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스타인 베블런

소스타인 베블런

다른 표기 언어 Thorstein (Bunde) Veblen
요약 테이블
출생 1857. 7. 30, 미국 위스콘신 매니터웍
사망 1929. 8. 3, 캘리포니아 멘로파크 근처
국적 미국

요약 경제제도 연구에 진화론과 동적인 접근방식의 적용을 시도했다. 저서 <유한계급론>(1899)으로 학계에서 널리 인정을 받았으며, 오늘날까지도 부자의 생활상을 묘사할 때 널리 사용되고 있는 '과시적 소비', '금전상의 경쟁' 등의 말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첫 저작이자 대표적 저서인 <유한계급론>은 1899년 '기존 제도에 대한 경제적 연구'라는 부제를 달고 출판되었다. 경제학사에서 과시소비를 처음으로 다룬 이 저서에서 소스타인 베블런은 과시소비가 과거에 약탈을 일삼았던 야만문화의 잔재라고 주장했다. <유한계급론>은 문학계의 큰 관심을 불렀고, 독자들 대부분은 이 내용을 과학이라기보다는 풍자로 받아들여 사회비평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베를런의 명성은 1930년대에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많은 나라에서 발생된 경제불황은 산업구조에 대한 베블런의 비판적 사고가 옳았음을 증명해주는 듯했다.

베블런(Thorstein Veblen)
베블런(Thorstein Veblen)

소스타인 베블런은 경제제도 연구에 진화론과 동적인 접근방식의 적용을 시도했다(경제이론). 저서 〈유한계급론 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1899)으로 학계에서 널리 인정을 받았으며, 오늘날까지도 부자의 생활상을 묘사할 때 널리 사용되고 있는 '과시적 소비', '금전상의 경쟁' 등의 말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노르웨이 가문 출신이었던 소스타인 베블런은 학교에 들어가서야 처음으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해, 평생동안 그의 영어에는 노르웨이 억양이 섞여 있었다.

미네소타 주의 칼턴대학교를 3년 만에 졸업한 소스타인 베블런은 스스로가 훌륭한 학자이자 냉소적인 이기주의자로서 기성의 견해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습관이 있다고 자처했다. 베블런은 다시 존스홉킨스대학교와 예일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해 1884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교수직을 구할 수 없었던 베블런은 미네소타 주에 있는 아버지의 농장으로 돌아가 7년 동안 거의 독서만 하면서 지냈다. 베블런의 전기 작가는 "며칠씩이나 다락방 창문으로 그의 머리 꼭대기만 내다보였을 뿐 아무도 그를 만날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1888년 소스타인 베블런은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가문의 엘런 롤프와 결혼했다. 계속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던 베블런은 1891년 코넬대학교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로렌스 래플린의 신임을 얻어 1892년 래플린이 신설된 시카고대학교의 경제학과장으로 추대되었을 때 베블런의 배려로 경제학과의 펠로가 되었다. 베블런은 39세의 나이가 된 1896년에야 비로소 전임강사직을 얻었다.

소스타인 베블런의 첫 저작인 〈유한계급론〉은 1899년 '기존 제도에 대한 경제적 연구'(An Economic Study of Institutions)라는 부제를 달고 출판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읽히고 있는 이 저서는 소스타인 베블런의 사상적 기초를 보여준다. 베블런은 다윈의 진화론을 현대의 경제생활 연구에 적용하려 했다. 베블런은 산업화된 제도가 사람들에게 근면·효율·협동을 요구하는 반면, 실제로 산업계를 지배하는 사람들은 돈을 벌고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는 데에만 여념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과거에 약탈을 일삼았던 미개사회의 잔재라고 주장했다. 베블런은 통치계급의 오락, 패션, 스포츠, 종교, 미적 취향 등을 통해서 매우 흥미있게 '현대에 남아 있는 미개사회의 잔재'들을 연구했다.

〈유한계급론〉은 문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독자들 대부분이 이 내용을 과학이라기보다는 풍자로 받아들였고, 소스타인 베블런은 곧 학자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회비평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사회진화론).

그러나 이와 같은 명성이 소스타인 베블런에게 학문적 성공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소스타인 베블런은 강의나 시험과 같은 대학의 일상들을 경멸했던 것을 빼고는 그저 평범한 교육자일 뿐이었다. 베블런의 강의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문명에서의 경제적 요소'라는 강좌는 역사학·법학·인류학·철학 등 매우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었지만, 실제로 정통 경제이론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1904년 베블런은 〈기업이론 The Theory of Business Enterprise〉이라는 저서를 발표했다.

소스타인 베블런은 이 저서에서 근대적 공업과정과 기업의 무분별한 관행(예를 들면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이 꼭 이익을 내는 것이 아닌 경우 등)은 양립할 수 없다는 진화론적 주제를 상세히 밝혔다.

소스타인 베블런은 시카고대학교에서 비로소 조교수직을 맡게 되었으나 혼외정사의 추문으로 인한 불화로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그뒤 1906년 스탠퍼드대학교의 부교수로 임용되었지만, 3년 만에 또다시 사생활이 문제가 되어 결국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베블런은 다소 어려움이 있었지만, 1911년 마침내 미주리대학교에서 낮은 보수로 강사 자리를 얻어 1918년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1914년 소스타인 베블런은 엘런 롤프와 이혼하고 몇 년 간 사귀어온 이혼녀 앤 페슨던 브래들리와 재혼했다. 두 딸을 데리고 있었던 그녀는 딸들을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에 나타나 있는 실용적 사고방식에 따라 키웠다.

소스타인 베블런은 미주리대학교에 근무하는 동안 많은 저작을 내놓았다. 베블런은 〈제작본능(製作本能)과 산업기술의 실태 The Instinct of Workmanship and the State of the Industrial Arts〉(1914)에서 기업은 유용한 노동을 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기질과 본질적으로 갈등관계에 있다는 사고를 보다 체계화해, 인간의 역량 가운데 많은 부분이 비효율적인 제도에 의해 소모된다는 내용으로 정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인류의 전망에 대한 소스타인 베블런의 비관적 사고를 더욱 심화시켰다. 〈독일제국과 산업혁명 Imperial Germany and the Industrial Revolution〉(1915)에서 베블런은 독일이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민주국가들에 비해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독일은 독재권력의 힘으로 보다 많은 근대 기술의 수확을 국가 업무에 이용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소스타인 베블런은 또 독일이 결국에는 과시적 경제구조를 새롭게 발전시킬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장점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덧붙였다. 〈평화의 본질과 그 존속 기간에 대한 연구 An Inquiry into the Nature of Peace and the Terms of Its Perpetuation〉(1917)를 발행하면서 베블런은 국제적으로 많은 지지자을 얻었다. 또한 베블런은 현대 전쟁이 주로 국가적 기업들의 경쟁적 수요 때문에 발발한다고 설명하고, 평화는 '소유권과 그 소유권의 효력이 발휘될 수 있는 가격제도'라는 2가지 요소의 희생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18년 2월 소스타인 베블런은 워싱턴 D. C.의 식량국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경제문제에 대한 소스타인 베블런의 접근 방식이 정부 행정관료들에게는 쓸모가 없어, 결국 5개월도 못 되어 다시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1918년 가을 베블런은 뉴욕의 문예·정치 잡지인 〈다이얼 The Dial〉의 기고가가 되어 '현대적 사고와 새 질서'에 대한 논문을 연재했다. 이 글은 이후 〈기득권익과 산업기술의 현황 The Vested Interests and the State of the Industrial Arts〉(1919)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행되었고, 다시 〈기득권익과 일반인:현대적 사고와 새 질서 The Vested Interests and the Common Man:The Modern Point of View and the New Order〉로 재발행되었다.

학계에서 소스타인 베블런의 지위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지만, 그의 사적인 생활은 점점 더 비참해졌다.

정신착란으로 시달리던 2번째 부인은 1920년 세상을 떠났다. 소스타인 베블런 자신도 몇몇 헌신적인 친구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냈고, 신경이 극도로 쇠약해져 그의 사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베블런이 뉴욕 시의 사회연구학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강의를 하는 동안 그의 급여는 이전 학생들이 지원하는 보조금으로 충당되었다. 베블런의 마지막 저작 〈소유권 부재와 근대의 기업:미국의 사례 Absentee Ownership and Business Enterprise in Recent Times:The Case of America〉(1923)에서는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장황하게 기업의 재무문제를 다루었는데, 여기서 그는 다시 한번 산업기술과 기업 간의 모순을 중점적으로 부각시켰다.

1926년 소스타인 베블런은 강의활동을 그만두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 위의 오두막에서 의붓딸과 함께 지내면서 남은 여생을 보냈다.

소스타인 베블런의 명성은 1930년대에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많은 나라에서 발생된 경제불황은 산업구조에 대한 베블런의 비판적 사고가 옳았음을 증명해주는 듯했다. 베블런은 어떤 형태의 정치적 행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비관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그를 정치적 급진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로 보았다.

경제학자들 사이에는 소스타인 베블런을 매우 훌륭하게 여기는 입장도 있고 비판하는 입장도 있었는데, 비판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또한 근대 산업사회에 대한 학문적 분석이라는 측면에서는 베블런과 동시대인으로서 그보다 복잡한 사상을 전개했던 막스 베버가 훨씬 더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베블런과 가장 가깝고 그의 풍부한 학식과 독창적인 통찰력에 찬사를 보내는 제자들까지도 그의 인류학적·역사적 접근이 너무나 포괄적이어서 과학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베블런의 제자로서 유명인사인 웨즐리 C. 미첼은 그를 '다른 세계에서 온 방문객'이라고 부르면서,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어느 누구도 환경의 미묘한 속박으로부터 그처럼 정신이 자유로운 사람은 없었으며, 그만큼 탐구의 영역을 넓힌 사람 또한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