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훈

컬훈

다른 표기 언어 John C(aldwell) Calho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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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82. 3. 18,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아브빌
사망 1850. 3. 31, 워싱턴 D. C.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정치지도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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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청년시절
  3. 정치활동
  4. 각 주의 권리옹호
  5. 컬훈에 대한 평가

개요

하원의원·국방장관·부통령(1825~32)·상원의원·국무장관 등을 지냈다.

주권(州權)과 노예제를 옹호했으며 구(舊)남부(남북전쟁 이전의 남부)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청년시절

컬훈은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의 유복한 개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족들은 그가 태어나기 직전 펜실베이니아에서 캘리포니아의 피드몬트 고원지역으로 이주했다. 그는 18세 때 지방학교에 입학한 후 2년 뒤에 예일대학교 3학년으로 들어갔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코네티컷 주 리치필드에 있는 법률학교에서 1년을 공부한 그는 찰스턴의 저명한 연방주의자 사무실에서 공부했다. 그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으나 1811년 사촌이었던 플로라이드 보노 컬훈과 결혼한 후 변호사 일을 중단했다. 컬훈의 부인은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은 상속녀로, 그녀의 재산 덕에 그는 농장주가 된 동시에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일찍이 1807년부터 영국과의 전쟁 필요성을 주장했던 열렬한 제퍼슨 공화파로서 1808년 주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811년에는 연방 하원의원이 되었다.

헨리 클레이 하원의장의 주요보좌관 역할을 맡았으며 외무위원회 위원장의 자격으로 1812년 6월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기간중 집권당의 원내총무로 맹활약해 동료들로부터 '전쟁이라는 과업을 어깨에 짊어진 젊은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정치활동

전후 컬훈은 의회내 여러 위원회 의장을 맡으면서 제2미국은행 설립, 영구적인 도로체계 건설, 상설 육군 및 근대식 해군 창설 등과 관련된 법의 제정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1816년의 보호관세에 대해서도 강력한 지지를 표명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이 기간 동안 그는 미국 국가주의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1817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컬훈을 국방장관으로 지명했으며 그는 이전에 의원으로서 활약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방장관으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당시 국무장관이던 동료 존 퀸시 애덤스는 컬훈을 "내가 이제까지 함께 일해본 다른 어떤 정치인보다도 지역적·당파적 편견을 극복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컬훈은 이처럼 뛰어난 의원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공화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급격히 부상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영달을 추구하는 열정, 논쟁시의 무성한 말잔치,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 등은 암암리에 불신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 전직 재무장관이었던 앨버트 갤러틴은 컬훈이 북부의 소수파벌 의원들에 의해 1821년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것에 대해 논평을 하면서 그를 "똑똑한 사람이며 2류 가운데는 수위를 차지하지만 정치적인 원칙에 충실하지 못해 좌표 없는 야망을 만족시키는 방법에서도 신중하지 못하다"고 이야기했다.

당시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컬훈도 대통령이 되려는 야망을 불태웠다. 그는 대통령 출마를 3번이나 시도했으며 매번 이번에야말로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대통령 출마를 시도하는 동안 익명의 작가들에 의해 그의 업적을 기리는 인쇄물이 출판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대체로 제3자에 의해 씌어진 자서전이었다.

각 주의 권리옹호

1830년대 컬훈은 이전에 국가주의를 지지했던 것만큼 극단적으로 엄격한 헌법해석에 열성을 기울였다.

1831년 여름 그는 각 주가 연방법이 무효이며 이의 실시를 거부할 수 있음을 선언해야 한다는 소신을 공개적으로 공언했다(주권, 연방법 거부론). 그는 3년 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이해와 주장 South Carolina Exposition and Protest〉에서 이같은 입장을 익명으로 밝힌 바 있다. 컬훈은 각 주가 독립적인 권리를 가져야 하며 연방헌법은 독립된 주들의 계약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주권). 따라서 연방의회가 제정한 법률을 각 주들이 위헌이라고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를 경우 연방법 거부 이론의 지지자들은 그 다음 헌법개정의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헌법 개정은 연방 상하 양원 모두 2/3의 찬성을 얻어야 하며 각 주 의회에서 3/4의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는 연방의회에 그 정도의 권한은 부여한다는 것을 뜻한다(미국연방법).

1832~33년 연방법 거부 위기 당시 핵심사안은 관세였지만 실제로 컬훈이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던 것은 '독특한 제도'인 흑인노예제의 보호문제였다.

물론 노예제도는 영국 의회의 1833년 법령처럼 소유주들에게 재정적인 보상을 해주는 방식으로 북부 출신의 다수를 차지하는 의회에서 언젠가는 폐지될 것이었다. 컬훈은 그의 공문서에서 관세는 "연방정부(General Government)의 위헌적인 법률을 막기 위해 주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중대한 문제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진다"고 피력했다.

그러나 그로서는 실망스럽게도 남부지역 대다수 주들은 공식적으로, 그리고 격렬하게 그의 난해한 연방법 거부 주장에 반대했다. 연방으로부터 각 주가 탈퇴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던 제퍼슨 데이비스마저도 의회법을 무효화시키는 주의 권리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았다.

컬훈은 천재임을 자처했지만 긴밀한 친분을 맺어나가는 능력이 부족했고, 대부분의 동지들이 점차 적극적인 적으로 바뀌어갔다.

이들 중에는 앤드루 잭슨 대통령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잭슨에게 배척당한 것은 불운 때문이었다. 컬훈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잭슨이 대통령이 되는 데 많은 공로를 세웠다. 1828년만 해도 컬훈의 장래는 그야말로 전도양양했다. 그는 후에 "나는 잭슨 장군과 함께 재선에 도전하는 부통령 후보였다. 승리할 것이 확실시되었으며 미국 시민들이 열망하는 최고위 관직에 오를 전망도 가지고 있었다"라고 그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각료 부인들이 육군장관의 부인을 거부하는 사건에 컬훈의 부인도 끼이게 되었는데, 잭슨은 그의 각료를 모두 해임했고 부통령이었던 그와의 관계도 끊게 되었다. 1832년 컬훈은 부통령직을 사임했으나 상원의원에 선출되어 그가 계속 주장해오던 연방법 거부 원칙을 놓고 대니얼 웹스터와 무모한 논쟁을 벌였다. 그는 20년 동안 상원에서 활동하며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급진주의자들에 맞서 남부지역의 단결을 위해 힘썼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노예제를 '긍정적인 선(善)'으로 본 그의 노예제 옹호는 자유주에 강력한 남부의 반감을 불러일으켰으며 또한 그는 남부를 하나로 통일시키지도 못했다.

컬훈에 대한 평가

미국 남북전쟁은 한 사람에게 주요책임을 전가시키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규모의 전쟁이었지만 컬훈이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이나 에이브러햄 링컨만큼이나 전쟁발발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논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컬훈은 그 자체가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그가 공직에 오른 뒤 전반부에는 견실한 국가주의자였으며 1823년 알렉산더 해밀턴의 아들에게 "워싱턴 행정부의 여러 조치에서 보여지듯이 강력한 연방정부를 세우려던 그의 아버지의 시도는 이 국가를 위해서는 유일한 옳은 정책"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생애 후반부에는 헌법을 무시하고서라도 각 주의 권리를 옹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죽음에 앞서 컬훈은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이야기했다. "만약 내가 나의 행적에 의해 평가받는다면 누구보다도 연방을 옹호한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 내가 후세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연방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일 것이다."

컬훈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휘하에 있었던 제임스 H. 해몬드는 이렇게 말했다. "컬훈은 이 시대 어느 누구보다도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관리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했으며 절대 굴복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위대한 일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힘을 모으지 못했다. 그는 천재성과 불복하지 않는 기질로 인해 타인의 시기를 샀으며 이는 남부를 '악'에 저항하는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컬훈의 사후에 출간된 정부에 대해서 쓴 2권의 책과 의회에서의 설득력 있는 연설로 그는 미국의 선두적 정치 이론가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카를 마르크스보다도 먼저 역사를 경제적으로 해석했으며, 특히 연방법 거부 이론 등 그의 기본 생각들의 대부분은 30년 동안 그가 상관으로 모셨던 제임스 매디슨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컬훈은 소수파의 지지자로 기억되고 있으나 남부를 제외하고는 소수의 노동자들이나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연방을 유지하는 문제에 대한 그의 해결책은 남부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자는 식이었던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연방과 남부 모두에 대해 충실했으며, 다행하게도 그 둘 중에서 선택을 강요당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보기 드문 통찰력의 소유자인 컬훈은 1850년 친구에게 연방이 해체될 운명에 처해 있으며 "나는 앞으로 3번의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12년 내에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사고방식에 있어 컬훈은 산수 입문서의 맨 끝에 나오는 해답을 먼저 보고 문제를 푸는 식이었다. 목표를 먼저 정하고 어렵지 않은 전제를 선택한 후 원하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어려운 논리를 전개하는 그런 식이다. 역사가인 윌리엄 P. 트렌트는 1890년대에 컬훈은 "이미 원하는 결론을 가지고 출발을 해서 거꾸로 전제들을 찾아나간다.…… 그는 사람들을 이끌기보다는 사상을 이끌었는데, 상상력이 부족해 사고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컬훈의 삶은 그리스 비극이나 셰익스피어 비극처럼 하나의 비극이었다. 신들은 필연적으로 그의 파멸을 원했으나 그가 원인을 제공한 측면도 있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남부! 불쌍한 남부!"가 전부였다. 시인 월트 휘트먼은 종전 직후 북군 병사들이 얘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컬훈을 기리는 진정한 기념비는 남부연합에 흩어져 있는 황폐한 농장과 쓸쓸한 굴뚝이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