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매디슨

제임스 매디슨

다른 표기 언어 James Mad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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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51. 3. 16(구력 3. 5), 미국 식민지 버지니아 포트콘웨이
사망 1836. 6. 28, 미국 버지니아 몬트필리어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제4대 대통령(1809~17).

목차

접기
  1. 개요
  2. 초년기와 정치활동
  3. 미국 헌법의 아버지
  4. 대통령 시절
  5. 말년
존 매디슨(James Madison)
존 매디슨(James Madison)

개요

제임스 매디슨은 미국 건국시조의 한 사람으로서 '헌법제정회의'에 참석해 연방헌법의 입안과 비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알렉산더 해밀턴, 존 제이와 함께 팜플렛 〈연방주의자 The Federalist Papers〉를 간행했으며, 제1~10조 헌법수정안을 발의했다.

제퍼슨 행정부 시절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루이지애나 매입'을 성사시켰고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는 1812년 전쟁(미·영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초년기와 정치활동

제임스 매디슨은 외할머니가 살고 있던 포트콘웨이에서 태어났으나 오린지 군의 유지이자 대지주인 매디슨가의 아들로서 평생 블루리지 산맥이 바라다 보이는 몬트필리어에서 거주했다.

1769년 반감독교회적 입장을 취하고 있던 뉴저지대학(지금의 프린스턴대학교)에 입학, 4년의 교육과정을 2년만에 이수했으며 학업 틈틈이 영국의 식민지정책에 대한 항의시위를 주동하기도 하고, 문예활동에 참여해 타 문학 서클 회원들을 풍자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무렵 과로로 인한 간질발작 증세로 군사훈련을 받기도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독학으로 공법을 공부하는 한편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을 역설하고(1774) 식민당국에 의한 비국교도의 구속을 비난했다.

제임스 매디슨은 한번도 특정 교파에 속한 적이 없었지만 장년기에 접어들어서는 유니태리언파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1776년 건강이 호전되기 시작하자 매디슨은 버지니아 주 '혁명위원회'에 가담, 종교의 자유를 역설했다. 뒤에 버지니아 주의회가 된 혁명위원회에서 토머스 제퍼슨을 도와 영국 국교회의 폐지를 주도했으나 위스키 판매에 제동을 가함으로써 재선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2년 동안 총독자문위원으로 활동한 매디슨은 1780년 3월 버지니아 주 대표의 한 사람으로 대륙회의에 파견되기도 했다.

작은 체구에 앳되어 보이고 목소리마저 가냘픈 제임스 매디슨이 발언권을 행사하는 데는 적어도 6개월이라는 기간이 소요되었지만, 온화한 태도 이면의 강인한 실천력은 어느새 그를 회의의 지도자적인 인물로 끌어올렸다.

또한 제임스 매디슨은 주권주의(州權主義) 세력을 견제하면서 독립전쟁 후 강화협상에 있어서의 프랑스의 중요성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대륙회의에서 매디슨은 미시시피 강을 합중국의 서부경계로 내세우고 스페인령 삼각주지역을 경유하는 미시시피 강에서의 항행권을 주장했다. 한편 여러 주의 무리한 요구에 대항해 광대한 서북부지역에 대한 버지니아의 특권을 옹호했는데, 서북부지역에 대한 제주(諸州)의 요구의 진의는 인디언으로부터의 럼주 구매를 승인받기 위한 것이었다.

제임스 매디슨은 서부영토를 합중국의 공유재산으로 대륙회의에 양도하도록 버지니아 주를 설득함으로써 무절제한 토지투기의 가능성을 사전에 불식시켰다.

1781년 북부 13개 주의 '연합규약'이 조인되고 군사적인 압력을 통한 연방재정분담 요청이 결실을 거두지 못하자 연방의회의 역할을 은근히 강조함으로써 제주 연합의 단결을 호소했던 제임스 매디슨은 연방과세권의 신설을 위한 규약수정안을 제출하고 이의 비준을 통해 연방의 분열을 방지하자는 설득력있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프랑스의 슈발리에 드 라 뤼제른 공사는 당시의 제임스 매디슨을 '분별력있고 사려깊은 미국 의회의 지도자'로 평가했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

1784년 다시 버지니아 주의회에서 활동하게 된 제임스 매디슨은 그리스도교 교사들의 재정원조를 위한 패트릭 헨리의 입법안을 무효화시켰다.

제임스 매디슨은 자신의 극우 국가주의가 초래하게 될 정치적인 파급효과를 우려해 1786년 주권론자인 존 타일러로 하여금 '아나폴리스 회의'의 소집을 추진하도록 설득했고 아나폴리스 회의는 이듬해 매디슨의 조력에 힘입어 제헌회의의 개최를 성사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제헌회의에서 에드먼드 랜돌프 주사를 통해 제출된 제임스 매디슨의 '버지니아 플랜'은 연방헌법의 기본골격과 주요원칙들을 형성했고 윌리엄 피어스 조지아 주 대표는 '가장 식견이 넓고 세련된 토론가이자 겸양과 절제의 미덕을 갖춘 신사'로 버지니아의 매디슨을 칭송했다. 소탈하고 스스럼이 없던 매디슨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무리없이 이끌어가는 협상과 조정의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제임스 매디슨은 '미국 헌법의 아버지'라는 영예로운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토론에 참여해 나날이 써내려간 세세한 기록들은 제헌회의에 관한 하나뿐인 의사일지로서 아직도 빛을 발하고 있다.

헌법초안의 비준을 위해 제임스 매디슨은 해밀턴, 제이와 함께 헌법논의에 관한 권위있는 논평지인 〈연방주의자〉를 간행했으며 마침내 버지니아 주의회의 초안승인을 얻어냈다. 존 마셜은 당시의 매디슨을 이렇게 평가했다.

"만약 웅변이라는 것을 논리 바탕을 둔 설득력이라고 규정한다면 제임스 매디슨은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웅변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새로이 연방하원에 진출한 제임스 매디슨은 10개 조에 이르는 헌법수정안을 발의했고 토론과정에서 종교 및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역설했다(권리장전). 매사추세츠 주 피셔 에임스의원이 '우리들의 지도자'라고 일컬었던 매디슨의 영향력은 독립전쟁의 부채해결을 위한 자금조달방식을 둘러싸고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과 의견차이를 보임으로써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해밀턴이 대자산가들의 영입을 통해 연방정부를 강화시키려 했던 반면, 제임스 매디슨은 기존 독립혁명전사들의 권익과 이해를 강조했다.

해밀턴의 승리는 연방의회의 권한을 합중국 전체의 복지문제에 엄격히 한정시키는 방향으로 제임스 매디슨의 입장을 전환시켰다(→ 색인 :미합중국은행). 매디슨은 이를 바탕으로 재무부의 업무보조를 위한 해밀턴의 연방은행창설안을 백지화시켰다.

그러나 대통령으로 취임해서는 그 필요성을 절박하게 주장하면서 연방은행을 창설했는데, 자신의 계획안이 합헌성 여부의 심사과정을 모두 거친 정당한 것인 반면에 과거의 해밀턴 안은 그 과정이 생략되었으므로 위헌이라는 것이 어설픈 해명이었다. 제임스 매디슨이 자신의 실책을 시인하는 경우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연방의회는 재정문제로 말미암아 매디슨파와 해밀턴파로 양분되기에 이르렀고 피셔 에임스는 이제 매디슨을 향해 '프로이센 류(類)의 파당적 규율을 신봉하는 권력지상주의자'라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매디슨파는 프랑스로부터 귀국한 토머스 제퍼슨이 국무장관으로 취임한 이후 '제퍼슨파'로 불림). 1794년 제임스 매디슨은 16세 연하의 퀘이커교도 돌리페인 토드와 결혼했다.

1797년 체결된 '제이의 조약'은 영국의 전시해상무역금지조치에 대한 통상보복계획을 좌절시켰고 제임스 매디슨은 연방하원의원직을 사퇴했다.

제임스 매디슨은 이듬해 '외국인규제법과 보안법'이 통과되자 '버지니아 결의안'을 작성, 신설법규가 헌법수정조항 제1조를 침해하고 있으며 제주는 총궐기해 연방정부의 권력남용에 제동을 가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의안은 연방법령에 대항할 수 있는 개별 주 권한의 승인이라는 과장된 법률해석을 낳았고 80대의 매디슨은 훗날 이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남부의 사우스캐롤라이나와 한 차례 논전을 치러야 했다.

1801~09년 8년 동안 제퍼슨 행정부의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제임스 매디슨은 "대통령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라는 말로 대통령을 자주 내세웠는데 그가 실제로 한 역할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외무부 문서국 기록에 의존해야 할 정도이다.

영국 외교관들은 제임스 매디슨의 껄끄럽고 퉁명스러운 태도와 유창한 언변을 기억했지만, 존 어데어, 니콜라스 길먼 상원의원이나 루이 마리 튀로 프랑스 공사 등은 제임스 매디슨을 '대통령을 좌우하는 인물'로 파악하고 있었다.

대통령 시절

제임스 매디슨은 외교부문에 대한 취약성이 지적되면서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이 의문시되었으나 과거 외교활동에 관한 대대적인 홍보가 주효하여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했다(수출입금지법). 신임 대통령 매디슨은 상원 내 주요파벌의 영향력을 감안, 유력 정치인의 인척인 로버트 스미스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했으나 2년 후 스미스를 축출할 때까지 스스로 모든 외교서한을 작성했다.

처음에 전임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전시해상무역금지조치를 지지했던 제임스 매디슨은 취임한 지 2주일이 지나자 교전중인 영국과 프랑스에 각각 다음과 같은 비밀외교전문을 발송했다. "양국 가운데 어느 쪽이라도 합중국의 통상무역을 방해한다면 합중국 의회는 차기 회기에서 이의 징계를 위한 선전포고를 결의할 것이다"

제임스 매디슨은 영국 정부와 협정을 체결, 중립국의 대(對)프랑스 무역을 제한해왔던 '추밀원칙령'을 폐기시키기에 이르렀으나, 협정은 영국 공사의 밀약위반으로 파기되고 말았다.

협정에는 미국이 대프랑스 통상금지규약을 변함없이 준수하며 영국의 적성국가들에 대한 전시무역을 중지하고 프랑스와의 교역을 시도하는 미국 상선들에 대한 영국의 나포권을 인정한다는 전제조건들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후임 영국 공사가 "밀약 위반은 대통령이 이미 가정하고 있던 사실이었다"라는 소견을 피력했을 때, 제임스 매디슨은 이를 사실무근으로 일축하고 후임공사를 즉시 본국으로 송환시켰다.

합중국의 통상무역에 대한 영국 정부의 제재가 장래에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제임스 매디슨은 1810년 11월 2일 영국과의 교류단절을 선포했고 같은날 프랑스 정부에 영국이 통상제재조치를 철회하지 않는 한 전쟁의 위험도 불사하겠다는 요지의 외교전문을 발송했다.

제임스 매디슨은 그보다 일주일 앞서 의회통보(당시 의회는 휴회중)도 공식성명서 발표도 행하지 않은 채 스페인령 서부 플로리다에 대한 무력점령을 명령했으며 사후에 '루이지애나 매입' 차원에서 그 소유권의 정당성을 설명했다. 매디슨은 1812년 적지않은 반대를 무릅쓰고 재선에 성공했다.

비밀외교의 진상은 규명되지 않았고 연방주의자들에게 제임스 매디슨은 강경 주전론자들에 이끌려 1812년 전쟁에 말려든 소심한 평화주의자로 낙인찍혀 있었다.

평화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던 제임스 매디슨은 마침내 전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매디슨은 합중국의 총사령관으로서 군비확충을 위한 여론환기에 힘썼지만 의회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노쇠한 혁명전사들을 육군 지휘부에 배속시키는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소규모 정예 해군이 눈부신 전공을 거듭했던 반면 육상에서는 영국 육군의 집요한 공세가 계속되고 있었다.

1814년 전쟁이 3년째로 접어들었을 때 제임스 매디슨은 장성의 연령을 평균 60세에서 36세 정도로 낮추었고 이후 승전보가 줄을 이었다. 영국 정부는 대미(對美) 무역제재조치를 철회했으며 전쟁은 종전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사실 교전이 시작된 이튿날 영국은 총독자문위원회규정을 폐기시켰고 전쟁의 주원인은 이미 오래 전에 해소되고 없었다. 캐나다, 영국, 유럽 대륙의 언론들이 다투어 미국의 승리를 보도하는 가운데, 반전을 선동한 연방당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고 매디슨의 인기는 정점에 도달했다.

굳이 제임스 매디슨의 실책을 거론하자면 암스트롱 육군장관을 비롯한 몇몇 무능한 고위관료들을 제때에 경질시키지 못한 점을 들 수 있었다.

1816년 제임스 매디슨의 대통령 사임에 즈음해 개최된 워싱턴의 대중집회는 '참정권과 시민권, 종교적 자유를 희생시키지 않고 합중국의 국익과 영광을 드높인' 그의 헌신적인 노고에 경의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매디슨은 전쟁을 반대하는 뉴잉글랜드 연방주의자들의 사보타주나 그 어떤 위협에 직면해서도 일찍이 1793년 언명했던 다음과 같은 행동원칙을 거스르지 않았다.

"공화주의의 중요한 본질의 하나는 정부가 시민을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국가와 정부에 정치적인 통제·감독권을 행사하는 데 있습니다."

말년

사임 후 사망시까지의 19년 동안 제임스 매디슨은 버지니아를 떠나지 않았다.

제임스 매디슨은 혁신적인 영농방식으로 5,000에이커의 농장을 경영하는 한편 앨버말 농업협회 회장으로 자연계의 파괴가 인류를 파멸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당시로서는 이색적인 주장을 펴기도 했다. 매디슨은 노예제도를 경제적인 속박으로 간주, 연방정부가 공공용지를 매각한 자금으로 전국의 노예들을 사들이고 이들을 라이베리아에 정착시키는 방법으로 노예제의 폐지를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설파했다(노예제폐지운동). 1792년 도망쳤던 몸종 하나가 다시 붙잡혀왔을 때 매디슨은 그를 자유인으로 놓아준 뒤 자기 밑에 정식으로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또다른 제임스 매디슨의 노예는 주인이 연방정부에 몸담고 있는 동안 몬트필리어 농장의 1/3을 관리하고 있었다.

1819년 제임스 매디슨은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버지니아대학교 설립계획에 참여했고 뒤에 총장으로 취임했다. 과도한 내빈접대와 만성적인 농업침체, 늙고 병든 노예들의 뒷바라지, 그리고 철없는 양자의 무절제한 지출 등은 고령의 매디슨을 빈궁 속으로 몰아넣었다.

말년에 제임스 매디슨은 류머티즘을 앓아 간신히 손가락만을 굽힐 정도였지만 제주의 연방법실시거부 및 연방탈퇴의 움직임을 비판하는 서한과 논설들을 발표했다. 이들은 최후의 역작인 〈합중국 국민들에게 고함 Advice to My Country〉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헨리 클레이에 의해 '조지 워싱턴 이후 가장 위대한 미국의 정치가'로 추앙받았던 매디슨은 1836년 6월 28일 블루리지 산맥 기슭의 몬트필리어에서 8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