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화론

사회진화론

다른 표기 언어 Social Darwinism , 社會進化論

요약 사회가 일정한 방향으로 진화, 발전한다고 보는 이론. 19세기 중엽 영국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정역학>에서 처음 주장되었다. 사회진화론자들은 인간 사회의 생활을 생존 경쟁으로 보았고, 그 투쟁은 적자생존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했다. 사회진화론자들은 인구 변동에 작용하는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우수한 경쟁자가 살아남고 인구의 질이 계속 향상된다고 믿었다. 사회진화론은 이후 제국주의적·식민주의적·인종주의적 정책을 철학적으로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나 사회진화론은 20세기 이후 생물학적·사회적·문화적 현상에 대한 지식이 증대되고 그 이론구조가 배격되면서 쇠퇴했다.

사회가 진화한다고 간주하는 이론.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영국의 철학자·과학자인 허버트 스펜서와 월터 배젓, 미국의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 등에 의해 주장되어 널리 유행했던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약자가 줄어들고 그들의 문화는 영향력을 상실하는 데 반해, 강자는 강력해지고 약자에 대한 문화적 영향력이 커지게 된다고 보았다. 사회진화론자들은 인간사회의 생활이란 생존경쟁이라고 생각했고, 그 투쟁은 스펜서가 제창한 '적자생존'(適者生存)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했다.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흔히 사회진화론이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오해되고 있지만, 영국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사회진화론 개념을 처음 주장한 〈사회정역학(Social Statics)〉은 1851년에 발간되었고,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은 1859년에 발간되었으므로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만, 스펜서가 1864년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후, 다윈이 이 개념을 받아들여 1869년 <종의 기원> 제5판에 이 용어를 쓴 것으로 보면, 각각 논지는 달랐으나 유사한 개념과 용어를 서로 받아들여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론적으로 다윈의 진화론은 주어진 환경에 적합한 특징을 가진 개체가 살아남는 것을 진화의 과정이라고 보았고, 따라서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여러 종이 진화해 나간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생물 개체 자체에 고등한 특징과 열등한 특징이 있어 고등한 것이 경쟁을 통해 살아남는다고 보는 사회진화론과는 큰 차이가 있다. 개체 자체에 진화의 단계와 우열이 있다고 보는 사회진화론은 이후 개인과 사회의 타고난 자질이 있어 개인과 집단, 민족 간에 우열이 있다고 보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사회진화론자들은 인구변동에 작용하는 자연선택과정을 통해 우수한 경쟁자들이 살아 남고 인구의 질이 계속 향상된다고 믿었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사회 역시 이런 방식으로 진화하는 유기체들로 간주했다. 이 이론은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데 이용되었다. 계급적 불평등이 개인들 사이의 '자연적' 불평등을 기반으로 정당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재산에 대한 지배가 근면·절제·검소와 같은 우월하고 생득적인 속성들과 상호 관련된다는 주장을 폈기 때문이다(→ 계층).

따라서 국가개입 등의 수단을 통해 사회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자연적 과정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무제한적인 경쟁과 현상유지가 생물학적 선택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는 '도태된 자'로서 도움을 주어서는 안 되며, 반면 생존경쟁에서 부는 성공의 상징이라고 인식했다. 한편 사회진화론은 앵글로색슨족이나 아리안족의 문화적·생물학적 우월성에 대한 믿음을 지지함으로써 제국주의적·식민주의적·인종주의적 정책을 철학적으로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한편 19세기말 일본에서도 사회진화론은 적자생존과 생존경쟁을 중심논리로 하여 가토[加藤引之]·도야마[外山正一]·후쿠자와[福澤諭吉] 등의 학자들에 의해 수용·전파되어 당시 일본의 지적 풍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중국에서는 청일전쟁 패배 이후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반성하는 분위기 속에서 옌푸[嚴復]·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 등에 의해 활발하게 수용되었다. 그러나 사회진화론은 20세기 들어 생물학적·사회적·문화적 현상에 대한 지식이 증대되면서, 그 이론구조가 배격됨으로써 쇠퇴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사회진화론

사회진화론은 조선에서도 1880년대에 이미 그 영향력을 드러내어 190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주로 일본인들의 번역서·저서 등을 통해 소개되었으나, 1900년대에는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 등 중국인의 글을 통해 유입되었다. 그후 대한자강회·대한협회·교남학회 등 각 학회 잡지나 저서·신문 등에 사회진화론에 관한 글들이 자주 등장했다.

이러한 사회진화론적 인식은 유길준·윤치호·박영효 등 한말 문명개화론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특히 유길준〈서유견문 西遊見聞〉에서 사회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사회의 미개·반개화(半開化)·개화(開化)라는 3단계 발전론으로 압축되는 문명관을 제시하기도 했다. 당시 약육강식하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을 목격하고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사회진화론을 하나의 정치사상으로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전통적 유교논리가 사회를 발전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화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이상사회로의 복귀를 추구하는 것인 데 반해, 사회진화론은 기본적으로 사회가 진보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유교의 퇴화적 현실인식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개혁이념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우승열패·적자생존·생존경쟁이 자연계나 인간사회를 움직이는 기본원리라고 규정했고, 경쟁이 사회진보의 원동력이라고 하여 당시를 '경쟁시대'로 인식했다.

사회진화론의 수용과 전파는 당시 개화사상과 독립협회의 활동 및 계몽운동의 현실인식체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부국강병·국민교육·계몽을 강조하는 개화파 문명개화론의 이론적 지주였는데, 구체적으로 입헌군주제와 사회(국가)유기체론과도 결합하여 나타났다. 사회진화론은 기본적으로는 개인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나, 사회유기체론과 결합하면서 개인이 전체에 봉사하는 관념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래서 항상 강자의 입장을 합리화시켜주는 이론으로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배권을 인정하고, 국가의 발생·변천을 약육강식의 논리로 설명하면서 국가의 강화를 강조하는 국권론적 입장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민중을 교화의 객체로 보고 민중에 대한 교육을 중요시하며, 이를 기반으로 한 자강개혁을 지향했다. 아울러 서로 병탄하는 현실에서 국가민족을 보전하는 방법은 국민의 애국뿐이라고 하여 애국심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들은 제국주의 침략을 받고 있던 현실을 약자는 강자의 침탈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인식, 제국주의 침략을 오히려 문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회로 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