실재적인 존재"는 선천적으로 알 수 없으며, 특히 어떤 사물이 필연적으로 다른 사물의 원인일 수밖에 없는지 아니면 원인일 수 없는지에 대해서는 선천적으로 알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설계논증(우주의 구조·질서, 구성요소는 설계와 설계자를 함축함)을 빼놓고는 고전적인 신의 존재 증명을 모두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흄에 따르면, 여기서도 경험에서 출발한 논증은 지지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결과와 원인으로 추정되는 전우주와 신은 본질적으로 유일하고 비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후 흄은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인간이 알아낸 질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우주 자체가 원인이지 어떤 외부 원인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는 기적에 호소해서는 신의 계시에 관한 주장이 참임을 확립할 수 없다고 논증했다. 이후 유럽 역사에 비추어볼 때, 흄의 태도는 칸트처럼 이 영역에 대한 지식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이 태도는 그저 모른다고 고백하는 자들의 태도보다 훨씬 강한 불가지론이다.

오컴(William of Ockham), 오트르쿠르의 니콜라 등 스콜라 철학자들은 긍정적 자연신학의 가능성에 대해 공격했으며, 흄은 이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스콜라 철학). 한편 선천적 지식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불가능하다는 흄의 주장은 오랜 전통을 지닌 부정신학과 비교할 수 있다.

부정신학에 따르면 신의 본성은 피조물의 이해를 너무 멀리 벗어나 있으므로 신은 무한하다, 비교할 수 없다는 등 대략적·간접적으로만 묘사할 수 있다. 가령 13세기 최고의 스콜라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도 불가지론의 계기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비유적 술어원리를 통해 어떻게 유한한 피조물이 신에 관해서 긍정적인 점을 말하고 이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다.

반면 12세기 철학자 모제스 마이모니데스는 창조주에 관해서는 부정문으로만 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종교적 불가지론을 말하는 것이 자기모순은 아니지만, 종교적 관심사와 불가지론적 관심사를 조화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종교에는 형이상학적 내용이 전혀 없어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쉬운 방법은 어떤 대상을 숭배하는 것과 그 대상이 지닌 속성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서로 조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의 결함은 스펜서가 지적했듯이, 있다는 점 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어떤 존재가 있다고 긍정하는 것은 그 어떤 존재도 긍정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신의 본질 또는 내적 본성과 신과 창조의 외적 관계를 구별하는 것이다. 이 경우 신의 내적 본성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보잘 것 없거나 아예 없을 수도 있지만 신과 창조의 외적 관계에 대해서는 우리가 필요한 만큼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불가지론자가 되어야 한다.

신앙주의와 불가지론의 양립 불가능

인간인식의 한계를 근거로 전혀 증거가 없는 신앙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어떤 방식으로도 헉슬리의 불가지론과 양립할 수 없다. 가령 5세기에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의주의가 계시만으로도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6세기에 섹스토스 엠피리코스의 저작이 재발견되자 회의주의는 신앙주의로 가는 예비과정이 되었다.

신앙주의란 종교의 진리는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명제이다. 이러한 태도는 마르틴 루터가 에라스무스의 조심스런 불가지론을 반박할 때도 드러난다. "신성한 정신의 소유자는 회의주의자가 아니다.

이렇듯 합리적인 근거를 갖지 않은 신앙으로 도피하는 데 결정적으로 반박한 사람이 17세기 영국 경험론자 존 로크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는 것처럼 신의 어떤 계시가 참인지 아닌지 의심할 수 있다. 그래야만 신앙은 동의하고 확신할 수 있는 확고부동한 원리로서, 의심하거나 망설일 여지가 없다. 그럴 경우 우리는 그 신앙이 신의 계시이고 우리가 그 신앙을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광신의 방종과 잘못된 원리의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인간 오성론〉 4권 16장 14) 이러한 태도는 많은 사상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불가지론 원리에 대한 반박

불가지론과 정말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신앙을 증거도 없이 계산적으로 믿는 태도이다. 가령 프랑스의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이른바 노름 논증을 통해서 건전한 노름은 단 하나, 가톨릭교에 내기를 거는 것뿐인데, 그 이유는 잃을 것은 짧은 목숨뿐이고 얻을 것은 영생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파스칼에게 영감을 받은 윌리엄 제임스는 〈믿으려는 의지 The Will to Believe〉에서 불가지론 원리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격한다. 제임스는 증거가 없을 경우 선택은 당사자의 정서적 기질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