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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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23. 1. 8, 잉글랜드 몬머스셔 어스크
사망 1913. 11. 7, 도싯 브로드스톤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박물학자.

찰스 다윈과는 독립적으로 자연선택을 통한 종(種)의 기원론을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하며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젊은시절 식물학에 관심을 가진 월리스는 식물을 채집하기 시작했다. 1844~45년 레스터 컬리지어트 스쿨에서 강의를 하는 동안 영국의 박물학자 H.W. 베이츠를 만나 곤충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48년에 그들은 아마존을 탐험하고, 1853년에는 월리스 단독으로 〈아마존과 리오네그루 강에서의 탐험 이야기 A Narrative of Travels on the Amazon and Rio Negro〉를 출판했다. 그러나 영국으로 되돌아오는 도중 배가 침몰하여 이미 영국으로 보낸 것을 제외한 모든 수집품이 소실되었다.

1854~62년 말레이 열도를 탐사하여 아마존에서 수집한 것 외에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더 많은 증거들을 수집했다(진화). 1855년 2월 보르네오의 사라와크에 머물면서 비록 명료하지만 기초적인 소론 〈새로운 종의 도입을 조절하는 법칙에 관하여 On the Law Which Has Regulated the Introduction of New Species〉를 쓰고 그해 후반에 출판했다.

이 글에서 그는 "모든 종은 시간적·공간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된 종에서 기원했다"고 언급했으며, 10년 동안 "종의 변화 방법에 관한 의문이 내 마음을 떠난 적이 없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1858년 2월 말라리아가 테르나테에서 기승을 부리는 동안 몰루카에서 인간의 진화에 대하여 생각하던 중 경제학자 R. 맬서스의 〈개체군에 관한 소론 Essay on Population〉을 상기하게 되었는데, 그는 그 순간을 "적자생존의 개념이 갑자기 나에게 떠올랐다"라고 적고 있다.

그는 이 이론을 하루 저녁에 생각하고 고안한 후 그 다음 이틀 저녁 동안 완전히 서술한 뒤 그 이튿날 다윈에게 편지로 보냈다. 그러나 이 편지는 1858년 3월 9일까지 테르나테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윈은 영국에서, 젊은 박물학자 월리스가 보낸 원고에서 즉시 자신이 생각해온 것과 동일한 이론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논문을 받은 날인 6월 3일 지질학자 C. 라이엘 경에게 편지로 "나는 이보다 더 놀라운 일치를 결코 보지 못했다"라고 말했으며, "이제 월리스가 만든 새로운 용어는 내 책의 머리글자가 되었다"라고 덧붙였다. 그 이듬해인 1859년 11월 다윈은 〈종의 기원 Origin of Species〉을 출판했다(→ 종분화).

라이엘과 식물학자 J. 후커 경의 충고에 따라 월리스의 소론은 1858년 7월 1일 린네 학회에 공동 논문 형식으로 다윈의 관점을 담은 개요와 함께 실렸다.

월리스 항(項)의 제목은 〈원래형에서 무한히 벗어나는 다양화 경향에 대하여 On the Tendency of Varieties to Depart Indefinitely from the Original Type〉였다. 생존을 위한 투쟁과 동물의 번식 속도, 그리고 평균 개체수의 먹이공급에 의존하는 정도가 설명되었고, "자신의 생존을 연장하는 개체들은 건강과 활력이 가장 완전한 개체들이고……가장 약하고 가장 불완전하게 조직된 개체들은 항상 도태한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 개체의 생활사 동안 일어난 환경변화로 인하여, 필요에 의해 생겨난 생물체의 구조적 변화가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라마르크의 이론과 자연선택 사이의 차이점이 월리스에 의해 논의되었다.

그는 또한 매와 고양이는 자신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먹이를 가장 잘 움켜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개체들이 가장 오래 살아남기 때문에 오므릴 수 있는 발톱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린이 먹이를 얻기 위해 목이 길어진 것이 아니라 목이 긴 기린도 목이 짧은 기린처럼 땅 위의 신선한 목초를 먹었지만 낮은 곳의 먹이가 고갈된 후에 목이 긴 기린들만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라마르크는 육체적인 변화가 유전되고 이것이 종 변화의 원인이라고 한 것에 반해 월리스는 생존을 위한 투쟁과 적자생존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동물들, 특히 곤충들은 적으로부터 자신을 가장 잘 은폐시킬 수 있도록 적응된 색을 가진 종들이 당연히 가장 오래 살아남기 때문에 환경을 닮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라마르크 설).

월리스는 〈말레이 열도 The Malay Archipelago〉(1869)에서 열도를 동물들의 친화도에 따라 동양적인 섬들로 이루어진 보르네오와 발리를 서부군으로,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쪽에 연결된 설레베스와 롬보크를 동부군으로 이분했다.

동양적인 보르네오와 발리는 각각 월리스 경계선으로 알려진 좁은 해협에 의해 셀레베스와 롬보크로부터 분리된다(→ 월리스 선). 월리스는 이 경계선의 양쪽에는 임의로 선택된 두 지역에서 관찰되는 것처럼 토착 포유류들이 아주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월리스의 자연선택이론은 이 지역에서의 여행 도중에 형성되었다(말레이 제도).

1870년 사라와크와 테르나테에서 씌어진 월리스의 두 소론이 다른 사람들의 논문과 함께 1권의 책 〈자연선택설에의 기여 Contributions to the Theory of Natural Selection〉로 출판되었다.

이 책과 다른 책에서 나타난 월리스의 견해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윈의 견해와 차이를 보인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이 자연선택에 의해 지금의 신체구조를 갖게 되었다고 믿었지만 다윈은 인간의 보다 높은 정신능력이 자연선택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 여겼고, 월리스는 비생물학적인 어떤 작용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유심론의 주체에 대해 월리스가 가졌던 신념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또한 화려한 색을 띤 수컷이 암컷에 의해 선택된다는 다윈의 '성(性) 선택' 가설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시하고 보호·은폐의 효과를 강조하면서 자연선택만이 작용했다면 암컷 조류들은 산뜻하지 못한 색만을 띠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10년 영국 정부로부터 그는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또한 그는 토지 국유화와 여성 참정권의 열렬한 옹호자이기도 했다. → 진화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