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버트 스펜서

허버트 스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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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20. 4. 27, 잉글랜드 더비셔 더비
사망 1903. 12. 8, 서식스 브라이턴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사회학자·철학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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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펜서의 생애와 업적
  2. 스펜서의 종합 철학체계
  3. 스펜서의 사회학과 사회철학
  4. 스펜서의 형이상학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허버트 스펜서는 일찍이 진화론을 주장하고 지식의 종합을 통해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사회보다 개인이, 종교보다 과학이 우월함을 주장했다.

명저 〈종합 철학체계 The Synthetic Philosophy〉는 1896년 완간된 종합 논문집으로서, 생물학·심리학·윤리학·사회학 원리에 관한 여러 가지 논문을 포함하고 있다.

여러 가지 과학을 종합하려는 노력을 통해 보여준 허버트 스펜서의 숭고한 대담성은 유일무이한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스펜서가 호의를 품고 예언했던 학문의 전문화가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발전했기 때문이다. 스펜서의 사회학은 사회연구를 촉진시키기는 했지만 이후 사회인류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쇠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펜서는 스스로 인정한 것보다 훨씬 더 자신의 사회이념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T. H. 헉슬리가 허버트 스펜서에게 비극이란 "추론이 사실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이론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애써 찾으면서 자신의 이론과 대립하는 것은 무시하거나 재해석해버리는 그의 특성을 지적한 것이다.

스펜서의 생애와 업적

스펜서의 아버지 윌리엄 조지 스펜서는 교장이었다.

부모가 심어준 비(非)국교적인 신앙은 그가 그리스도교를 버린 후에도 계속 영향을 미쳤다. 케임브리지대학교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삼촌 토머스 스펜서 목사의 제안을 거부해 거의 독학으로 고등교육을 습득하게 되는데 그것은 주로 자연과학에 관한 것들이었다. 몇 개월 동안 교사생활도 했으며, 1837~41년 철도 토목기사로 일하기도 했다. 1842년 〈비국교도 Nonconformist〉지(誌)에 기고한 편지(뒤에〈정부의 적정영역(適正領域) The Proper Sphere of Government〉(1843)이라는 책자로 다시 출판함)를 통해 정부의 임무는 자연권을 보장하는 데 있으며, 정부가 이러한 임무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경우 유익함보다 해로움이 더 많아진다고 주장했다.

한동안 〈조이스트 Zoist〉(최면술과 골상학 전문지)·〈파일럿 Pilot〉(완전 참정권 연맹 기관지)을 통해 진보적인 언론과 깊은 관련을 맺었으며, 1848년에는 〈이코노미스트 Economist〉 의 부주필이 되었다. 또한 스펜서는 1851년 〈사회정역학 Social Statics〉(재판 1955)을 출판했는데, 극단적 형태의 경제·사회 방임주의를 지지하는 주장을 포함해, 후에 그의 사상의 대부분을 이룬 이론적 맹아들이 담겨 있다.

1850년경 메어리언 에번스(소설가 조지 엘리엇)와 가까이 지냈는데 그의 친구들은 두 사람의 결혼을 예상했다. 그러나 〈자서전 Autobiography〉(1904)에서 스펜서는 에번스의 지적인 능력외에 결혼을 생각해본 적은 없다고 부인했다. 그밖에 G. H. 루이스, T. H. 헉슬리, J. S. 밀 등과도 교제했다.

1853년 삼촌한테서 유산을 받은 뒤 〈이코노미스트〉 부주필직을 사임했다.

1855년 〈심리학 원리 The Principles of Psychology〉 1부를 출판했으며, 1860년 종합 논문집 〈종합 철학체계〉 견본판을 발행하고 구독 예약을 받았는데, 여기에는 이미 출판한 〈심리학 원리〉 외에 제1원리와 생물학·사회학·윤리학에 관한 논문들이 포함되어 있다.

1862년 〈제1원리 First Principles〉를 출판했으며, 〈사회학 원리 The Priciples of Sociology〉 제3권이 나온 1862~96년에 〈종합 철학체계〉를 완간했다. 〈사회학 원리〉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1873년 〈서술 사회학 Descriptive Sociology〉이라는 저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서술 사회학〉을 통해 다양한 사회, 즉 원시사회와 문명사회의 제도에 대해 기술했으나 일반의 호응이 부족하여 1881년 중단하고 말았다.

후에 비어트리스 웨브로 이름을 바꾼 사회개혁가 비어트리스 포터도 스펜서의 친구였는데 포터는 스펜서가 병으로 죽기 전에 자주 그의 집을 방문했으며, 〈나의 견습생시절 My Apprenticeship〉(1926)을 통해 스펜서의 말년에 관해 슬프고 연민에 찬 기록을 남겼다. 스펜서는 1903년 브라이턴에서 죽었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수탁기관이 세워져 〈서술 사회학〉을 완간했다.

완간된 〈서술 사회학〉은 19부로 이루어져 있다(1873~1934). 스펜서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가장 많은 논쟁과 논의를 불러일으킨 사상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과학에 대한 지향이 강했던 그는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또한 자신의 사상 전체가 일관되고 질서정연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믿었다. 스펜서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과 철학은 개인주의와 진보를 지지하고 향상시켰다.

스펜서를 빅토리아 시대 낙관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르지만, 주목할 만한 사실은 비관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해서 때로 빅토리아 시대의 자신감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는 점이다. 스펜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진보 뒤에는 파멸이 따르게 마련이고, 사회주의와 전쟁이 소멸된 후에야 비로소 개인주의가 도래한다고 했다.

스펜서의 종합 철학체계

스펜서는 철학을 사회과학 기본원리의 종합, 중세시대 신학체계를 대신하는 일종의 종합과학으로 보았다.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통일을 생각했으며, 전체 체계는 실제로 생물학적인 종(種)의 진화에서 암시받았다. 〈제1원리〉에서는 물질의 기본법칙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법칙을 힘의 영속성 법칙이라고 했다.

이 법칙에 따르면, 어떤 동질적 사물도 외부의 영향을 받으면 동질적인 것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는데, 그 이유는 외부의 힘이 반드시 사물의 어떤 특정 부분에 영향을 미쳐 차이와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동질적인 것에 영향을 미쳐온 힘은 반드시 계속 더 많은 변화를 일으켜야만 한다고 결론지었다. 스펜서의 견해에 따르면,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알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힘 때문에 생기는 '영향 증식의 법칙'이 우주와 생물계의 모든 발전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찰스 다윈과 영국의 박물학자 앨프레드 러셀 월리스의 진화론이 알려지기에 앞서 스펜서가 생물학적 종의 진화에 대한 사상을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스펜서는 획득형질의 유전으로 진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한 반면, 다윈과 월리스는 자연선택 때문에 일어난다고 보았다. 그후 스펜서는 자연선택이 생물학적 진화의 여러 가지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여 〈생물학 원리 Principles of Biology〉(1864)에서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스펜서의 사회학과 사회철학

스펜서가 인간사회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해 처음으로 일반적인 진화론의 체계를 이끌어냈다는 것은 〈사회정역학〉을 보면 알 수 있다(→ 사회진화론). 그는 〈사회정역학〉에서 사회진화는 '개별화'의 심화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사회는 노동분화의 발전을 통해 차별이 없는 군집상태에서 복잡한 문명상태로 진화한다고 보았다.

사회는 근본적으로 강제에 의해 협력이 이루어지는 군사형 사회와 자발적으로 협력이 이루어지는 산업형 사회로 분류된다. 진화라는 개념이 스펜서가 사회학이론에 유일하게 응용한 생물학개념은 아니다. 그는 동물의 유기체와 인간사회를 상세히 비교했다. 양쪽에 모두 조절체계(유기체에서는 중추신경계, 사회에서는 정부)·유지 체계(유기체에서는 영양섭취, 사회에서는 산업)·분배체계(유기체에서는 혈관과 동맥, 사회에서는 도로·전신 등)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스펜서에 따르면, 동물유기체와 사회유기체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동물유기체에는 전체와 관련된 하나의 의식이 있는 반면, 사회유기체에는 각 구성원마다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동물유기체는 사회가 그 구성원들을 위해 있는 것이지, 구성원들이 사회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스펜서의 모든 사상체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군사형 사회와 산업형 사회 사이의 대비는 원시적이고 악한 독재와 문명화되고 유익한 개인주의에서 이끌어낸 것이다. 산업사회에서는 아무도 계획하지 않지만 질서가 이루어져 모든 당파의 요구에 민감하게 적응한다고 믿었다. 〈인간 대 국가 The Man Versus the State〉(1884)에 따르면, 영국 보수당은 대체로 군사형 사회질서를 지지하는 반면, 자유당은 산업형 사회질서를 지지하는데, 19세기 후반의 자유당은 노동시간, 주류판매 허가, 위생시설, 교육 따위에 관한 입법을 통해 '신(新)보수주의'를 발전시킴으로써 '노예제 도래'를 위한 길을 닦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과거 자유주의의 기능은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데 있었다. 앞으로 참된 자유주의의 기능은 의회의 권력을 제한하는 데 있을 것이다."

스펜서의 형이상학

스펜서는 다양성과 차별에 대한 강조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17세기 스피노자라이프니츠가 이미 예시한 자유주의 형이상학을 19세기 언어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스피노자의 주장에 따르면, '신 또는 자연'에는 모든 가능성이 실현되는 무한한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신의 완전함은 우주의 무한한 다양성을 통해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모두 시간이 실재의 궁극적인 특징이라고 믿지 않았지만, 스펜서는 시간의 실재성에 대한 믿음과 다양한 존재의 모든 가능성이 영원히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을 결합했다.

스펜서는 자유주의적인 다양성의 원리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지지를 나타냈으며, 다양성의 원리에 의하면 변화가 있고 발전하는 사회가 변화가 없고 정적인 사회보다 바람직한 사회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