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해밀턴

알렉산더 해밀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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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55/57. 1. 11, 영국령 서인도제도
사망 1804. 7. 12, 미국 뉴욕 시
국적 미국

요약 미국 제헌회의의 뉴욕 대표(1787), 초대 재무장관(1789~95).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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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독립전쟁에서의 활동
  4. 초기 정치활동
  5. 해밀턴의 재정안
  6. 내각을 떠나서
  7. 버와의 불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해밀턴(Alexander Hamilton)

개요

알렉산더 해밀턴은 문서 〈연방주의자 Federalist〉의 주요작성자로서 신생 미국에 강력한 정부가 수립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에어런 버와의 결투로 죽었다(미국 재무부).

초기생애

아버지 제임스 해밀턴은 떠돌이 교역상이며 할아버지 알렉산더 해밀턴은 스코틀랜드 에어셔의 캠버스케이스 지방 지주였다.

어머니 레이첼 포싯 라빈은 프랑스 위그노(신교도) 의사의 딸이며 독일(또는 덴마크) 상인 요한 미카엘 라빈의 아내였다. 어머니는 남편을 따라 덴마크령 서인도제도의 세인트크로이 섬으로 이주했으며 1752년부터 제임스 해밀턴과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1758년까지 남편 요한과 이혼하지는 않았다. 1765년 제임스 해밀턴은 가족을 버렸다. 생활이 어려워진 레이첼은 조그만 가게를 열었으며, 알렉산더 해밀턴도 11세부터 얼마 전에 세인트크로이에서 문을 연 뉴욕 출신 상인 2명의 회계사무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768년 레이첼이 죽자 어머니의 친척이 알렉산더 해밀턴의 후견인이 되었고 1772년에 그는 수완·근면성·친절함 등으로 인해 장부 계원에서 지배인의 지위로 승진했다. 그뒤 해밀턴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뉴저지의 엘리자베스타운에 있는 대학 예비학교에 들어갔고, 1773년 가을에는 뉴욕의 킹스 칼리지(지금의 컬럼비아대학교)에 입학했다. 매우 야심 만만했던 해밀턴은 열심히 공부하고 성적이 뛰어난 학생이었지만 학업은 영국에 대한 식민지 아메리카의 전국적인 저항으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1774~75년 해밀턴은 영국 상품의 수입금지·소비금지·수출금지라는 대륙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며 퀘벡에 대한 영국의 정책을 공격하는 영향력 있는 팜플렛 3가지를 썼다.

익명으로 발표된 이 출판물(이 가운데 1개는 당대의 유능한 선전가인 존 제이와 존 애덤스의 이름으로 되어 있음)은 알렉산더 해밀턴의 조숙함을 보여주는 최초의 확실한 증거이다.

독립전쟁에서의 활동

1776년 3월 알렉산더 해밀턴은 뉴욕 식민지 의회에 있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식민지 포병대의 대위로 임관했다(미국독립전쟁). 해밀턴은 자신의 부대를 조직하여 트렌턴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 알렉산더 해밀턴은 콘월리스 경이 이끄는 영국군의 래리턴 강 도하를 저지해 그들이 조지 워싱턴의 식민지 주력군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1777년 2월 워싱턴은 해밀턴에게 중령 계급을 내리고 자신의 부관으로 삼았다. 워싱턴의 참모로 있는 4년간 해밀턴은 워싱턴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통신업무를 담당했다. 해밀턴은 중요한 군사 업무를 띠고 여러 번 파견되었으며,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 덕분에 워싱턴과 프랑스의 장군 및 해군 사령관 사이를 연결하는 연락 장교로 일했다.

부와 영향력을 갈망했던 알렉산더 해밀턴은 필립 스카일러 장군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 스카일러가(家)는 뉴욕 최고 명문가 중 하나였다. 1781년 10월에는 콘월리스군이 있던 요크타운을 포위 공격하는 작전에서 영국군의 거점 한 곳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초기 정치활동

1781년 11월 독립전쟁이 사실상 종결되자 알렉산더 해밀턴은 올버니로 가서 법률을 공부했고, 1782년 7월 변호사 자격을 획득했다.

같은 달 뉴욕의 재정 담당관이 되었으나 뉴욕 의회가 알렉산더 해밀턴을 대륙회의 대표로 선출하자 그 자리를 사임했다. 1781년 7월부터 1782년 7월까지 해밀턴은 '대륙주의자'(Continentalist)라는 필명으로 〈뉴욕 패킷 New York Packet〉에 강력한 중앙정부를 주창하는 6편의 글을 썼다. 한편 의회에서는 1782년 11월부터 1783년 7월까지의 기간에 최초의 미국 헌법인 '연합헌장'(Articles of Confederation)이 국가의 약화와 분열을 초래할 근원이 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면서 역시 같은 주장을 폈다.

1783년 알렉산더 해밀턴은 뉴욕 시에서 변호사 일을 시작했으며, 1787년에는 뉴욕 하원의원에 선출되었다(국왕파). 한편 해밀턴은 1787년 3월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헌회의에 뉴욕 대표로 파견되었다.

뉴욕의 반대자들은 이 헌법을 재빨리 공격했고, 알렉산더 해밀턴은 신문에 '카이사르'(Caesar)라는 서명으로 글을 써서 그들에게 답했다(연방제도, 미국연방헌법). 이 글이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이번에는 '푸블리우스'(Publius)라는 또다른 고전적 이름으로 버지니아 대표인 제임스 매디슨 및 외무장관 존 제이와 함께 85편의 일련의 논문 〈연방주의자〉를 썼다.

헌법과 공화정부를 옹호한 이 글은 1787년 10월부터 1788년 5월까지 신문에 실렸다. 알렉산더 해밀턴이 적어도 2/3를 집필한 〈연방주의자〉는 널리 읽혀 당시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고, 고전적인 정치 논설의 하나가 되었으며, 미국의 정치제도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1788년 해밀턴은 대륙회의의 뉴욕 대표로 재임명되었다. 그해 6월 연방 헌법의 비준을 결정하는 협의회가 뉴욕에서 열렸을 때 해밀턴은 앞장서서 헌법을 옹호했고, 헌법은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었다.

해밀턴의 재정안

1789년 워싱턴 대통령이 알렉산더 해밀턴을 초대 미국 재무장관으로 임명했을 때 의회는 그에게 '공공 신용에 대한 적절한 지원을 위한' 계획안 작성을 요청했다.

자신을 워싱턴 정부에서 총리와 같은 직위에 있다고 생각한 알렉산더 해밀턴은 대담하고 뛰어난 안을 작성했다. 강력한 연방 건설을 목적으로 한 이 안에는 정부에 대한 해밀턴의 정치철학이 담겨져 있었다. 해밀턴의 직접적인 목적은 국내외 신용을 확립하며, 주권(州權)을 억제하고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해밀턴은 의회에 제출한 4개의 주목할 만한 보고서를 통해 자신의 계획의 대요를 그렸다(1790~91).

알렉산더 해밀턴의 계획안을 둘러싼 논란 및 외교정책에 관계된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전국적 정당이 출현했다.

워싱턴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더 해밀턴도 분파의 출현을 무질서와 불안정과 동일시하며 개탄했다. 해밀턴은 정당을 초월할 수 있는 뛰어난 인물들로 이루어진 정부를 희망했다. 하지만 해밀턴은 주로 자신의 정책을 지지하는 정치조직인 연방파(Federalist Party)의 지도자가 되었다. 해밀턴은 자신의 안이 의회를 통과할 수 있기 위해서는 조직된 정치적 지지와 강력한 지도력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연방파의 지도자 자리에 앉았다.

해밀턴주의에 반대하는 정치조직은 하원의원 제임스 매디슨과 국무장관 토머스 제퍼슨이 조직한 공화파(Republican Party)였다. 대외적인 면에서 연방파는 영국과의 긴밀한 유대를 선호한 반면, 공화파는 프랑스와의 오랜 결속을 강화하려는 입장이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자신의 안을 실현시키기 위해 제퍼슨이 담당하고 있던 외교 분야에 개입했다. 프랑스 대혁명 및 그것이 전개한 평등이론을 혐오한 해밀턴은 프랑스를 원조하는(다시 말해 영국에 타격을 입히는) 제퍼슨의 정책을 방해하려는 동시에 워싱턴이 자신의 외교안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외교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해밀턴의 구상은 제퍼슨과의 불화를 초래했으며,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를 내각에서 몰아내기 위해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

1793년 2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알렉산더 해밀턴은 이 전쟁을 1778년 미국이 프랑스와 체결한 동맹조약을 파기하고 미국을 영국과 가까운 쪽으로 몰고 가기 위한 계기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제퍼슨은 프랑스와의 동맹관계는 여전히 굳건하다고 주장했다. 워싱턴은 본질적으로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1793년 4월 중립을 선언했다. 한편 영국이 프랑스령 서인도와 무역하던 미국의 선박을 나포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그밖에 여러 가지 불만사항이 생기면서 국내에서는 영국과의 전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나 해밀턴은 여기에 반대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이러한 전쟁은 국가적 자살행위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해밀턴의 계획은 자신의 재정체계를 지탱하는 영국과의 교역 및 수입관세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밀턴은 대통령을 설득해 미국의 불만사항의 시정을 협상하기 위한 사절로 존 제이를 런던에 파견하도록 했다. 해밀턴은 제이에게 지시를 내려 협상을 이루어내도록 했다. 또한 1795년 제이가 가지고 온 조약안이 국내에서 인기를 얻지 못하자 신문에 '카밀루스'(Camillus)라는 이름으로 여러 편의 글을 써서 이를 옹호했다(제이 조약). 어쨌든 이렇게 해서 체결된 영국과의 조약은 양국간의 평화를 유지시킨 동시에 해밀턴 체제를 구했다.

내각을 떠나서

알렉산더 해밀턴은 비난에 부딪히고 피곤해진 몸으로 1795년 1월 31일 내각을 떠났다.

그러나 내각을 떠난 뒤에도 비공식적인 조언자로서 알렉산더 해밀턴의 영향력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워싱턴과 그의 내각은 거의 모든 정책 현안에 관해 해밀턴에게 조언을 요청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연방파 지도자들은 해밀턴의 주장을 무시하고 대통령 후보로 존 애덤스를, 부통령 후보로 토머스 핑크니를 지명했다. 애덤스가 해밀턴의 원칙에 충실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해밀턴은 선거인단을 조종하여 핑크니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애덤스가 선거에서 승리했고, 알렉산더 해밀턴의 술책은 연방파 내 불신의 분위기만 낳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해밀턴의 영향력은 지속되었다. 애덤스가 워싱턴의 각료들을 교체하지 않았고, 각료들은 해밀턴과 모든 정책을 논의하고 그에게 신뢰성 있는 정보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사실상 해밀턴의 정책을 대통령에게 촉구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미국과의 관계를 끊자 알렉산더 해밀턴은 단호한 입장을 취했지만, 우호관계의 재개를 시도한다는 대통령의 정책에 동의했다.

미국의 주권을 모욕하는 내용의 프랑스 서한이 공개된 뒤 애덤스 대통령은 1798년 파리로 평화 사절을 파견했다. 그러나 사절의 임무가 실패로 돌아가자 알렉산더 해밀턴은 국가 전시체제로 돌입할 것을 원했다. 해밀턴은 이미 선전포고 없는 해상전쟁에 착수한 프랑스가 미국을 침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워싱턴이 새로 구성될 군대의 명목상 지휘관이 될 예정이었지만 해밀턴은 자신이 그 자리에 앉고자 했다.

애덤스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이러한 바람에 반대했지만 워싱턴은 애덤스에게 압력을 넣어 해밀턴을 소장에 임관하고, 군의 제2인자인 감찰관에 임명하도록 했다. 애덤스는 굴욕감을 느끼고 해밀턴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해밀턴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령 루이지애나와 플로리다를 비롯한 남부지역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이러한 구상은 실현되지 않았다. 애덤스는 독자적인 외교를 통해 분쟁이 확산되는 것을 막고, 의회의 명으로 임시군대를 해체했다. 해밀턴은 1800년 6월 자신의 직위를 사임했다. 한편 애덤스는 자신의 내각에서 '해밀턴의 앞잡이'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해임했다.

그 보복으로 알렉산더 해밀턴은 애덤스의 재선을 막으려 했고, 이 두 사람의 다툼은 연방파의 분열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파의 토머스 제퍼슨과 에어런 가 선거인단 투표에서 같은 수로 최다 득표를 얻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결정은 하원에 넘어가게 되었다. 제퍼슨을 미워한 연방파 의원들은 버에게 표를 던지려고 했지만 해밀턴은 이들을 설득하여 제퍼슨을 선택하도록 했다. 그러나 오랜 정적인 제퍼슨의 당선을 지지함으로써 해밀턴은 당내에서 권위를 상실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그의 정치적 활동도 마감하게 되었다.

버와의 불화

1801년 알렉산더 해밀턴은 지방에 '그레인지'라는 저택을 지었으며, 연방파 신문인 〈뉴욕 이브닝 포스트 New York Evening Post〉를 공동 창간했다.

이 신문은 주로 알렉산더 해밀턴의 사상을 반영했다. 〈포스트〉를 통해 해밀턴은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을 열렬히 환영했다. 하지만 뉴잉글랜드 연방파들은 여기에 반대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탈당을 거론하고 1804년에는 버와 함께 해밀턴에 대한 지지문제를 협상하기 시작했다. 해밀턴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연방파들은 뉴욕 주지사 후보로 버를 지지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버와 경선을 벌인 공화파 후보를 지지했고, 결국 근소한 차이로 해밀턴이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공화파 후보의 당선이 해밀턴의 영향력 때문인지는 의심스럽다. 어떻든 해밀턴과 버는 오랜 적수였고, 해밀턴은 버의 야심이 실현되는 것을 번번히 막았다. 선거가 끝난 뒤인 1804년 6월 버는 그해 4월에 있었던 디너 파티에서 해밀턴이 자신에 대해 야비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해밀턴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해밀턴은 결투를 싫어했지만 버의 도전을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두 사람은 7월 11일 아침 뉴저지 주 위호컨 언덕에서 만났다. 그곳은 3년 전 19세인 알렉산더 해밀턴의 장남 필립이 결투로 목숨을 잃었던 장소였다. 버의 탄환이 해밀턴의 몸에 적중했고, 해밀턴은 쓰러졌다. 결국 해밀턴은 아내와 7명의 자식을 빚더미에 남겨두고 죽었는데, 빚은 친구들이 청산해주었다.