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엘리엇

조지 엘리엇

다른 표기 언어 엘리엇 , George Eli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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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19. 11. 22, 잉글랜드 워릭셔 칠버스코턴
사망 1880. 12. 22,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소설가. 근대 소설의 특징인 심리분석의 기법을 발전시킨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여성소설가이다. 주요작품은 〈애덤 비드〉·〈플로스 강변의 물방앗간〉·〈사일러스 마너〉 등이 있다.

조지 엘리엇(George Eliot)
조지 엘리엇(George Eliot)

그녀는 아버지의 고용주의 저택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영국 중부지방의 방언에 능통한 것은 그 지방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너니턴의 월링턴 여사가 경영하는 학교의 기숙생(1828~32)으로 갈 때까지, 그녀는 그 방언 이외의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곳에서 교장 마리아 루이스로부터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다.

교장은 존슨식 표준어법과 열렬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그녀에게 주입시켰다. 에번스는 코번트리에 있는 침례교회 목사의 딸들이 경영하는 학교를 마지막으로 다녔는데(1832~35), 그녀의 종교적 열정은 더욱 깊어졌다. 에번스는 엄격한 복장을 하고 자선사업에 열의를 보였으며 학교에서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배웠다.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가 계신 집안을 돌보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야 했으며, 아버지는 에번스가 집에서 독일어와 라틴어를 배우도록 허락했다.

1841년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코번트리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리본제조업으로 성공한 찰스 브레이(1811~84)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독학한 자유사상가로서 급진주의 사상을 선전하고 있었다. 그의 처남 찰스 헨넬은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대한 연구 An Inquiry Concerning the Origin of Christianity〉(1838)의 저자였으며 이 책을 읽고 나서 에번스는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던 정통 그리스도교와 결별을 단행했다.

성서와 과학과 관련된 여러 가지 책을 읽은 결과 그녀의 예민한 마음에 의심이 싹트게 된 것이다. 1842년 그녀는 더이상 교회에 나갈 수 없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 일로 부녀간에 몇 개월 동안 싸움이 계속되다가 타협이 성립되었다. 그녀가 교회에 점잖게 출석하기만 하면, 아버지는 그녀가 마음대로 사색하도록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1849년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브레이가와 헨넬가의 사람들은 극단적인 편협한 사고로부터 그녀를 끌어내어 보수적인 아버지의 종교적·정치적 견해와 완전히 반대되는 여러 가지 사상을 소개해주었다. 찰스 헨넬이 1843년 결혼했을 때 그의 부인은 D.F.슈트라우스가 쓴 〈예수 생애의 비판적 연구 Das Leben Jesu kritisch bearbeitet〉를 영역하고 있었는데, 에번스는 그녀로부터 그 일을 맡아 1846년 익명으로 3권의 책을 출판했으며, 이 책은 영국의 합리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헨넬이 결혼한 후 그의 장인 R.H.브라반트는 그녀를 디바이저즈로 초대했다. 그는 좀 우둔한 사람으로서 종교의 초자연적 요소를 제거할 책(완성되지 못함)을 수년 동안 집필하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독일어·그리스어 책을 읽었으며, 오랫동안 산책하면서 신학에 대해 토론했다. 브라반트 부인은 두 사람이 너무 가까워지자 질투심이 생겨 방문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강제로 돌아가게 했다.

헨넬 부인은 아버지가 에번스에게 비열한 짓을 했다고 느꼈다. 이 방문에서 심한 모욕을 느낀 에번스는 〈미들마치〉에서 캐소번이라는 인물을 끔찍할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녀는 1849년 겨울부터 그 이듬해까지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지냈는데 그때 화가 프랑수아 달베르 뒤라드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고 에번스는 그의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폭넓은 독서를 했다. 브레이 여사(1842)와 프레더릭 버튼 경(1865)이 그린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국립초상화미술관에 소장된 그림에서도 에번스의 살결은 매우 희고 머리는 연한 갈색이며 눈은 청회색을 띠고 있다.

코번트리로 돌아온 후 그녀는 1850년말을 브레이가의 가족과 함께 보내면서 그녀의 아버지가 남겨 놓은 연수입 100파운드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궁리하고 있었다. 〈예수 생애의 비판적 연구〉의 발행자 존 채프먼이 그녀에게 R.W.매카이의 〈지성의 진보 The Progress of the Intellect〉에 대한 서평을 〈웨스트민스터 리뷰 The Westminster Review〉 1월호(1851)에 게재하도록 주선한 일이 있었다.

그때부터 에번스는 자유기고가로서 런던에 살기로 결정했고, 1851년 1월 런던 스트랜드가(街) 142번지에 있는 채프먼의 집에 하숙했다.

그녀가 채프먼의 집에 도착하자 이내 난처한 일이 발생했다. 채프먼 부인은 가정교사이자 채프먼의 애인인 메리언(에번스는 자기의 이름을 이렇게 고쳤음)을 질투하여 10주 후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코번트리로 돌아가야 했다. 채프먼의 일기를 보면 분명히 에번스는 당시 채프먼에게 몹시 끌렸지만 그녀가 채프먼의 정부였다는 증거는 없다.

몇 개월 후 채프먼이 〈웨스트민스터 리뷰〉를 사들이자, 그녀는 자기로 인해 채프먼 집안에 뜻하지 않은 가정불화가 생겼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1854년까지 3년간 그녀는 〈웨스트민스터 리뷰〉의 편집보로 일했고, 그결과 이 잡지는 존 스튜어트 밀의 활동시기 이래 최고의 판매고를 보였다. 채프먼의 저녁 모임에서 에번스는 정치적·종교적 급진주의의 분위기 속에 많은 유명한 문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스트랜드가 건너편에 〈이코노미스트 The Economist〉의 편집보 허버트 스펜서가 살고 있었는데 채프먼은 그의 〈사회 통계학 Social Statics〉(1851)을 출판한 일이 있었다.

스펜서의 여러 가지 관심사에 그녀도 똑같이 흥미를 느끼게 되어 둘은 자주 만났으며 그결과 그들이 약혼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스펜서는 그녀의 남편이 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그녀와 결혼하게 될 두 남자를 소개해주었다.

조지 헨리 루이스는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저널리스트 중 가장 다재다능한 사람이었고, 1841년 애그니스 저비스와 결혼하여 4명의 아들을 두었다. 1850년 루이스와 그의 친구 손턴 리 헌트는 급진적인 주간지를 창간했으며 헌트는 문예 및 연극란을 담당하게 되었다.

1850년 4월 〈리더 The Leader〉의 창간호가 발간된 지 2주 후 애그니스 루이스는 헌트의 아들을 낳게 되었다. 루이스는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이를 에드먼드 루이스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호적에 올렸고, 헌트와 자기의 아내에게 여전히 다정하게 대했다. 그러나 1851년 10월, 아내가 2번째로 헌트의 아이를 낳자 그때부터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아내의 간통을 용서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혼소송을 제기할 수 없었다. 루이스가 실의에 빠지고 집안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풍지박산되었을 때, 에번스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리더〉의 기사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고, 그 잡지에 루이스가 평을 써야 할 연극과 오페라를 함께 관람했다. 루이스와 애그니스의 결별이 돌이킬 수 없는 사실임을 확신한 그녀는 루이스의 아내로 떳떳이 살아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854년 7월 포이어바흐의 〈그리스도교의 본질 Essence of Christianity〉 영역본이 출판된 후 루이스와 에번스는 함께 독일로 떠났다. 법률상의 형식을 따지지 않는다면 그들의 행위는 정식결혼과 다름없었으며, 1878년 루이스가 죽을 때까지 그들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렸다.

그녀는 브레이 여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볍고 쉽게 헤어질 수 있는 관계에 만족하는 여성들은 내가 한 것처럼 행동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육체의 만족을 얻고 여전히 정찬에 초대받을 거예요."

바이마르와 베를린에서 그녀는 〈웨스트민스터 리뷰〉를 위해 가장 훌륭한 글을 썼고 스피노자의 〈윤리학 Ethics〉(당시 미간행)을 영역했으며, 루이스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괴테의 생애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글을 써서 얻는 수입으로 애그니스와 스위스에서 공부하는 3명의 아이들(4명 중 1명은 죽음)을 부양해야 했다.

그는 1902년 애그니스가 죽을 때까지 매년 100파운드씩 계속해서 송금했다. 그녀는 헌트와의 사이에 4명의 아이를 두었고 막내는 1857년 태어났는데 모두 '루이스'라는 성으로 입적되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친구들은 애그니스에 대한 루이스의 행위가 너무 관대하다고 평했지만 반면 애그니스의 남편을 '데리고 달아난', '결단력있는 여자' 에번스에 대해서는 악평이 떠돌았다. 에번스가 가장 괴로워한 것은 자신의 행동으로 워릭셔에 살고 있는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던 사실이었다.

그녀는 어린시절의 추억에서 위안을 찾았으며, 다시 남편의 격려를 받아 칠버스코턴 교구에서 체험한 유년시절의 일들을 소재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1857년 〈블랙우즈 매거진 Blackwood's Magazine〉에 〈아모스 바턴 목사의 비운 The Sad Fortunes of the Reverend Amos Barton〉을 발표했는데 즉시 성공을 거두었다.

이어서 시골에서 일어나는 일을 근거로 한 〈길필 씨의 연애담 Mr. Gilfil's Love-Story〉·〈자넷의 회개 Janet's Repentance〉가 같은 해에 연재되었으며, 블랙우즈 매거진사는 이 세 작품을 조지 엘리엇이라는 필명으로 묶어 〈성직자의 생활 Scenes of Clerical Life〉(2권, 1858)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그녀의 첫 장편 〈애덤 비드〉(3권, 1859)에 대하여, 에번스는 "암소의 울음소리와 건초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골 이야기"라고 묘사했다.

'일상사를 성실히 묘사한' 능숙한 사실주의 작품으로, 영국 소설에도 러스킨이 라파엘 전파의 작품에 대해 칭송한 충실한 세부묘사가 도입되었다. 이 작품에는 유머가 풍부하며, 플롯은 감리교도인 그녀의 아주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즉 영아 살해로 유죄판결을 받은 소녀를 방문했던 일에서 기원하고 있다. 비드가에서 쓰던 사투리는 그녀의 아버지가 더비셔의 아저씨와 대화를 나눌 때 들었던 것이며, 그녀의 아버지가 일찍이 겪었던 경험의 일부가 주인공 애덤에게서 발견된다.

그러나 당시의 영국 소설에 비해 참신한 점은 깊은 인간적 동정과 엄격한 도덕적 판단의 결합이었다. 〈애덤 비드〉는 그해 8판을 거듭했으며 블랙우즈 매거진사는 이미 지불했던 800파운드를 한번 더 지불하고 판권을 돌려주었다. 〈플로스 강변의 물방앗간〉(3권, 1860)에서 그녀는 다시 유년시절의 무대로 돌아갔다. 이 작품의 전반부는 유년시절의 생생한 묘사로 매우 매력적이며, 전편을 통해 심리적인 미묘함을 새로운 경지까지 천착하여 그려낸 장면이 여러 번 나타난다.

그당시에는 역사소설이 유행하고 있었다.

1860년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 루이스는 그녀에게 사보나롤라를 제재로 한 작품을 써보라고 했다. 에번스는 그 말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 〈로몰라 Romola〉(1862~63)의 집필을 계획했다. 그러나 〈사일러스 마너〉를 먼저 쓰게 되었는데, 말하자면 그녀 자신과 구상중인 〈로몰라〉의 이탈리아 자료 사이에 비집고 들어온 것이 바로 이 작품이었다. 도둑맞은 황금 대신 길잃은 아이의 사랑을 얻게 되는 한 직조공의 이야기인데, 이 중편은 작품의 간결하고 완벽한 형식으로 인해 그녀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로몰라〉는 〈블랙우즈 매거진〉의 연재물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콘힐 매거진 The Cornhill Magazine〉에서 1만 파운드로 판권을 사겠다고 제의하면서 그녀에게 〈블랙우즈 매거진〉을 저버리도록 권했다. 그러나 그녀는 〈콘힐 매거진〉의 편집자가 원하는 대로 작품을 16회로 나누어 연재하기보다는 3,000파운드의 손해를 보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작가로서 고결한 성실성을 보여준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일은 당대 작가에게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피렌체의 역사·배경·의상·회화 등을 대영박물관에서 면밀히 연구했고, 1861년 이탈리아를 2번째로 방문했을 때에도 열심히 조사했다. 이 작품은 1862년 7월에서 이듬해 8월까지 14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장편에는 영국 이야기다운 '자연스러움'이 부족한 점은 사실이지만 오랫동안 지나치게 혹평을 받아왔다.

조지 엘리엇의 다음 두 장편은 선거법 개정시기를 전후해 소란스러웠던 영국을 무대로 하고 있다.

〈급진주의자 펠릭스 홀트 Felix Holt, the Radical〉(3권, 1866)는 1832년 12월 그녀가 너니턴에서 목격한 선거폭동에서 소재를 얻은 것이다. 작품을 집필한 첫번째 동기는 정치적인 것이 주제가 아니라 트란솜 부인의 비극적인 성격묘사에 중점을 둔 것이며 그녀는 엘리엇이 창조한 가장 훌륭한 인물의 하나였다. 당시 소설에서 인기를 끌기 위해 필요했던 복잡한 플롯이 오늘날에는 오히려 작품의 인기를 깎아내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미들마치〉(8부, 1871~72)는 일반적으로 그녀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손에 의해 소설은 단순한 오락물에서 고도로 지적인 예술품으로 발전되었다. 이 작품에는 지주·목사로부터 제조업자·전문인·상점주인·선술집주인·농부·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미들마치 지방의 각 계층이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대조와 병행의 수법에 의해 몇몇 플롯이 작품 속에 서로 보완·강화되도록 짜넣었다. 하지만 작품의 가치는 긴밀하게 짜여진 줄거리보다 '눈에 띄지 않는 생활을 충실히 살고 인적 없는 무덤에서 편히 쉬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행위가 지닌 대단히 광범위한 효과를 보여주는 데 있다.

그녀가 당대의 생활현장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다니엘 데론다〉(8부, 1876)는 가난한 유대인 소녀 미라 코헨과 돈 때문에 결혼한 뒤 후회하는 상류계급 출신의 그웬돌렌 할레스를 대비하고 있다.

자신이 유대인임을 확실히 깨닫지 못했던 주인공 다니엘이 자기의 처지를 발견하고 미라와 결혼한 후 자기만족을 위해 가정을 이루려고 팔레스타인으로 떠난다. 코헨가(家)에 대한 뛰어난 묘사는 유대인 독자들로부터 감사에 넘치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가장 잘된 부분은 그웬돌렌의 날카로운 성격분석에 있으며, 많은 평론가들은 그 부분이 그녀가 이룩한 업적의 최고봉이라고 평한다.

1863년 루이스 부부는 리전트 공원의 노스뱅크 21번지 프라이어리 저택을 구입했으며 일요일 오후마다 그곳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찬란한 지적 광채가 빛났다.

그 집에서 루이스는 15년 후인 1878년 11월 30일에 죽었다. 그는 약 25년간 그녀의 천재성을 길러주고 일상생활의 세밀한 문제를 모두 처리해왔는데 이제는 그 모든 일을 그녀가 떠맡아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가 괴로워한 것은 작가생활을 지탱해준 정신적 '격려'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몇 개월 동안 그녀는 아들 찰스 리 루이스 이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사이에 그녀는 남편이 끝내지 못한 〈생명과 정신의 문제 Problems of Life and Mind〉(1873~79)의 마지막 권을 완성하려고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는 또 케임브리지대학교 생리학과에 조지 헨리 루이스 장학금을 창설했다.

수년간 그녀의 수입에 관한 관리와 투자는 존 월터 크로스(1840~1924)가 맡아서 처리했는데, 그는 이전에 허버트 스펜서가 루이스 부부에게 소개한 은행가였다. 크로스의 어머니도 루이스가 죽은 지 1주일 뒤 죽었다. 동정에 끌렸고, 또 크로스의 여러 가지 충고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녀는 점차 애정에 있어서도 그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1880년 5월 6일 하노버 광장 세인트조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크로스는 40세였고 에번스는 61세였다. 이탈리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위트레이의 시골집으로 돌아온 뒤 이 부부는 첼시의 체인워크 4번지로 이사했다. 그해 12월 그녀는 그곳에서 죽어,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