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

보수주의

다른 표기 언어 conservatism , 保守主義

요약 정치사상의 역사를 살펴보면 보수주의적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학설과 이념들이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보수주의가 진정한 의미의 사조 및 운동으로서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해서였다.
'보수주의'라는 용어는 샤토브리앙 자작 프랑수아 르네를 비롯한 부르봉 왕정복고주의자들이 1815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며, 1830년에는 <쿼털리 리뷰>의 편집을 담당하던 영국의 존 윌슨 크로커가 토리 당을 지칭하면서 이 말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밖에도 1830년대에 미국에서는 다수 독재의 횡포에 맞서 남부 소수세력의 권익을 옹호했던 존 컬훈이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하기도 했으나 근대적이고 체계를 갖춘 보수주의 이념의 기초가 된 것은 영국의 의회주의자이며 정치사상가인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론>(1790)임에 틀림없다.

목차

접기
  1. 보수적인 태도
  2. 버크주의의 토대
  3. 콜리지와 워즈워스
  4. 메스트르와 중유럽
  5. 메테르니히와 유럽협조체제
  6. 20세기의 보수주의

정치사상의 역사를 살펴보면 보수주의적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학설·이념들이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보수주의가 진정한 의미의 사조 및 운동으로서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해서였다(→ 유럽). '보수주의'라는 용어는 샤토브리앙 자작 프랑수아 르네를 비롯한 부르봉 왕정복고주의자들이 1815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며, 1830년에는 〈쿼털리 리뷰 The Quarterly Review〉의 편집을 담당하던 영국의 존 윌슨 크로커가 토리 당을 지칭하면서 이 말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

그밖에도 1830년대에 미국에서는 다수 독재의 횡포에 맞서 남부 소수세력의 권익을 옹호했던 존 컬훈이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하기도 했으나 근대적이고 체계를 갖춘 보수주의 이념의 기초가 된 것은 영국의 의회주의자이며 정치사상가인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론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1790)임에 틀림없다(사실 그는 한 번도 '보수주의'라는 용어를 구사한 적이 없음)(→ 버크).

버크와 같은 반혁명 의회중심주의자들은 대혁명의 과격하고 혁신적인 방법론이 인간해방의 이상을 희석·타락시키고 있음을 지적했으며, 정치평론가이자 외교관인 조제프 드 메스트르 등의 보다 권위지향적인 보수주의 진영에서는 혁명의 이념 그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대혁명의 과정을 지켜보는 유럽인들의 보편적인 반감은 보수주의 정치가들에게 과거 전통을 회복할 수 있는 호기를 제공했고, 이에 따라 보수주의 정치철학은 갑작스런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보수적인 태도

급진주의와 혁명에 반대하는 버크의 입장은 자유주의 진영에 심도있는 영향을 미치기도 했으므로 외형적인 측면에서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를 가려내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지만, 보수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자유주의와는 명백히 대치되는 하나의 전제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의식적·직설적이든 무의식적·암묵적이든 보수주의자들은 정치의 장에 '그리스도교의 원죄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인간은 애당초 자유롭지도 선하지도 못하며 오히려 무질서와 사악함, 상호파멸로 나아가기가 쉬운 존재이다. 18세기의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인간의 선한 본성을 얽어매는 사슬'이라고 단정했던 것(자아에 대한 사회적 제약으로서의 인습)은 버크 등에 있어서는 인간을 선으로 이끄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루소). 전통과 인습의 사슬은 개개의 인간을 뿌리깊고 영속적인 사회구조 속에 순응시키며 이러한 질서와 체제 속에서가 아니면 윤리적인 행동이나 책임있는 자유와 권리의 행사는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만다.

보수적인 성향은 보수주의적인 정책노선이나 우파 경제학과 일치할 수도 있으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사실 그것은 좌파 정치 및 경제 노선을 수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보수주의적인 정치와 경제가 무엇이든간에 보수적인 성향은 다음과 같은 2가지 특질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인간본성과 뿌리없음, 시험을 거치지 않은 혁신에 대한 불신이며, 다른 하나는 이로부터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지만 중단없는 역사와 역사 속의 진화과정, 그리고 인간사를 이끌어가는 기본틀로서의 전통사회체제에 대한 신뢰감이다. 뿌리깊은 사회체제란 문화적·종교적일 수 있지만 반면에 추상적·실제적으로 표현된 바가 전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후자의 측면과 관련하여 많은 보수주의 정치가들은(프랑스에서는 소수이고 영국에서는 다수파임) 보수주의를 어떤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언어표현을 초월한 하나의 정신상태로 파악하고 있다.

자유주의가 열띤 논쟁을 필요로 하는 반면에 보수주의는 단순히 존재할 뿐이다. 보수주의가 이데올로기화하고 논리가 부여되며, 의식적인 사상운동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곧바로 그 자신이 경멸해온 자유주의적 합리주의를 닮아가게 된다. 이러한 영국적인 접근방식에 따르자면 연역논리에 의한 추론방식이란 지나치게 공론적일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18세기적인 것이다. 자유주의적·합리주의적 정신이 관념화된 청사진을 의식적으로 모색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보수주의의 이성은 무의식의 저변에서 구체적인 전통과 관례들을 형상화시켜나간다.

미래를 주장하기보다는 실질의 구현에 초점이 맞추어진 본질로 말미암아 보수주의는 그 최고의 통찰력에 이르러서도 자유주의나 급진주의만큼의 이론화 작업을 진행시킨 적이 없다.

보수주의는 전통적인 기존 종교와 상호연관을 맺기도 한다(종교철학). 1789년 이후 종교계의 호소는 혼돈의 시기에 평화와 안정을 희구하는 유럽인들의 열망을 배가시켰다. 특히 그 기원을 군주제적인 중세기에 두고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는 다른 어느 종교보다도 보수주의의 이성에 호소하는 바가 컸다.

국교회의 신봉자였던 에드먼드 버크 역시 급진주의의 세력확장을 저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벽으로서 가톨릭 교회의 역할을 칭송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의 주류를 형성했던 세력은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이었으며 동시에 강력한 반교권주의자들이었다.

사회공동체를 하나의 유기적인 조직체로 조명하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자유주의자들의 합리적인 청사진을, 심원한 전통에 기반을 둔 사회공동체가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으로 진화해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순수이성에 근거하여 무책임하게 공동체의 장래 모습을 재단해내는 성급한 기도라고 힐난한다.

그들은 자유주의적 공동체를 분열된 잡다한 요소들이 단지 기계적으로 결합되어 있을 뿐인 원자화된 사회로 받아들이고 있다. 공동체사회는 종교와 이상주의, 공통의 역사적 체험, 오랜 기간을 두고 기능을 발휘해온 정치제도에 대한 믿음, 경애·상호협력·성실 등의 정서에 바탕을 둔 것이라야 하며, 유물사관, 계급투쟁, 과도한 자유방임경제, 탐욕스런 부당이익의 추구, 지나치게 분석적인 인간지성, 함께 공유하는 사회제도에 대한 저항감, 의무보다 앞선 권리의 주장, 회의와 냉소의 기질 등은 인간공동체의 원자화를 가속시킬 따름이다.

독일의 낭만주의 학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유기적 통일성이라는 사회공동체의 관념을 사회는 전부이고 개인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식의 극단론에까지 몰고가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러한 국면이 더이상 보수주의라고는 할 수 없는 전체주의 국가이론에 불과함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크주의의 토대

에드먼드 버크(1729~97)는 18세기말 유럽의 지적 토양을 구체제에 대한 계몽주의적인 경멸로부터 전통과 인습에 대한 존중으로 변천시킨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였다.

아일랜드 출신이었던 그는 관조자의 열정을 가지고 잉글랜드와 국교회, 그리고 그 귀족주의적인 전통을 사랑했다. 1765년 버크는 휘그 당 중도파의 핵심인 로킹엄 후작 2세 찰스 윗슨 웬트워스의 개인비서가 되었으며 조지 3세의 급진적인 무단통치에 대항, 전통적인 자유권의 실현을 주장하면서 미국독립전쟁(1776)을 옹호했으나 얼마 뒤 프랑스에서 혁명이 촉발되었을 때는 이를 어리석은 군중과 전통을 파괴하는 무책임한 이론가들의 폭거로서 규정지었다.

1790년 대혁명이 아직 무혈의 유토피아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때 버크는 우연에 의한 짐작으로서가 아니라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가치들을 도외시하는 혁명기운을 분석함으로써 곧이어 다가올 테러리즘과 자코뱅주의 독재를 정확하게 예측해냈다. 실로 버크의 사상과 그가 소중히 여겼던 보수주의는 뿌리없음에 대한 공포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에게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Social Contrat〉(1762)은 단순히 현재인의 계약을 문제로 삼아 현재인의 상호 이해에 따라 국가통치체계를 변모시키려는 구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사회계약). 버크의 목소리는 이러하다.

"사회는 실로 그 구성원들 사이의 계약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협력관계의 목표는 단시일 내에 달성되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그 공조관계라는 것도 현재인의 계약관계일 뿐 아니라 우리의 조상들과 장래에 태어날 후손들이 소유하는 계약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떠도는 일시적인 기분에 의거하여 사회구조에 변혁을 가하려 한다면 세대와 세대 사이를 이어주는 역사의 연결고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인간은 한여름의 파리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다."

과거 역사에 대한 버크의 집착은 "죽은 세대의 해묵은 유산이 산 자의 두뇌를 악몽으로 짓누르고 있다"는 카를 마르크스의 합리주의적 적개심과 좋은 대조를 보이기도 하지만 에드먼드 버크에게 사회계약이란 과거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미래의 약속이기도 한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진화적인 속성에 충실한 한에 있어서 개선의 가치를 받아들였다(마르크스). 그는 과거의 경험을 보존할 줄 아는 인성과 현실의 악폐를 교정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한 인물만이 바람직한 정치가가 될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버크는 추상화된 보수주의의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례, 즉 영국의 불문헌법을 옹호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한결같은 일관성을 지닌 것만은 아니었는데, 예를 들면 자연권(천부인권)에 기초하여 헌법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와 동시에 이른바 '규범권'에 근거하여 불문헌법을 정당화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자연법이 기지(氣智)의 헌법 외부에 존재하는 만물의 원리인 데 비하여 규범적인 법규는 오랜 역사와의 연계성을 통해 권위를 갖추게 된 국부적인 법령이며, 경험과 전통으로 말미암아 1차적인 가치를 부여받고 있는 법규이다.

때때로 버크는 자연법이 헌법 이전에 존재하여 역사와 호흡을 같이하는 헌법에 숨은 지혜를 전해준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자연법과 천부인권사상을 통하여 새로운 혁명정부를 정당화하려는 프랑스 합리주의자들과의 논쟁 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상투적인 변론으로서의 보수주의적인 신념을 토로하고 있다.

"우리의 헌법은 규범적인 의미의 헌법이며 이 헌법이 의지하고 있는 최대의 권위는 그것이 헤아릴 수도 없이 아득한 과거로부터 존재해왔다는 데 있다.

보다 보편적이고 보다 우선적이라고 하는 어떠한 준거도 헌법이 갖는 연륜과 경험의 권위를 전도시키지 못한다."

버크는 미망(迷妄)과 편견의 사회적인 필요성을 거리낌없이 내세움으로써 동시대인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18세기의 구태의연한 그리스도교 지성인들만큼 냉소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 생래적으로 원죄에 물들어 있고 타락하기 쉬우며 스스로를 개선시키기에는 너무나도 박약한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점에서 구시대 그리스도교도의 한 사람이었으며, 인간이 교화되기 위해서는 가족·종교·귀족정치와 같은 사회적 편견들 속에서 교육을 받고 윤리적으로 잘 단련된 엘리트들을 본보기로 따라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버크는 토지귀족들이 시기적절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실천하고 권한의 남용없이 불문헌법의 내용을 준수한다면 언제까지나 '강인한 참나무'와 같은 바람직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았으며, 국교회에 대해서도 총체적인 인간상식을 구현하는 시민윤리의 보루로서 그 종교적·정치적 기능에 깊은 찬사를 보냈다.

콜리지와 워즈워스

영국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와 윌리엄 워즈워스는 버크 이후 보수주의 정서의 형상화에 기여한 비중있는 인물들로 손꼽히고 있지만 애초에는 1789년의 대혁명을 열렬히 찬미했던 이상적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새벽이 밝아온다는 것, 다시 새로워진다는 것은 우리에게 더없는 기쁨이어라!" 이것은 유럽의 모든 지성을 대신하여 계관시인 워즈워스가 쏟아놓은 환희의 언어들이지만 해너머의 사태진전은 프랑스의 여명을 향한 유럽의 부푼 기대감을 여지없이 부수어놓고 말았으며, 자유주의와 합리주의의 미몽으로부터 깨어난 두 사람은 군주제의 전통과 영국 국교회라고 하는 자신들의 터전으로 발길을 되돌리게 된다.

1788년 워즈워스와 콜리지는 시집 〈서정민요집 Lyrical Ballads〉을 공동출간, 18세기의 추상적 합리주의에 대한 인간 감성의 반란을 공표했으며, 이로써 새로운 차원의 사상경향을 도출해내는 공적을 남겼다.

〈평신도의 설교 Lay Sermons〉(1816~17)·〈일대기 Biographia Literaria〉(1817)·〈철학강의 Philosophical Lectures〉(1818~19)·〈인격의 형성, 분별력·도덕성·종교 Aids to Reflection in the Formation of a Manly Character, on the Several Grounds of Prudence, Morality, and Religion〉(1825), 그리고 몇 편의 〈서간집 Letters〉·〈한담선 閑談選 Specimens of Table Talk〉을 통하여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보수주의 이념과 정서의 대변자로서 오랜 기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대학에서의 그의 강연 활동은 훗날 영국 정계의 지도자로 떠오르게 되는 젊은 인재들의 가슴속에 잊혀지지 않는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콜리지에 따르면 사회공동체는 독자적인 계급구조를 통하여 자신의 여러 기능들을 분배한다.

각 계급은 나름대로의 가치로운 역할을 행사하게 되지만 이것이 곧 사회 내의 모든 계급에 투표권(참정권)이나 통치권을 분리, 위임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참정권은 엄격한 의회규칙 속에서 기능하는 덕성과 교양을 갖춘 귀족계급이 담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모든 계층은 헌법과 국가체계의 유기적 통일성 안에서 상호협력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콜리지의 이념은 뒤에 보수당 총리에 오르게 되는 벤저민 디즈레일리를 통하여 발현됨으로써 실질 정치의 장에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훨씬 뒤에는 윈스턴 처칠 경이 디즈레일리의 사도로서 전통 보수주의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디즈레일리, 처칠).

새뮤얼 콜리지는 기업가를 보수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회공동체의 반도 정도로 간주했다.

기업인들은 '이윤'이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를 파급시킴으로써 그리스도교 군주국의 기반을 갉아먹는다. 소매상인들을 가장 비애국적이고 비보수적인 계층으로 규정했던 콜리지는 '장사꾼'을 영국 최고의 정치세력으로 등장시키게 될 휘그 당의 선거법 개정안(1832)을 적극 반대했다.

메스트르와 중유럽

보수주의 에드먼드 버크에 의하여 주도된 온건한 영국의 보수주의만을 소개하고 조제프 드 메스트르(1753~1821)가 시조가 된 중유럽 보수주의를 빠뜨린다면 보수주의 사상의 전체 조감도는 균형을 잃고 말 것이다.

버크의 보수주의가 역사를 통한 진화를 옹호했던 반면, 메스트르의 극단 보수주의는 경험을 토대로 한 진화와 개선을 거부했다. 두 사람 모두 1789년의 혁신노선에 대항하여 전통과 관습을 고수하려 했지만 수호하려는 전통은 각각 명백히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곧 전자가 천부적인 인간의 자유를 위하여 대혁명의 이념구도를 공박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후자는 전통적인 권위에 시각을 맞추어 프랑스의 혁명을 참담한 문명파괴의 폭거로 단정지었다(권위주의). 메스트르의 추종세력은 버크주의자들의 입헌주의 내지 의회중심주의와 동떨어진 전통 엘리트의 권위에 초점을 두고 있었으며 사실상 이러한 태도는 보수주의의 한계를 넘어서 반동적인 망상으로 매도될 만한 것이었다(반동적 운동). 하지만 우리가 라틴 보수주의를 전체주의의 단편으로 규정할 때, 그것은 지나친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려운데 그들이 강조하는 전통의 권위가 개인의 인성이나 문화의 영역에까지 확장된 것이 아니라 다만 종교와 정치 문제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와 전체주의의 상이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가장 반동적인 보수주의자들조차도 전체주의 나치당원이나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분리해낼 수 있게 된다.

프랑스 혁명이 좌절된 후 조제프 드 메스트르는 당대에 가장 설득력 있는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대변자가 되었다. 자유·평등·박애의 혁명이념을 대신하여 그는 거의 혼자 힘으로 '왕좌와 제단으로'라는 보수주의 슬로건을 구체화한 것으로 보인다.

메스트르는 세습군주제의 복원을 기도했으나 그것은 구체제와는 다른, 보다 종교적이고 덜 경망스러운 색채를 띠었다. 혁명과정에서 프랑스군이 사보이(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피에몬테사르데냐의 프랑스어권 지역)를 침공하자 망명생활을 시작했으며, 향후 14년 동안 모스크바 주재 사르데냐 대사를 지내면서 차르 절대군주제의 영향을 받으며 왕정복고주의자로서의 신념을 굳혀갔다.

복고적이든 진화적이든 간에 모든 보수주의자들은 공동체의 분열을 막고 유기체적 통일성을 담보하는 군주정치의 기능을 인정하고 있지만, 메스트르주의자들이 가치의 측면에서 군주제를 절대화한 것과는 달리 영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그 실질적 필요, 즉 효용성을 높이 평가했다.

메스트르와 대륙의 보수주의자들은 군주제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천상의 신이나 지상의 국왕이 설령 잘못되었다고 하여도 인간은 그들을 마음속 깊이 사랑해야만 한다"는 극단적인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리게 된다.

"우리는 주권자가 법규로서 통치하는 지역범위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통치자의 법은 다소 가혹하고 부당하게 여겨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영역에서 빠져나와야 할 것인가? 그러나 그런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영역은 이곳 말고도 도처에 마련되어 있으므로……우리의 가정이, 주인이 존재하고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에 순명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주인의 본성이 어떠하든 간에 그를 저버리는 것보다 사랑으로 섬기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권위주의에 입각한 일련의 추론과정은 "만유의 주인이 가혹하면 가혹할수록 어린양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져야만 한다"는 역설적인 논리의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복고주의자의 주장이 잔인하기 짝이 없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온화한 성품의 메스트르가 가졌던 동기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이었다. 잔혹한 권위에 대한 반항은 더욱더 잔혹한 고통을 몰고 올 것이다. 메스트르는 프랑스의 혁명으로부터 당장 먹기에는 쓴 약으로 느껴지지만 전통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유럽을 보다 심각한 혼란으로부터 구제하는 처방전이라는 교훈을 얻어내게 되었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의 정치관은 질서를 천사로, 혼돈을 악마로, 혁명을 원죄로 대치시킨 한편의 신학적 드라마였다.

루소의 계약 관념에 현혹된 경박하고 미숙한 사람들이 민주주의나 상스러운 나폴레옹식의 독재체제를 열망하지만 결국 죄의 대가에 합당한 끔찍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죄를 범한 유럽에는 고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1810). 일련의 수난을 통하여 유럽은 가부장적인 그리스도교 왕국이야말로 가장 순도 높은 질서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심지어 군주들조차도 질서라는 배를 자유주의적 혁신으로 동요시키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유럽은 '개혁'이라는 말을 들먹이는 세력을 충분히 의심해야만 한다. 〈교황에 관하여 Du Pape〉(1817)에서 메스트르의 공동체 질서관은 심도를 더해간다. 계층구조적 피라미드의 질서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정점을 요구하고 있다. 이 정점에 놓여야 할 것은 잡다하게 많은 세속 군주들이 아니라 로마 교황의 신성한 권위 속에서 결합을 이룬 세속적·영적 권력이다.

혁명 이후의 사회혼란은 혁명이념의 지지자들마저도 당혹시킬 정도의 심각성을 보여주었으며 이에 따라 사회안정을 위한 현실적인 대책이 시급하게 요구되고 있었다.

메스트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만찬담화 Soirées de Saint-Petersbourg〉(1821, 미완성)에서 보다 확고한 신앙과 강력한 치안력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교황과 법규집행인'이라는 자신의 잘 알려진 공식을 다른 언어수단으로 집약시킨 것이었다. 그에게 신앙을 베푸는 교황은 공동질서의 긍정적인 보루임이 분명했으며 소요를 진압하는 집행관은 부정적인 보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스스로가 지식인이었던 메스트르는 사회 내 인텔리겐치아를 모반적이고 오만무례한 무질서의 선동가로 규정지었다.

세속 안에서 교권주의를 칭송했지만 조제프 드 메스트르는 중세교회의 교부들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경멸했던 합리주의자에 더 가까웠다. 메스트르는 영적인 통찰력이나 맹목적인 전통의 수긍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성을 연역논리의 단계에 따라 독자적이고 합리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부조리와 창조주의 권위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 자신은 결코 인정한 적이 없지만 우리는 조제프 드 메스트르를 볼테르적 계몽주의의 최후의 관념론자로서 특징지을 수도 있다. 볼테르 이상으로 혹은 자코뱅주의자들과 비견될 정도로 메스트르는 순수하고 선험적인 절대이성을 신봉하고 있었으며, 18세기의 파괴적인 연역논리는 마침내 메스트르에 이르러 자기부정의 종착역에 다다르게 된다. 순수이성은 선험적인 권위와 질서를 확인함으로써 바야흐로 자멸의 길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보수주의의 이념을 이와 같이 버크와 메스트르를 기준으로 대별할 수 있다고 해서 양자의 중요성이나 영향력이 동등한 위상을 점하고 있다는 설명은 아니다.

사실 조제프 드 메스트르나 반자코뱅주의 저작들은 결코 에드먼드 버크의 고전이 가지고 있는 위력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의 혁명에 대한 반론을 공식화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그의 논리는 복고주의 세력을 포함한 전반적인 보수주의자들에게 오랜 기간 동안 심지어 문자 그대로 차용되어졌다. 메스트르의 경직된 위계적 보수질서가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빛이 바래기 시작한 반면 버크의 보다 융통성 있는 보수주의 이념은 서유럽 제 정당들의 행태에 깊숙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특히 영국과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운동에서 '점진주의 필연성'이라는 페이비언주의자들의 언명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 이후 프랑스 보수주의는 〈악시옹 프랑세즈 L'Action Francaise〉의 편집주간으로서 전체주의적 색채가 농후했고 결국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샤를 모라스로부터 〈미국 민주주의론 Democracy in America〉의 저자로서 가장 버크적인 입장에서 대혁명과 인민투표적 대중민주주의를 비판했던 알렉시스 드 토크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모라스토크빌 사이에는 반자코뱅주의의 대부 이폴리트 아돌프 과 민족주의에 근사하지만 유기체적 근원을 강조했던 소설가 모리스 바레스가 있고, 1843년 이후 〈종교계 L'Univers Reglieux〉의 편집을 담당했고 근대 산업사회의 문제들에 메스트르의 권위적 질서를 적용했던 교권주의자·복고주의자인 루이 프랑수아 뵈이요가 있다(, 바레스). 메스트르와 뵈이요보다 교권주의 성향이 약하지만 대표적인 극우주의자로서 국가체제를 강조했던 모리스 드 보날드는 나폴레옹의 제국과 부르봉 가의 왕정복고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한 인물이었다.

메테르니히와 유럽협조체제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Lothar von Metternich)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Lothar von Metternich)

혁명, 나폴레옹 시대, 그 이후로 이어진 엄청난 사회동요 및 헌법과 자유주의적 개혁 요구에 직면한, 정부의 무능이 불러일으킨 문제는 보수주의 이론가의 저작보다 더 즉각적이고 광범위한 결과를 낳았다.

1815~48년에 오스트리아와 유럽에 큰 영향을 미친 메테르니히 공(公)은 자신이 다스리는 다민족 제국을 보호하기 위해 유럽 전체에서 반(反)혁명의 국제적 동맹고리를 엮는 데 몸바쳤다(유럽의 협조). 메테르니히는 1820년대와 1830년대에 이탈리아·스페인·독일에서 일어난 자유혁명을 비역사적·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았다.

자유주의자들은 유럽 대륙에서는 역사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영국의 자유제도들을 이식하려 했다. 그는 옛 근원과 질서 있는 유기적 발전의 필요성이라는 버크의 논증을 통해 자유주의자들을 반박했다. 그래서 그는 나폴리와 그밖의 지역에서 일어난 자유혁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빈정대며 논평했다.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말은 단검이다.

이것은 헌정 원칙을 위해 좋은 재료이다…… 영국 헌법은 시대의 산물이다…… 헌법에는 보편적인 비결이 없다."

메테르니히는 기본적 자유를 여지없이 침해한 억압적인 '카를스바트 칙령'(1819)을 선포했지만 그의 태도가 항상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1848년 몰락하기 직전 그는 진지하고 사려 깊고 실제적인 자신의 계획(이 계획은 반동적인 황제 프란츠 1세에 의해 너무나 오랫동안 시행이 연기되어 있었음)을 대공들이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빈에서 하나의 대표기구를 결성하기 위해 모든 공국으로부터 대표를 소집했다.

그는 나폴레옹 전쟁 뒤에 열린 국제적인 평화회담인 빈 회의(1815)를 주도했다. 빈 평화회의는 분리주의자의 위기 동안 통일 오스트리아 대표가 공유했던 보수주의 원칙을 토대로 삼았다. 사법제도에 대항해 일어난 셰이스 반란(1786)의 맥락에서 그들은 폭도에 의한 정부로부터 법률에 의한 정부를 구해냈고, 다수의 독재에 대항해 소수의 권리를 확립시켰다.

그들은 민주적 유토피아와 대중에 대한 모호한 웅변술이 아니라 역사적 뿌리, 규범적 권리, 법적 판례라는 버크적 원리 위에 미국의 자유를 자리매김했다(미국독립전쟁). 사상면에서는 비슷하지만 더 풍부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애덤스의 저서 〈변호 Defence〉는 자치에 관한 가장 통찰력 있는 저서의 하나로 꼽힌다.

미국 헌법은 1787년 미국 제헌의회에 의해 필라델피아에서 채택되었다.

자유민주주의자의 목표는 손쉬운 개정, 대중의 편의로운 압력과 빠른 변화, 억제받지 않는 인민의 주권, 남성의 보통선거권, 단원제 의회기구, 오랫동안의 보편적인 선험적 추상에 입각한 자유 등 버크가 '프랑스 인권과 시민권 선언'에 대해 비판한 것과 같은 내용이었다. 그러나 1787년 헌법에서 연방파는 이 목표를 하나하나 저지시켰다. 그들은 느리고 어렵게 개정안을 만들었고, 재산권의 한계로 투표권자의 수를 감소시켰으며 의회를 양원제화했고, 전적으로가 아니라 주로 영국 전통이 물려준 구체적인 선례에 자유의 근거를 두었다.

하원(민주주의자에 대한 뇌물)을 제외하고 정부의 주된 기관인 대통령·상원·사법부는 국민의 직접선택이 아니라 각각 선거인단·주의회·임명에 의해 구성되었고, 191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개정안이 통과되어 의도적으로 비민주적인 상원의원 선거가 사라졌다. 사법부(대법원)는 민주적 다수에게 책임지지 않는 비선거적이고 면직되지 않는 엘리트에 의해 계속 유지되어왔다. 그러나 사법부는 선거에 의해 뽑히고 면직될 수 있는 상·하원의 민주적 다수가 통과시킨 위헌적 의안을 거부할 수 있다.

미국의 건국시조들은 "생명·자유·행복추구"라는 식의 매우 추상적으로 표현된 초기 독립선언(토머스 제퍼슨이 기초함)의 민주주의 유토피아적 웅변술과 당시 폭도들의 난폭함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수적 헌법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 헌법은 반동적인 보수주의가 아니라 버크적인 보수주의였다.

그러므로 이 헌법은 자유주의 목표를 좌절시켰을 뿐 아니라 세습적 귀족정치와 대통령에게 평생 동안 절대적 거부권을 부여하는 해밀턴의 생각과 같은 보다 극단적인 보수주의 목표도 좌절시켰다.

미국 유일의 일관된 보수적 정당은 존 애덤스와 알렉산더 해밀턴이 이끈 연방파였다. 해밀턴은 지나칠 정도로 무모한 상업투기꾼이었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나 기타의 다른 주의자로 분류할 수 없지만, 애덤스는 신대륙에서 가장 버크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1800년대 초기에 연방파가 소멸한 뒤 2개의 상호 적대적인 정치적 보수주의가 나왔다. 하나는 뉴잉글랜드 도시 출신의 고고한 지식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남부의 반(半)연방 토지소유자들이다. 남부의 반연방 토지소유자들의 정치적 보수주의를 가장 설득적으로 옹호한 것은 신대륙에서 가장 메스트르적인 인물로 꼽히는 컬훈의 유명한 저서 〈정부에 대한 논설, 미국 헌법과 미국 정부에 대한 담화 A Disquisition on Government and Discourse on the Constitution and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이다.

보다 극단적이며 매우 지역적인 컬훈의 보수주의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노선에 영향을 미치면서 지금도 미국 남부지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으며, 뉴잉글랜드 보수주의와는 상반되는 것으로 남아 있다. 어떤 교의에 의해서보다는 지역적 후원집단의 실용적인 동맹으로 이루어진 현대 미국의 정당들을 현실적으로 어떤 '주의'라는 이름으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미국의 정당들은 헌법의 제한된 원칙을 간접적으로 확산시키면서(모든 정당 노선에 영향을 미치면서) 보수주의를 추구하는 것 같다.

20세기의 보수주의

19세기와 20세기, 즉 18세기 계몽주의 이후의 시기에는 정치철학과 보수적 이익에 합치되는 특정 정당의 강령이라는 2가지 점에서 모두 보수주의에 대한 정반대의 길로 나아갔다.

버크의 의식적으로 명백한 보수주의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작용으로 형성되었고, 메테르니히 시대(1809~48)에 유럽의 국제관계를 지배했던 반자유주의적·반혁명적 정책은 자유주의적 개혁과 자유주의적 헌법에 대한 요구가 불러일으킨 정치적 불만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사실상 계몽주의는 특정 태도와 이념을 보급시켰고 이 태도와 이념은 이후의 세기 동안 광범위한 정치적 결과를 낳았다. 이런 태도와 이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조건의 개선 가능성에 대한 믿음, 즉 '합리주의'로 특징지울 수 있는 경향에 대한 믿음이다. 이러한 합리주의 정치는 자유주의적 개혁주의, 서구 유럽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복지국가 사회주의나 혼합경제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등 정치 스펙트럼의 광범위한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그러므로 합리주의 정치의 깃발 아래 이루어져온 변화들은 막대한 것이며, 동시에 근대 보수주의의 딜레마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합리주의의 계속된 혁신에 직면하여 보수주의자는 단순히 방어적인 역할만 해야 하는 듯하며, 그래서 정치를 선도하는 것은 언제나 다른 주의자들이다. 이러한 곤경에 직면해 보수주의자는 서로 다른 정치적 맥락 속에서 매우 다양하게 반응해왔다. 그러나 현대정치에서의 보수주의의 역할에 대한 분석은 단순히 보수적인 명분을 내세우는 정당들의 정책에 대한 설명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보수주의는 정당의 강령에 나타난 것보다는 덜 직접적인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20세기의 보수주의는 합리주의 정치가 지배하는 의회민주주의 체제와 덜 자유주의적인 정치풍토 속에 스며들어 있다.

보수주의의 영향력은 정당정책을 통해서보다는 주로 인간이 끊임없는 개혁가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인간의 기질 속에는 선천적·본능적으로 보수성도 많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간접적으로 형성된다. 그러한 보수성으로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두려워하고 이를 피하려는 경향, 관습에 따라 행동하려는 경향 등이 있다.

이런 경향들은 개인적인 기질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강요된 정치변화에 저항함으로써, 그리고 특정 문화의 형성과 안정화에 이바지하는 전체 가치선호 속에서 집합적인 표현방식을 찾는다. 문화형태나 정치제도 속에서 가치선호를 표현하려는 경향(예를 들면 불문헌법 속에서의 영국 실용주의)은 정당이 책임지는 특정 보수적 이익의 명백한 표명을 바탕으로 정치생활 속에서 심오한 보수적 이익을 구축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랜 사회적·정치적 진화과정의 산물이면서 종교·소유 관계 등 다른 문화적 요인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관행과 제도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정치혁신에 대한 문화적 억제요소의 존재는 모든 사회에서 근본적인 보수주의 편견을 구성한다. 이런 보수주의 편견의 의미는 영국의 비평가 F. J. C.헌소의 다음과 같은 말에 경구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보수주의자들이 그저 앉아서 생각하는 것으로, 심지어 그들이 단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충분하다." 그러나 계속적인 기술발전으로 인한 사회 변화와 합리주의 교리가 지배하는 시대에서 단순한 타성으로는 보수주의 가치를 충분히 지켜나갈 수 없다.

보수적 반응은 특정 정치적 맥락에서 가장 잘 분석된다.

역사가들은 20세기에 거론할 가치가 있는 정당으로서 영국의 보수당, 이탈리아의 기독교민주당, 독일의 기독교민주당, 일본의 자유민주당이라는 4개 정당을 지적하고 있다. 다음에서는 이 정당들을 포함하여 영국·서유럽·일본·미국 등의 보수주의 경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영국에서는 디즈레일리 후임으로 솔즈베리 경이 1885년에 총리가 되어 1886~92년과 1895~1902년에 재직했다.

솔즈베리를 뒤이은 아서 밸푸어는 1902~05년에 총리를 지냈다. 이처럼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보수당 지배시대는 제국주의, 고율의 관세, 보수당의 노동계급 표에 대한 점진적 잠식(디즈레일리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1867년 노동자의 선거권을 확대함으로써 이런 상황을 조장했음)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래서 보수당은 원래의 계급기반(토지귀족과 국교회)을 확대했고 새로운 상업계급과 이들이 이끄는 자유당을 앞지를 수 있었다.

디즈레일리 시대 이후 영국의 보수주의는 야당인 자유당(나중에는 노동당)이 도입한 변화를 대부분 받아들이는 소극적인 보수주의와, 특히 19세기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서 물려받은 자유당의 정책을 지나치게 무시하거나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환경을 조성하는 데 목표를 두었던 보다 적극적인 보수주의가 번갈아가면서 우세했다. 강력한 사회적 양심을 풍기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적극적 보수주의는 디즈레일리에 의해 최초로 형성되었는데, 그는 무제한의 자본주의 상태에서 노동계급이 겪은 가혹한 상태를 완화하려는 바람과 군주제·교회·계급체계 등 기존 제도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결합했다.

영국이 '온건하고 중재적인' 세력으로서 건설적으로 행동할 필요성과 제국 속에서 이익을 유지할 필요성을 강조한 디즈레일리의 외교정책 역시 보수주의가 단지 사건에 대해 반응하기보다는 사건을 형성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20세기에 영국의 보수주의가 호소한 3가지 주제는 ① 개인의 주도와 악습의 시기적절한 개혁에 의한 물질적 조건의 개선, ② 전통적 제도가 가진 가치에 대한 강조, ③ 적극적인 외교정책의 필요성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후의 보수주의 사상가들은 성격과 태도의 발산가치, 개성 표현으로서의 재산의 역할, 개인이 발전할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을 제공해주는 가족의 핵심적 역할 등에 관해 더욱 정교한 견해를 펼쳤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의 보다 소극적인 시기에 영국의 보수주의는 계급특권과 현상유지의 옹호, 사회주의에 대한 비건설적인 반대, 그리고 증가하는 나치의 위협에 대한 거래상인의 접근(1930년대)으로 특징지워진다. 그러나 1945년 이후 노동당이 도입한 혼합경제와 복지국가의 확대에 직면하여 1951년에 다시 권력을 잡은 보수당은 전임 노동당의 사회주의적 혁신을 거의 버리지 않고 오히려 복지국가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그들의 주장을 강조했으며, 특히 주택건설계획의 장려와 같이 그들의 근본 믿음과 관련된 사회정책 분야에서는 노동당의 정책을 높이 평가했다.

1979년 마거릿 대처를 총리로 선출하면서 부활한 보수당은 특히 경제정책과 재정정책 분야에서 공론가 정신이 아닌 행동가 정신을 불러일으켰다(예를 들면 보수당은 노동당 정부가 국유화했던 많은 산업을 '사유화'했음).

영국 보수당이 유럽 경제공동체(EEC)를 영국이 주도하도록 하는 데 있어서 노동당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유럽 경제공동체는 윈스턴 처칠이 주장한 국제주의를 반영한 것으로, 그는 1940년에는 프랑스-영국 통일을, 1946년에는 유럽의 통일을 주창했다.

원래 이 공동체는 유럽 국가들의 경제통합에 의해서 그들 사이의 전쟁을 없애는 방법으로 창안되었고, 초기의 냉전시대 동안과 이후에는 외부의 공산주의 침략과 내부의 체제 타도라는 위협에 대항해 서유럽을 강화하는 수단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그러므로 유럽 경제공동체는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와 함께 의회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보루로서 기능했다. 정당정치의 무대에서 서유럽의 보수주의는 자유주의 중도파로부터 온건우파와 극우파에 이르기까지 2개 이상의 정당으로 대표되며, 3가지 유형의 정당을 찾아볼 수 있다.

농업정당(특히 스칸디나비아), 기독교민주당, 그리고 대기업의 이익과 결탁하고 때로는 뚜렷한 민족주의적 견해와 연합하는 보수당이 그것이다. 우파 정당들은 그리스도교 민주주의 전통을 가장 오랫동안 지속시켜왔는데, 근대 우파 정당의 선구자는 자유주의에 대항해 교회와 군주제를 지지했던 사람들로서 19세기 전반기에 출현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기업의 이익이 제3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교권의 이익은 1945년 이래 정부를 지배해온 이탈리아 기독교민주당(Democrazia Cristiana/DC)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탈리아 기독교민주당을 통해 가톨릭 교회는 이혼·피임과 같은 교회와 관련된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당은 다른 사회문제에 관해서는 일관된 정책을 펼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민주당 자체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며 자주 갈등을 일으키는 이익집단의 동맹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나누어진 독일에서 교회는 주요보수당인 기독교민주당연합(Christlich-Demokratische Union/CDU)에서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50년 이후 일어난 경제와 사회 문제에 관한 당내 논쟁의 결과 기독교민주당연합은 사회보장의 유지·개선을 비롯한 복지정책과 자유기업경제를 정책으로 확립했다. 1950년대 초기에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한 뒤 독일 내의 정치 분위기가 보수화됨에 따라 주요야당인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SPD)은 점차 사회주의 색채를 띤 강령을 버렸고 바트고데스베르크 회의(1959)에서는 실질적인 이윤동기를 주장하기까지 했다.

프랑스는 기독교민주당 중심의 온건한 보수주의라는 일반 형태에서 예외로 꼽힌다.

프랑스에서 기독교민주당과 가장 비슷한 집단은 가톨릭 교회, 우파, 그리고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정치집단으로 자리잡은 '인민공화운동당'(Mouvement Républicain Populaire)이다. 대신 프랑스에서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는 '공화국을 지키기 위한 연맹'(Union pour la Dé fense de la République)과 같은 드골주의자 집단을 지지했다.

민족주의 색채가 뚜렷한 드골주의자들의 보수주의는 프랑스가 통일 유럽에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통, 질서, 프랑스의 재건을 강조했다. 그러나 드골주의자들은 '독립파와 농민의 민족중심'(Centre National des Indepéndents et Paysans)과 같은 비드골주의자 집단과 마찬가지로 국내 사회문제에 관해서는 다양한 관점을 지지했다. 프랑스의 보수주의를 보수주의 집단의 수, 그들의 안정성 부족, 지역문제와 일치하는 경향 등으로 단순히 범주화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탈리아, 독일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보수주의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배적인 정치세력이 되었다.

이처럼 서유럽의 주요국가에서 보수주의는 매우 다양한 성격을 가진 정당으로 표현되면서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드러났다.

이 정당들은 전통적인 부르주아의 가치를 대변하며, 국가의 불필요한 경제관여와 급진적인 수입재분배 시도에 반대해왔다. 또 이 정당들은 이데올로기 결여와 분명한 정치철학의 부재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이런 이데올로기와 정치철학은 보수주의 정당들의 영향력 측면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치갈등 속에 내재하는 중요한 편견뿐 아니라 계속성과 안정성에 매우 중요한 영속적인 문화가치를 통해 보수주의를 정치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심리적 요인 및 문화가치와 관련된 기본적 편견으로서의 보수주의와 명백한 정치신조로서의 보수주의 사이의 관계는 19세기 중엽 서구에 문호를 개방한 이후의 일본 정당정치사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메이지 유신(1868)에 의한 정치적·사회적 변화는 봉건제도의 폐지 및 입헌정부와 같은 서구 정치이념의 도입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제도개혁과 급속한 산업화가 일으킨 혼란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전통적인 충성심과 태도가 정치발전을 이루는 데 있어서 더 중요한 요소라고 알려져 있다.

1930년대와 1940년대 군국주의자의 개입시기를 제외하고 1880년대 정당정치가 시작된 이래 일본을 지배한 것은 보수주의자였다. 보수당(가장 중요한 2개 보수당이 합병하여 1955년 자유민주당을 결성함)은 이데올로기와 교리가 아니라 인물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보수주의자 국회의원의 충성심을 결정한 것은 정책공약이 아니라 당내 파벌지도자에 대한 개인적 충성이었다.

미국의 학자 너새니얼 B. 타이어는 파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옛 일본의 사회적 가치·관습·관계를 받아들였다…… 충성심·위계구조·의무라는 옛 관념이 그들을 좌우했다. 국회의원(또는 모든 일본인)은 이 세상에 발을 내디디고 있을 때 매우 편안함을 느낀다."

자유민주당은 대기업의 이익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자유민주당의 정책은 일본의 자유기업경제가 발전하기 위한 안정된 환경을 조성한다는 목표를 우선적으로 추구한다.

이를 위해 정당은 서로 갈등하는 기업이익의 중매인으로 기능한다. 그밖에 자유민주당은 다른 아시아 국가에 대한 정책, 국가방위, 국내안보 등에 관심을 둔다.

미국에서는 전국적인 규모의 보수주의 정당이나 자유주의 정당을 찾아볼 수 없지만 정권교체가 잦은 2개의 포괄적인 연합정당이 있다. 민주당공화당은 때로 보수주의라 이름붙일 수 있는 이익집단을 포함한다.

예를 들면 남부 민주당에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속해 있으며, 공화당의 분파에는 지역적인 '뉴욕 보수당'이 있다. 신문·잡지 등의 언론에서는 보수주의라는 말을 상원의원 배리 골드워터와 로널드 레이건(전 캘리포니아 주지사로서 1980년 대통령에 당선됨)과 연관된 공화당 분파를 지칭하는 것으로 막연하게 사용하고 있다. 현대 미국의 보수주의는 어빙 배빗의 〈민주주의와 지도력 Democracy and Leadership〉(1924) 또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의 귀족주의적 전통주의와 같이 보수주의 시각을 드러내는 걸작들을 통해 문학과 종교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미국문학). 어떤 주의에도 속해 있지 않고 보수주의라는 딱지도 붙어 있지 않은 소설가 허먼 멜빌과 신학자 라인홀트 니부어 등은 물질적 진보와 자동화한 기술의 정신적 가격을 계산하면서 국가의 정신을 산술했다.

이런 의미에서 무의식적인 보수주의자라 할 수 있는 이들은 급진적 구호가 지배했을 때도 1970년대와 그 이후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멜빌이 "진보의 불손함"이라고 불렀던 것에 대항해 젊은이들이 생태와 환경을 지키도록 고무했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젊은 보수주의자들은 계급에 기초한 옛 엘리트주의를 가치에 기초한 새로운 엘리트주의로 승화시켜 이를 모두에게 개방했고, 그럼으로써 양(대중문화와 로봇 기술)을 가진 벼락부자로부터 질(문화적 환경과 물리적 환경)을 구해냈다.

아우슈비츠에서 경험한 공포는 현대 자유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가장 비(非)보수주의적인 원리, 즉 인간과 대중의 '본래 선'이라는 루소 식의 교리를 제거(사실상 보수화)하게 했다. 그래서 미래의 싸움은 이처럼 누그러진 자유주의자가 보수주의자와 연합해 그들의 공통된 입헌적·윤리적 틀을 함께 지키기 위해 좌파와 우파의 거울상으로부터 극단적 파괴주의자에 대항하는 모습으로 일어날 것 같다.

보수주의가 정당을 통해서 영향력을 발휘하든 심리적·문화적·제도적 요인을 통해서 영향력을 발휘하든, 보수주의는 사회적·경제적 변화의 비율 또는 합리주의 교리가 제시하는 것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더 설득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보수주의 비판가가 지적하듯 보수주의에게 명료화가 부족하고, 합리주의 정치의 풍부한 문헌과 비교되는 보수주의 명분의 설득적 표현물이 부족한 것은 보수주의의 기반이 되는 힘의 결과이기도 하다. 또한 '보수주의는 교리와 똑같이 나타날 필요가 있으며, 이 교리를 반대하는 것은 더이상 보수주의가 아니고 도망가는 보수주의이다'라는 식의 두려움 때문에 가장 훌륭한 보수주의 사상가들이 부끄러움을 느낀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많은 사람들은 사회생활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확대하려는 정부의 욕구가 너무나 강하므로 보다 명료하고 공격적이기까지 한 보수주의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보수주의자의 중요한 과제의 하나는 사회과학(특히 인류학과 심리학)이 너무나 오랫동안 사회적 기계화와 자유주의적 유토피아주의에 협력했으며 사회의 생존에서 전통·관습·진화의 역할을 너무나 드러낸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