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공화당

미국공화당

다른 표기 언어 Republican Party , 美國共和黨

요약 1854년 7월 미시간 주 잭슨에서 휘그당의 분파인 민주당원들과 노예해방주의자들이 스스로를 공화당이라고 칭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코끼리가 당의 상징물이다. 최초의 발기인들은 강력한 노예제 폐지론자들이었는데 이것은 북부지역의 전반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공화당의 역대 대통령은 에이브러햄 링컨, 앤드루 존슨, 윌리엄 매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하워드 태프트, 허버트 후버, 프랭클린 루스벨트, S. 트루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로널드 레이건, 조지 부시 등이다. 공화당의 정강정책은 전체적으로 보수적이어서 외교정책에서 강력한 반공산주의 입장을 견지했으며, 경제에 대한 국가의 규제를 축소시켰고, 부유한 자산가들에 대한 세금을 낮게 책정했으며, 인권옹호입법에 대한 분출하는 요구를 등한시했다.

미국공화당(Republican Party)
미국공화당(Republican Party)

코끼리가 당의 상징물이다.

1854년 7월 미시간 주 잭슨에서 휘그당의 분파인 민주당원들과 노예해방주의자들이 스스로를 공화당이라고 칭한 데서 비롯되었다. '공화당'이라는 이름은 제퍼슨의 공화주의를 회상하고 분파적인 이해나 주의 권리를 초월하여 국가의 통일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다. 최초의 발기인들은 강력한 노예제 폐지론자들이었는데 그들은 특히 새로 개척된 지역에 노예제도를 확장시키려는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에 완강히 저항했다.

1856년 제1회 전국 전당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은 연방의회가 각 지역의 노예제도를 승인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반대로 의회는 이 지역들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할 권리와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북부지역의 전반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처음 4년 동안 공화당은 민주당에 대한 주요세력으로 존재했던 북부의 휘그당을 대체하면서 급속히 성장했다(미국민주당). 1856년 최초의 후보로서 존 C. 프리몬트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11개주에서 패배했으나 1860년 18개의 북부 주에서 시행된 선거전에서는 2번째 후보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남부 주들의 연방탈퇴로 공화당은 연방정부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었으나 남북전쟁의 기나긴 고통은 1864년 선거에서 링컨이 재선될 가능성을 어둡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링컨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강화시키기 위해 전쟁에 찬성했던 민주당원 앤드루 존슨을 러닝 메이트로 삼았다. 전쟁이 종결되고 링컨이 사망한 뒤 급진 공화당 의원들은 존슨 대통령을 탄핵하고 나서 대통령보다는 의회에 의한 남부재건사업을 주장했다. 전쟁이 종결된 이래 공화당은 장기간 제1당으로 군림했는데, 북군의 승리가 공화당의 승리와 동일하게 인식되었으므로 북부 및 중서부 지역 농민들의 광범위한 호응을 받았으며, 보호관세를 옹호하고 궁극적으로 대기업을 후원하는 공화당의 정책에 따라 북부 도시지역과 산업계·금융계에서 공화당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공화당은 1860~1932년에 치러진 18차례의 대통령선거에서 14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당 내부에는 경직된 당의 통제와 소수의 과두지배체제에 반대하는 소규모 집단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자유공화당'이라고 불리는 이들 분리파는 율리시스 S. 그랜트 행정부의 부정부패에 항의하면서 1872년 공화당을 탈당했다(미국자유공화당).

1880년대와 1890년대 초반에 치러진 수많은 선거에서 공화당은 민주당을 누르고 압승을 거두었으며 1896년에는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했을 뿐 아니라 상원과 하원을 모두 지배하게 되었다.

민주당이 은화(銀貨)의 자유주조라는 기조하에 급진적인 경제정책과 인민주의적 정책을 채택함에 따라 공화당은 제1당으로 부상하여 1910년까지 계속 양원(兩院)을 지배했다.

1901년 공화당 출신의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는 독점적인 대기업을 공격하는 반면 노동자들에게는 보다 융화적인 정책을 취했으며 천연자원의 보존을 촉구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후임 대통령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보수주의적인 정책을 취하자 1912년 공화당을 탈당하여 진보당을 결성하고 진보당 후보로서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이러한 내분사태는 대통령선거와 양원선거에서 공화당에 참패를 안겨주었다. 이후 1920년 대통령선거를 승리로 이끈 뒤 공화당은 1920년대의 경제적 번영에 힘입어 1924, 1928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시기의 공화당 정책은 보수주의와 기업육성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1929년에 시작된 세계 대공황은 공화당에 심각한 여파를 미쳤고 대책수립에 미흡했던 후버 대통령은 1932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후보에게 참패했다.

루스벨트가 3번이나 재선되고 1945년 사망함에 따라 해리 S. 트루먼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며, 다시 1948년 선거에서 트루먼이 재선되는 것으로 이어진 20년 동안 공화당은 계속 권력에서 멀어져 있었는데, 양원 중 어느 하나도 지배하지 못했던 공화당은 전국적으로 소수당의 지위로 전락했다. 수년 동안 공화당원들은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을 강력히 반대해왔으나 1950년대에 이르러 연방정부의 역할과 규제력의 확대에 대해 대체로 찬의를 표명했다.

1952년 대통령선거에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공화당은 다시 집권당이 되었다.

아이젠하워 후보는 로버트 A. 태프트 상원의원에 의해 주도되는 당내의 보수주의 진영에 반대하여 온건 자유주의 노선을 정착시켰지만 공화당의 정강정책은 여전히 보수성을 면하지 못했다. 즉 외교정책에서 강력한 반공산주의 입장을 견지했으며, 경제에 대한 국가의 규제를 축소시켰고, 부유한 자산가들에 대한 세금을 낮게 책정했으며, 인권옹호입법에 대한 분출하는 요구를 등한시했다. 그럼에도 공화당은 대기업과 중소기업들로부터 지속적인 지지를 얻었고 새롭게 성장하는 도시외곽의 중산계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1960년대에 민주당의 통합주의적 정책으로 곤란을 겪어왔던 남부의 백인들로부터도 지지를 얻게 되었다.

1956년 아이젠하워는 재선되었으나, 1960년 온건파 후보인 리처드 M. 닉슨은 민주당 후보 존 F. 케네디에게 근소한 표 차이로 패배했다. 1968년 전당대회에서 다시 보수주의가 득세한 공화당은 그 해 대통령선거에서 근소한 표 차이로 승리를 거두었다.

1972년 대통령선거에서 닉슨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공화당은 의회선거·주지사선거·지방선거에서 모두 패배하여 양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다.

1974년 8월 워터게이트 사건의 책임을 지고 닉슨이 사임하면서 처음으로 부통령으로 지명되었던 제럴드 R.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1976년 선거에서 포드는 남부 출신의 민주당 후보인 지미 카터에게 패배했고, 1980년 선거에서 카터는 다시 공화당의 로널드 W. 레이건 후보에게 패배했다.

레이건은 1964년 골드워터 후보가 패배한 이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내 보수주의 진영의 지도자임을 자처했다. 레이건은 자신의 개인적 인기에 힘입어 1984년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제치고 가볍게 재선되었다. 이와 같은 레이건의 인기는 미국정치에서 새로운 보수주의가 대두되고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바라는 유권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공화당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대소(對蘇) 군사력 우위를 강조한 힘의 정치는 미국 경제 사정을 악화시켰고, 그의 뒤를 이어 공화당 대통령으로 당선된 조지 부시 행정부의 정책수행을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1992년 11월에 시행된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 경제의 부흥을 기치로 내세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빌 클린턴에게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부시가 패함으로써 공화당은 정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1994년 선거에서 공화당은 1954년 이래 처음으로 상하양원을 지배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1996년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당의 클린턴 대통령에게 패했다. 그로부터 4년 후 2000년 대통령선거에서 부시 전 대통령의 아들 조지 부시 텍사스 주지사가 민주당의 앨버트 고어 부통령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공화당은 다시 정권을 쥐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